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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19 πορευθέντες οὖν μαθητεύσατε πάντα τὰ ἔθνη βαπτίζοντες αὐτοὺς εἰς τὸ ὄνομα τοῦ πατρὸς καὶ τοῦ υἱοῦ καὶ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20 διδάσκοντες αὐτοὺς τηρεῖν πάντα ὅσα ἐνετειλάμην ὑμῖν καὶ ἰδοὺ ἐγὼ μεθ᾽ ὑμῶν εἰμι πάσας τὰς ἡμέρας ἕως τῆς συντελείας τοῦ αἰῶνος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
| 마태오의 복음서 28장 19-20절 (공동번역 성서) |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고전 그리스어: Τριάδος, 라틴어: Trinitarismus, 영어: Trinitarianism[1])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세 위격들의 신학적 의미에서 출발한 단일한 하느님(하나님)에 대한 신학 이론이다. 성자 하느님(예수 그리스도)과 성령 하느님이 성부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다루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같은 본질을 공유하되 그 위격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각 위격 사이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으며, 삼위는 모두 각각 온전한 하느님이다. "그럼 기독교는 삼신론인가"라고 묻는다면 아니다. 이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이 삼위일체론이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신앙의 영역이라고 하기도 한다.
흔히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인격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설명하는데, 이 부분은 잘못하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사람의 인격이나 하느님의 위격이 영어로는 Persons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부분은 영어표현의 한계인데 이 부분의 뜻을 잘못 적용해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위격과 사람의 인격은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이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을 2개의 위격인 신격과 인격으로 구분하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네스토리우스이다. 그러므로 인격이나 신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위격(Hypostasi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고 정확한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은 1개의 위격 안에 2개의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칠십인역으로서) 히브리 성경만 공인되었던 신약시대의 초기교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며/하느님 그 자체이시다"고 믿고 가르쳤지만, 아래에서부터 설명되는 구체적인 신학 모델로서의 삼위일체론까지 정립했던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 이론은 그보다 후세의 신학자들과 교부들이 히브리 성경에 유일하신 하느님이 언급되어 있고, 신약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이 등장하므로 이를 해석하고자 숙고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서비평의 등장 이후 신개신교 신학에서는 학문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기 꺼려지거나, 심지어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20세기 이후 비판받으며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교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취급한 개신교 신학자들까지 나오는 데 이르렀다. 오늘날에는 사실상 가톨릭-정교회는 물론이고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 교파에서 삼위일체론은 매우 중요한 교리 중 하나로서 여겨진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순간 의심의 여지 없이 이단 혹은 이교 취급을 받아 온 역사는 과거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e.g. 아리우스파, 모르몬교)
이해와 묘사
이하 내용의 대부분은, 이해하기 위해서 실체와 효능인의 개념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관점과 위격에 대한 교부 철학, 스콜라 철학의 입장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동시에 이 본문에도 정통 삼위일체론과 다른 내용이 중간중간에 적혀있었다.
| 삼위일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본질에 대하여 성자 종속론이나 양태론 등의 거짓된 탈출구를 만들어내서 탈출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알 수 없는 것(분명히 한 분이신데 셋이시다)을 알 수 없는 것 그대로 결론을 낸 것인데, 이런 삼위일체론이 오히려 지식에 대한 탐욕으로 변질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다 볼 수 있다. |
|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리스도 신앙」 |
| 045 삼위일체의 신비를 인간의 이성만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중략) 이것은 인간 이성만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신비이며. 오로지 하느님께서 계시하셨기 때문에 인식이 가능하다. |
| 『말씀으로 익히는 가톨릭 교회 교리 문답 』(정승현 요셉 신부 지음), p.56. |
요약해서 삼위일체론은 알 수 없는 신의 본질을 다른 무언가로 포장해서 결론내지 않고, 알 수 없음이라는 상태 그대로 결론을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말해서 삼위일체론은 부정신학[2]의 산물인데 원래 삼위일체론은 신학분야 중에서도 신의 본질에 대하여 다루는 신론에 속하고, 신론은 헤시카즘을 추구하는 동방정교회는 물론 서방교회인 가톨릭 교회에서도 주로 부정신학적으로 다룬다. 당장에 서방교회의 스콜라시대의 대가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다른 부분은 긍정신학으로 다루다가 신론에서는 부정신학으로 다룬다.
주류 기독교에서 정통 교리로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3] 많은 그리스도인이 양태론이나 역동적 군주신론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4]
같은 아브라함계 신을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인 이슬람, 유대교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 이슬람과 유대교에서는 이 교리 때문에 기독교를 다신교적 요소를 받아들였다고 비판하기도 하며 일종의 신성모독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중세 시대에는 아예 '다신교도'가 이슬람 사회에서 기독교도를 가리키는 멸칭으로 통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기독교에서는 유대교를 이슬람교보다 가깝게 보지만 유대교 측에서는 삼위일체의 존재 때문에 이슬람이 오히려 교리적으로 더 가깝다고 보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어디까지나 인간인 예언자로서 존경하고 있고, 심지어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 이전에 존재한 메시아임도 인정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언자라는 입장이다. 성령은 천사나 하느님의 권능으로 보고 있으므로 삼위일체론을 부정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주교들과 교부들이 "성자와 성부는 동일한 실체다"(Homoousion on Patri)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삼위일체론의 기본 개념이 정리되었다. 다만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와 성부의 동질성을 말하는 구절도, 구분을 말하는 구절도 모두 발견된다. 여기서 양 극단의 해석(아리우스파와 단일신론)을 쳐내고 나온 것이 니케아 공의회의 합의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물, 얼음, 수증기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은 똑같은 H2O라는 설명이 자주 쓰인다. 그러나 이 표현은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만약 '겉모습'에 주목하여 버려서, 성부와 성자는 곧 같은 존재인데 하나의 본체가 서로 겉모습만 달리 나타났을 뿐이라고 이해한다면[5], 그 생각은 성부수난설, 혹은 양태론이라고 불리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있었던 이단적 주장이다.
이 비유가 문제가 있는 이유를 좀 더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H2O라는 분자 하나가 물, 얼음, 수중기 세 형태로 동시에 존재하지 못한단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삼중점에서는 물질이 고체, 액체, 기체로 공존하지만, 분자 하나는 삼중점에서도 고체이거나 액체이거나 기체 상태이다. 세 위격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겉모습을 바꿔가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 간혹 양자역학의 입자 파동 이중성으로 설명하려고도 하는데, 입자와 파동도 한 순간에는 한 형태로만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대 물리학·화학 차원에서의 직접적인 비유는 힘들다.
또한 페르소나 또는 페르손즈라는 용어의 이해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원래 이것은 기독교에서 삼위일체에 사용한 용어이지만, 삼위일체론에서 활용된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고유하게 발전하여 기독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페르소나 단어를 복수형으로 사용할 때, 이 단어의 현대적 의미로 말미암아 거의 필연적으로 복수적인 정신 행위의 중심, 정신적 주체성과 자유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는 이러한 세 가지 중심은 있지 않다. 하느님 안에 단 하나의 본성이 있고 단 하나의 절대적 자기존재가 있으며 아버지의 자기표현은 단 하나 로고스(이는 말하는 이가 아니라 말해진 이다)가 있고,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에는 (두 가지 행위를 전제하는) 상호 사랑이 없고, 아버지의 사랑하며 구별을 설정하는 자기수용이 있다.
라너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페르소나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각 위격은 자기의식을 소유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본성을 매개하여 주어진 것이며, 그렇기에 각 위격의 자기의식은 위격들 서로를 구분 짓지 않으며, 하느님 안에 세 가지 '주체성'은 없다. 만약 세 가지 주체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삼신론의 위험에 떨어진다. 때문에 라너는 페르소나 개념을 보충하기 위해, 구별되는 '자립실체방식'(distinkte Subsistenzweise)을 보조 개념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사실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어려운 개념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논리체계에서는 아예 성립하지 않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성부도 하느님이고 성자도 하느님이며 성령도 하느님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부=성자=성령이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논리체계인데, 그건 또 아니라고 하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삼위일체는 그냥 믿음이지 인간이 확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는 신앙의 신비로 불리는 것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게 그리 쉽지 않은 게, 예수가 곧 성부라고 해도 이단이고, 예수는 성부와 별개라고 해도 이단으로 판단한다. 정확하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신적 본질은 같되 위격은 다르다'라는 의미다. 좀 더 복잡한 교부시대 표현을 빌리면 성부가 성자를 낳았고, 성부에게서 성령이 발현한다.[6] 그러나 세 위격은 모두 태초부터 존재하였으며 선후 관계는 없다. 이 논리가 시간을 넘는 4차원구조로 3차원인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워 계시의존사색을 필요로 한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하느님은 한 분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아야 된다고 말하면 이해하기가 쉬운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은 분이 아니라고 하니까 논리가 꼬인다.
하지만 믿음의 영역을 떠나 이성적으로는 설명이 쉽게 되지 않는 까닭에, 이러한 삼위일체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묻는 시도가 중세 철학계에서 일어나게 되었고, 이것이 곧 보편논쟁이 된다. 이 보편논쟁에서 가장 큰 두 축이 되었던 의견은, 삼위가 실재한다고 보는 실재론과, 이름만이 있을 뿐이라는 유명론이었고, 각각 성 안셀모와 오컴의 윌리엄이 해당 사상을 대변했다.
삼위일체는 애초에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서방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이른바 요한의 콤마로 삼위일체에 대해 성서적 근거를 부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요한의 콤마는 동방교회 쪽 그리스어 필사본에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서방교회의 라틴어 필사본에만 나타났다. 이 구절은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는 것이 문헌비평학적으로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삼위일체는 성경에 언급되지는 않지만, 기독교가 발생한 곳은 다신교의 세상이었으며, 거기서는 많은 신들에 대한 믿음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한 종교 시장 안에서 기독교의 하느님과 다른 신들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는 것이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게 맡겨진 과제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는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어떤 신인가, 그리고 그 하느님이 구약성서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과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물음과 씨름해야만 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를 인간의 지성에서 발견하려 애썼다. 그의 사유에 따르면, 우리가 물체를 인식할 때, 물체의 모상이 우리의 지성에 떠오르게 되고, 이 둘 사이를 의지가 이어주게 된다. 즉 실체가 성부이고, 모상이 성자이며 의지가 성령인 것이다. 하지만 정교회에서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의지"라거나 "둘 사이의 사랑"으로 설명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일화에서, 초월자가 스스로를 복수로 지칭하는 것을 삼위일체에 대한 단서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만 창세기를 근거로 삼는 건 오늘날 신학에서 부정적인데, 천지창조 일화에서 초월자가 복수형으로 지칭된 것은, 많은 고대 언어가 많음과 위대함, 혹은 존경, 거대함 등을 명확하게 구분짓지 않고 복수형으로 쓰던 언어 습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장엄복수형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는 말에서 '우리'는 의미상으로는 '나'의 강조로 보는 것이 더 알맞다.[7] 그렇기에 성서비평학이 발달한 이후의 신학에서는, 창세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삼위일체 설명을 도출하는 것을 선호한다. 사실 애초에 교부 시대부터 삼위일체는 복음서에 기반을 두었고 창세기는 곁가지이긴 했지만.
삼위일체의 논리적 오류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A=B가 참이고, A=C가 참인데 B=C는 참이 아니라는 주장이기 때문에, 대상의 동일성 관계에 있어서 추이성을 위반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8]
'a와 b는 같은 대상이다'라고 할 때 논리학에서는 그 '같음'이라는 관계에서 추이성이 성립한다고 본다. 예시를 통해 설명하면 이러하다. 두 명제 "해리슨 포드는 한 솔로를 연기한 사람과 같다," "한 솔로를 연기한 사람은 인디아나 존스를 연기한 사람과 같다"에서 상식이 있으면 누구나 "해리슨 포드는 인디아나 존스를 연기한 사람과 같다" 라고 추리할 수 있다. 지금 이 예시가 너무 당연하고 사소해서 '뭐 이딴 걸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해?' 라는 생각이 들면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다.[9] 삼위일체는 이 간단한 생각과 어긋난다.
본문위 맨 위에 나온 이미지는 '삼위일체 방패'라 부르는 것이다. pater, filius, spritus sanctus는 각각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하며, deus는 하느님을 의미한다. est는 '같다'를, 'non est'는 '같지 않다'를 의미한다. 일단 성령을 제외하고 성부와 성자만 생각하자. 그림은 '성부는 하느님과 같다'는 것과 '하느님은 성자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해리슨 포드의 예를 생각하면 당연히 '성부와 성자는 같다'라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성부와 성자가 같지 않다'고 표시하고 있다.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성부와 하느님이 같고 하느님과 성자가 같으면 성부와 성자도 같아야 하는데, 삼위일체론에서는 성부와 성자가 같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러니 논리적인 관점 혹은 상식적인 관점에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 삼위일체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삼위일체가 성경과 일치하는 신에 대한 설명일지는 몰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에는 틀렸다'라고 하면 간단하게 전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초기 신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고 이는 여러가지 이단들로 나타났다. 동일성을 축소시켜 설명하려는 양태론, 가현설, 위격 분리를 통해 설명하려는 아리우스주의, 양자론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하였듯 기독교 신학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나 이해를 중단하였다. 삼위일체를 굳이 신비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이유다. 즉 삼위일체론은 논리적인 언어로 이해하여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악의 문제의 궁극적 이유처럼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신학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은 '성부, 성자, 성령은 그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동등한 위격을 지니고 있다.'이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삼위일체가 우리의 상식에 부합함을 보인 것도 아니고 우리의 상식이 틀린 것을 보인 것도 아니다. 이 설명은 삼위일체를 '신만이 가진 신비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학에서 이런 두루뭉술한 해결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서 해석과 우리 상식 사이의 갈등을 중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이견은 있으나 삼위일체는 성서에서 묘사하는 하느님을 가장 잘 나타내는 개념이다.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개념이 일반 상식과 충돌되지 않도록 무던히도 노력했으나,[10] 그 중에 성공한 것이 없으니 신의 신비로 넘기는 것이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 된다. 신학계 내에서는 삼위일체의 논리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학자가 여전히 있고, 일부 학자는 논리적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계 바깥에서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없다.
혹자는 '삼위일체는 세 위격이 본질에서 동일하지만 위격에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치관계의 추이성이 여기에 적용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이 타당하려면 지시에 대한 철학적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11] 동일본질 동등위격에 따르면 '성부'라는 단어는 신이라는 본질과 함께 세 위격 중 하나를 동시에 지칭해야 한다. '성부'가 지칭하는 그 본질과 그 위격이 같은 대상이라면 이행성 문제를 피할 수 없고 위격이 본질과 같은 대상이 아니라면 성부라는 위격은 신이 아니다. 존재를 속성으로 간주하여 생각한다면 설명할 수는 있다. 가령 '성부'라는 위격이 '신성'이라는 속성을 가진다는 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역시 삼위일체의 근본 정의와 어긋나는 동시에 철학적으로도 정당화가 가능하지 않다. 칸트가 논파한 이래로 존재를 속성으로 간주하는 학자는 없다.
양태론 등 반삼위일체 교리 중 일부는 이런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다. 그러나 논리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설명들은 모두 성경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아 이단으로 분류된 교단을 제외하고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2단락의 서술을 보면 '알 수 없음'으로 결론이 났다고 되어있는데 성경에서 나타난 신에 대한 묘사를 최대한 커버하는 설명을 만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성경에서 묘사하는 신은 논리적 혹은 상식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신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성경과 위배된다.
참고로 저명한 철학자인 Peter van Inwagen이 Dan Howard-Snyder과 함께 집필한 참여한 루틀리지 철학사전의 1998년도 판 역시 동일성 관계의 추이성을 삼위일체가 갖는 논리적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한다. 삼위일체에 관한 철학적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경우 참조하기 좋다. 링크 최신 버전은 유료 또는 학교 등의 기관 ID가 있어야 열람할 수 있다. 다만 해당 백과사전 항목은 이행성 문제를 해결하는 철학적 방법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행성 문제가 논리적 문제의 핵심이지만 실제로 이행성을 위배하는지는 여전히 학술적인 토론이 진행중인 사안이다.
삼위일체와 야훼라는 이름에 대해서
| 야훼란 이름의 의미에 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① ‘그분이다!’는 의미의 환호성(yah!)이라는 견해 ② ‘있다’는 의미의 동사(hyh 혹은 hwh)에서 유래한다는 견해, 즉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고 들었던 이름을 백성에게 전할 때 간접화법으로 ‘그는 곧 그다’라고 했다는 견해, ③ 모세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거절이라는 견해(소극적으로 유비적인 답변을 하신 예, 출애 33:19-23) ④ 주님의 영원성을 강조하여 ‘나는 곧 나였던 나일 것이다’(I shall be what I was)라고 번역하는 견해, ⑤ 하느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자존(自存)을 의미한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생각건대, 이 모든 설명은 하느님의 이름이 출애 3:14에서 동사 ‘있다’(qal)의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간과하는 흠이 있다. 문법적으로 야훼는 이 동사의 원인을 나타내는 형식이어서 "그는 있도록 한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렇게 존재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묘사하는 것이다. |
| 가톨릭 대사전, 야훼 항목 中 |
'야훼'라는 말이 삼위일체 중에서 '성부'에게만 해당된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기독교적 논리로 볼 때 오류이다. 성부도 야훼고 성자도 야훼고 성령도 야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대상이 야훼인데 그 하느님이 삼위일체이므로 당연히 세 위격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야훼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12]
다음 성서 구절들을 참조해보자.[13]
| And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he added ‘is what you must say to the sons of Israel: “I Am has sent me to you”.’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
| 탈출기 3,14 |
| Jesus went on: ‘You are from below; I am from above. You are of this world; I am not of this world. I have told you already: You will die in your sins. Yes,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He, you will die in your sins.’ So they said to him, ‘Who are you?’ Jesus answered: ‘What I have told you from the outset. About you I have much to say and much to condemn; but the one who sent me is truthful, and what I have learnt from him I declare to the world.’ They failed to understand that he was talking to them about the Father. So Jesus said: ‘When you have lifted up the Son of Man, the you will know that I am He and that I do nothing of myself: what the Father has taught me is what I preach; he who sent me is with me, and has not left me to myself, for I always do what pleases him’. As he was saying this, many came to believe in him.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
| 요한 8,23-30 |
| Jesus replied: ‘I tell you most solemnly, before Abraham ever was, I Am’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
| 요한 8,58 |
| ‘I Am’ or ‘I am He’ is the unique divine name revealed to Moses, Ex 3:14, cf. Is 43:25; 45:18. Jesus claims this title for himself, vv. 28,58; 13:19, a claim which is seen as blasphemous, v. 59. The same Gk phrase, ego eimi, can be used for self-identification (‘It is I’), with typical Johannine ambiguity, 6:20; 13:19; 18:5, 8. Jesus also uses it for his great claims, 6:35; 8:12; 10:7,11; 11:25; 14:6; 15:1. |
| 요한 8,24의 The CTS New Catholic Bible의 주석 |
본문과 주석에서 볼 수 있듯 영어 I Am 또는 I am He로 번역되는 표현은 야훼의 자기 표현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예수 역시도 이 표현을 본인과 직접 연결해서 말한다. '야훼'라는 표현이 성부에게만 해당한다고 성경에서 말한 적도 없기도 하거니와,[14] 이 표현을 대체하는 표현인 아도나이와 엘로힘(Elohim)도 특정 위격을 전제한 표현이 아니다. 즉 탈출기 3장의 유명한 계시 역시도, '성부가 자신의 위격에만 해당하는 이름을 계시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느님의 이름을 계시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야훼'라는 표현을 대체하는 말은 주님 혹은 하느님이며, 다음 명제는 모두 참이라고 할 수 있다.
| 1. 성부는 야훼이다. 2. 성자는 야훼이다. 3. 성자는 야훼의 아들이다. |
성경 속의 삼위일체론을 위한 근거들
"삼위일체가 성경에 나오는가?"라고 묻는다면, 정확하게는 기독교의 전승으로 내려오는 교의라고 답할 수 있다[15]. 주로 사용되는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이하의 인용들은 모두 공동번역 성서판이다):[16]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
| 마태오의 복음서 28:19-20 |
|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4-6 |
|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
|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4:4-6 |
|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3:13 |
이 구절들만이 성서비평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의학에까지 삼위일체론의 토대로 사용된다. 그 밖에 다양한 본문들이 삼위일체론의 근거로서 인용되어 왔다.
| 고대 교회에서 16세기까지 삼위일체론의 다양한 표현들이 히브리 성경 안에서 이미 계시되었다고 믿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성서비평이 시작되면서 히브리 성경에는 삼위일체의 확실한 진술을 전혀 찾을 수 없음이 정당하게 입증되었다. 대표적으로 창세기 18장 이하가 있다. 여기서 마므레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방문한 "셋"은 딱 잘라서 하느님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다양한 현현 방식들이 섞여 있다 (세 사람 = 야훼 = 야훼와 그의 두 천사). 따라서 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다양한 현현에서 삼위일체론의 증거 안으로 제한적으로만 소급될 수 있다. |
고대교회
서지
- Hauschild, W.-D., Lehrbuch der Kirchen- und Dogmengeschichte, Bd. 1, 1-51.
- 레온하르트, 로후스, 『조직신학 연구방법론』, 기독교문서선교회, 392-409.
- 판넨베르크, 볼프하르트, 『조직신학 1』, 새물결플러스, 419-452.
- 리터, 아돌프 마르틴, 『고대교회』, 한국신학연구소.
- Ritter, A. M., "Trinität" I (TRE 34).
- 역사신학연구회, 『삼위일체론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27-254.
원시적 형태의 삼위일체론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적 선포를 외쳤다. 이러한 "아버지" 하느님 이해는 히브리 성경과 제2성전기 유대교로부터 전달된 부성적인 돌봄의 표현으로서, 본래 고대 히브리 종교에서의 혼란적인 하느님의 성별 표현(호세아 11:1–4)과는 대립된 가부장적인 상이었다. 어쨌거나 예수에게 "아버지"는 고유명사로서, 선하심으로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돌봄과 함께, 그리고 하느님의 통치가 완성될 종말론과 함께 표현되었다. 따라서 예수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상호 침투적으로 일치했다. 그럼에도 예수는 엄연히 자신을 하느님과 구별했다 (마르코 10:17.; 요한 10:33; 14:28; 19:7). 예수를 통해서 아버지로서 선포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자각과 더불어, 예수 자신은 또는 첫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에게 "아들"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밖에 없었다.
|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
| —마태오의 복음서 6:26 |
예수의 부활에 대한 고백을 통해 시편 110:1에 따라 최초의 기독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주"(Kyrios)가 되도록 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 (사도행전 2장).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로마 1:4), 예언자들(잠언 8:22; 4에스라 12:33; 에녹 46:1)에 의해 예언되었던 그 "지혜", "메시아",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 이해되었다. 즉 태어나기 전부터 그는 하늘에 선재했으나, 이 땅으로 내려왔다고 이해되었다. 따라서 "주님도 한 분이시고, ... 하느님도 한 분이시니 (에페소 4:5)," 주는 하느님의 오른편에서 함께 하느님의 통치를 실현하며 선과 악을 심판하러 내려 오실 것이었다.
|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
| —사도행전 2:36 |
그후 오직 영을 통해서만 하느님과 연합할 수 있다는 교리는 바울로의 이해에 따라 영의 존재는 대단히 중요하게 되었으니, 왜냐하면 그에게 주에 대한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연결은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영과 같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영과 다르며, 영을 통해서 또 아들로 입양됨이 이루어진다. 공관복음은 모두 예수의 지위와 활동을 하느님의 영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의 활동과 승천 후에야 믿는 자들에게 영이 주어졌다고 이해했다. 따라서 요한 학파에서 영은 예수와 분명히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 ...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 —로마서 8:11,14 |
이레네우스는 말씀을 예수에, 지혜를 영에 귀속시켰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지혜와 말씀을 동일시했는데, 이러한 이해는 아테네의 아테나고라스,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오리게네스에게로 이어졌다. 따라서 창조를 비롯해 섭리의 활동에 예수와 하느님의 영이 어떻게 관여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요구되었다. 오리게네스는 성령을 창조 활동과 완전히 분리시켜 성화된 자들에 대한 베타적인 은총 가운데에서의 활동으로만 제한했다. 이들에 가서야 셋이 모두 하느님이면서 구별된다는 표현이 부각되었지만 셋이 완전히 동등하다는 표현은 아직 없었다.
| 여기서 아래의 것들을 다루는 것이 적절하게 여겨진다. "하느님으로 인해서 거듭난" 자가 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필요하며, 그 삼위가 전체적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성령이 없이는 아버지와 아들에게도 속할 수 없는가. 이것을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과 똑같이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서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는 존재하는 모든 개별체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으로부터 존재를 주면서 손을 뻗는다. 단지 이성적 존재들에게만 관계하는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 다음으로 두 번째 지위를 갖기에) 아들[의 영역]은 아버지의 것보다 작다; 성령의 영역은 더욱 작아서, 그는 겨우 성도들에게만 다가간다. 따라서 아버지의 권세는 아들과 성령의 것보다 크며, 아들의 권세는 성령의 권세보다 크고, 이것은 다시금 성령의 권세는 다른 거룩한 존재들[곧 천사들]을 훨씬 능가한다 ... |
| —오리게네스, 『원리론』 I, 3:5.[17] |
4세기 삼위일체론 논쟁
삼위일체 논쟁의 신학적 문제의 근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가 신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듯한 부분과 구분된다고 말하는 듯한 부분이 둘 다 있으며, 심지어 요한 복음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동시에 나타난다:
|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
| 요한의 복음서 1장 1절, (공동번역 성서) |
그런데 동일한 요한 복음에서, 마치 의도적이라는 듯이 "함께 계셨"다와 "똑같은 분이셨다"가 같이 나오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가? 또한 필립비서 2장 5-7절을 보자:
|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여러분은 서로 이 생각,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을 품으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억지를 쓰지 않으셨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시는 것에. 오히려 자신을 비우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네. 사람의 모양을 띠고 태어나시니, 생김새로 볼 때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셨네. |
| -대한성서공회 『새한글 성경』 |
이 구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신의 '모습(μορφή)'[18]을 지녔으나 종의 '모습(μορφή)'을 취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신과 어떤 관계인가? 결국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쟁은 이러한 구절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냐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밀라노 칙령 이전의 기독교는 아마도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았던 종교로 추측되고, 따라서 신학적 논쟁은 공권력과는 무관한 행위였다. 반면 칙령 이후의 기독교는 국가의 승인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을 둘 다 가진 종교가 되었다.[19] 이렇게 되자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기독교 내부의 신학적 논쟁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동시에 국가의 권위가 교회 회의에 일종의 '공인 마크'를 찍어줄 수도 있게 되었다. 이 '공인 마크'가 찍힌 시노드가[20] 제국의 분열을 박기 위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노력은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과도 관련이 된다. 기독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런 세력을 탄압할 바에는 동맹을 맺어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것이 이득이다. 기독교의 분열상은 이 정치적 목적에 방해가 되었기에 콘스탄티누스에게는 기독교를 통합할 이유가 충분했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정통교리로 인정받게 된다.[21] 이후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한 일련의 세계 공의회[22]들이고, 삼위일체론 및 그리스도론의 주요한 결론들은 여기에서 합의되었다.
양태론
일부 사람들은 유일신론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삼신론을 배격하기 위해 양태론(독일어: Modalismus; 영어: Modalism)을 피력했다. 양태론에서 그리스도와 영은 아버지 하느님과 구별되지 않고, 단지 다른 현현 방식이었다. 따라서 양태론에서 아버지 하느님은 고난 받았기 때문에 성부수난설(독일어: Patripassianismus; 영어: Patripassionism)과, 그리스도는 진짜 인간이 아니라 가상의 몸을 입었다는 가현설(독일어: Doketismus; 영어: Docetism)이 도출되었다.[23]
| 노에투스(Noëtus) 추종자들은 ... 이렇게 가르친다: 한 분이신 동일하신 하느님은 만물의 조성자요 아버지이다;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그는 과거의 의로운 자들에게 자신의 불가시성을 고려하지 않고 나타나셨다; 곧 그가 자신을 보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그는 불가시적이다; 하지만 보게 하시면, 볼 수 있는 분이다. 그가 파악할 수 없도록 하시면 그는 파악이 불가능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가 원하시면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그는 동일한 근거에서 극복할 수 없으며, 극복할 수 있고, 생겨나지 않으며 [생겨나고], 불멸하시며 동시에 사멸하는 분이시다. ... 그[노에투스]도 주장하기를 한 분 동일하신 아들과 아버지라고 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졌다. ... [이 땅에] 나타나시고,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고 사람 가운데 사람으로 거하셨던 이 한 분은 그를 볼 수 있게 허락된 자들에게 출생 때문에 아들로 알려주었다; 하지만 이것을 파악할 수 있는 자들에게 출생 때문에 아들로 알려주었다; 하지만 이것을 파악할 수 있는 자들 앞에서 그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고통에 찬 [십자가의] 나무에 달리시고 자기 영혼을 스스로 넘겨주신, 죽으시지만 죽지 않으시는 분이 스스로 무덤에 안장되시고, 창에 찔리고 못에 박히신 그가 스스로 제 삼일에 깨어나셨다. 그분에 대해서 그들은 그가 바로 만물의 하느님이라고 말하며 ... |
| —로마의 히폴리투스, 『이단 논박』 VII, 9:10.[24] |
그러나 (원)정통파 신학자들은 초월적인 하느님은 고난 받으실 수 없으나, 반면에 그리스도는 실제 사람이 되어 고난 받으셨다는 믿음으로 인해 양태론을 거부했다.
| ... 사벨리우스(Sabellius)가 불경스럽게도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분]이시며 성부도 또한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거룩한 일자['단일성']는 서로 다르며 각각 완전히 구분된 세 실체들로 나누면서, 말하자면 삼신을 선포한다. 하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만물의 하느님과 하느님의 로고스는 하나여야 하며, 성령은 하느님 안에서 안식하며 거하여야 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삼위['셋 됨']는 하나, 곧 만물의 하느님이며, 전능하신 분 안에 마치 하나의 정점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서로를 포함하고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 하지만 세 하느님은 구약도 신약도 가르치지 않는다. 당연히 이와 똑같이 아들을 피조물['만들어진 자']로 여기며 그분이 실제로 만들어진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하느님의 가르침은 그에게 출생을 마땅하고 걸맞은 범주라고 인정하고 있다. ... 말하자면 성자가 생겨났다면, 그는 언젠가 없었다. 하지만 그분 스스로 말했듯이 그가 "아버지 안에" 계시며, 그가 그리스도이시고, 로고스요, "지혜"요 "능력"이라면 그는 항상 계셨던 것이다. ... 하지만 이것들이 하느님의 능력들이다! ... 그러니까 신적인 일자를 세 신성으로 나누어도 안 되며 주님의 높으심과 넘치는 위대함이 한 피조물[의 개입]을 통해서 침해받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신 분과 그리스도 예수 그의 아들과 성령을 믿어야 하는데—만물의 하느님과 로고스가 하나로 된 것을 믿어야 한다 ... 왜냐하면 이렇게 하여야만 신적인 삼위[개념과]와 [하느님의] 거룩한 단독 통치하심의 가르침이 견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
| —교황 디오니시오, in: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들』 26:2-7.[25] |
동력설
동력설(독일어: Dynamismus; 영어: Dynamism)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유일신론을 고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별과 그의 인성을 받아들이기 위해 아들의 신성을 제한했다. 동력설에서는 인간 예수가 성령을 받아 신적 능력을 얻었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간이었으나 하느님에 의해 양자로 입양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결론을 얻었으며, 이것을 양자설(독일어: Adoptianismus; 영어: Adoptianism)이라고 부른다.[26]
| 비잔티움에서 온 테오도투스(Theodotus)라는 사람은 ...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 그분은 아래 방식으로 나타나셨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하나의 사람이며, 곧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동정녀로부터 출생하셨고, 다른 사람들처럼 사셨으며, 특별히 하느님을 경외하였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나서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입으셨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비둘기 모습 가운데서 위로부터 내려왔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능력은 성령이 그에게 내려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그 안에서 역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성령]을 그는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들[테오도투스주의자들]은 그분[자신]을 성령이 내려올 때 하느님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자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이후[에는 가능하다고 하였다]. |
| —로마의 히폴리투스, 이단 논박 VII, 35:1f.[27] |
그러나 동력설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히브리성경의 예언자들이나 성령 부음 받은 기독교인들과 구별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안티오키아와 니케아 공의회들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로고스 그리스도론
로고스 그리스도론(독일어: Logos-Christologie; 영어: Logos Christology)의 지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에게서 유래되었고, 그와 결합되어 있으며,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하느님 자신과 구별될 수 있는) 말씀으로 현존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입장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면서 하느님의 유일성을 견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3세기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입장은 로고스가 그 근원에 후속적인 지위를 갖는다는 종속론(독일어: Subordinatianismus; 영어: Subordinationism)으로 기울어졌다.[28]
| 하느님께서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간은 ... 없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그가 로고스, "지혜"와 "능력"이기에 항상 존재하였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들의 원천은 결코 아니었다 ... 하지만 아들은 자기 존재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가진다. ... 우리가 일컫는 이름들[성부, 성자, 성령] 중 각각의 이름은 그 이름과 이웃해 있는 이름하고 나눌 수 없고 떨어뜨릴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말한다면, 내가 [드러내놓고] 아들을 개입시키기 전에 [이미] 아들을 아버지 안에 함께 표현한 것이다 ...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됨을 나누지는 않으면서 셋으로 확장시키고 또 그 반대로 셋을 하나로 축소시키지 않으면서 하나됨으로 모으고 있다. ... 사람들은 이것을[곧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생겨나고 만들어진 것들의 영역에서 온 어떤 일들에서 분명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즉석에서 사실 나의 의도에 완전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 하나의 예를 들었다. 곧 식물들은 그것을 가꾸는 자들과 동일하지 않고, 배가 또한 배 만드는 자와 같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더 장황하게 목적에 더 잘 맞는 사례들을 다루었으며, 더 맞아 떨어지는 것[비유]들을 더욱 자세하게 다루었다. 곧 내가 당신[분명히 로마의 디오니시오를 말한다]에게 다른 편지에서도 그렇지 않다고 제시했던 여러 보탬이 되는 증거들을 찾아내었다; 이 편지에서 나는 사람들이 마치 내가 그리스도는 하느님(아버지)과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부인[또는: 침묵]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비난이 틀렸다고 반박하였다. 이 개념은 성경 어디에도 없고 찾을 수 없다고도 주장한다면, 사람들이 무시하려고 작정하였던 내가 그 후에 했던 말들은 절대로 이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 곧 나는 실례로 사람들의 출생관계를 들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분명히 종족의 동일성의 관계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바로]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이 한 가지에서만 자기 자식들과 다르다고 나는 말했다 ... 하나의 씨앗이나 한 뿌리에서 나온 식물이 자기들이 뚫고 나온 그것과는 다르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 식물은 그 뿌리하고 완전한 본성의 동등성 가운데 있다. ... |
| —알렉산드리아의 교황 디오니시우스, in: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디오니시우스의 의도 15-18.[29] |
아들이 아버지에 종속적인지, 아니면 둘이 동등한지의 문제는 다음의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 논쟁에서 해결되어 로고스 그리스도론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서기 3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니케아에 300여 명 정도의 주교가 모여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이들은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교회 사람들이었으나 서방 교회의 대표들도 있었다. 이 중에는 불과 몇년 전만 해도 투옥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유배되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초대로 모인 이들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교회의 보편성을 증언하는 사건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니케아 신경의 모체
|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곧 아버지의 신적 본체에서 나셨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빛에서 나신 빛이시며,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창조되지 않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한 본체로써 같으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생겨났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셋째 날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또는 비존재에서 생겨났다거나, 다른 히포스타시스(Hypostasis, 본체) 또는 우시아(ousia, 본질)에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되었으며, 변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편교회는 저주한다. |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에 의해 채택된 신경은 성자 혹은 말씀(로고스)이 피조물이거나 신성이 성부보다 떨어진다는 개념을 배격하는 데 큰 관심이 있었다.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전달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 후 니케아 신경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되는데, 이 구절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별을 부인함으로써 “성부수난설”을 시사하는 듯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그들이 합의한 신경에 의해 아리우스 논쟁이 끝나기를 바라며 서명했다. 이 회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직분을 박탈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이에 더하여 면직된 주교들을 그들의 도시에서 추방했다. 교리의 정통성 여부 문제에 관하여 세속 권력이 개입한 이 전례는 후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주교들의 소망과는 달리 니케아의 공의회가 아리우스 논쟁을 종식시키지는 못했고 그 뒤로 세속 권력과 정치 세력이 교회 문제에 꾸준히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의 완성: 카파도키아 신학자들
카파도키아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고대 지명으로, 그 지역에 살았던 “대(大) 바실레이우스” 라고 알려진 신학자 카이사레이아의 성 대(大) 바실레이오스와 그의 동생이며 신비적 관상에 관한 저술로 유명한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스, 그리고 이들의 친구인 시인이자 웅변가이며 그리스어권의 교회의 전통적 찬가를 작곡한 나지안조스의 성 그레고리오스가 대표적인 카파도키아 신학자들로 알려져 있다.
카파도키아 학파는 성부와 성자, 성자와 성령, 성령과 성부의 관계를 분석함과 동시에 그 관계 속에서의 성령의 본질 확증으로 집중되는 관계 분석의 필연적 작업으로 수사학적인 연구를 하였다.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체임이 고백된 니케아 공의회 이후, 성령도 동일본질인가, 아니면 유사본질인가라는 문제가 제기 되었는데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학파가 대표적으로 마케도니아 학파였다. 마케도니아 학파는 성령의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고 성령을 에너지나 도덕적 감화력으로 이해하는 ‘성령 유사본질론자’들이었다. 이에 대 바실레이오스는 수사학적 연구를 통하여 삼위의 관계를 밝히고 성령의 위치를 확신하며, 전치사들이 두 위격끼리 각각 관계를 가짐으로써, 동등한 하느님으로서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동등한 영광을 받으심이 밝혀진다고 주장한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를 가지고 바실레이오스는 만물이 성부로부터 창조되었기에 성부는 창조의 원인임을, 성자를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기에 성자는 창조의 대행자로 말한다. 또한 마케도니아 학파가 성부에게만 고정시킨 ‘그로부터’라는 어휘가 성자에게도 적용이 되며 ‘그를 통하여’가 성자에만 적용되는 어휘가 아니라 성부, 성령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바실레이오스는 성서에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라는 표현과는 거꾸로 ‘성부를 통하여, 성자로부터’라는 표현도 있음을 말하며 ‘그를 통하여’도 성부께 적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30] 이는 성서 저자의 저술의 목적은 본성의 다양성이 아니라 혼동되지 않는 성부와 성자의 위격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 주장한다. 나아가 바실레이오스는 로마서 11장 36절[31]을 해석하면서 성부의 뜻에 따라 만물이 성자로부터 나오는 것은 그들의 존재의 원인이고 그를 통하여 만물이 유지되고 조성되기에 성부가 최고의 원인이며, 성자가 존재의 원인이라는 해석은 같은 내용의 두 표현일 뿐 결국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동일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통하여’라는 전치사가 종속을 나타내거나 낮은 계급을 표현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며 성서에 나오는 ‘오른편에 앉으셨도다.’ 와 같은 표현은 모두 동등한 의미라고 해석한다.[32]
성자와 성령의 관계
바실레이오스는 계시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수단과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수단과 장소라는 구분 지음으로써 본성 자체를 구분을 짓는 것을 거부하고 위격의 차이를 말한다. 나아가 창조라는 계시 행위 가운데 세 분이 함께 일하시되 그 계시 양태의 차이를 설명한다.
마케도니아 학파는 ‘그 안에서’를 성령에게만 국한된 용어로 생각하여 장소라는 의미로 보는데 반하여 바실레이오스는 성자에게도 사용되고 있음을 주장한다.[33]
나아가 ‘그를 통하여’ 또한 성령께 적용됨을 주장한다.[34]
성령과 성부의 관계
마케도니아 학파는 ‘그로부터’를 성부에게, ‘그 안에서’를 성령에게 고정시켜 삼위를 설명하지만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전부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성부로부터 만물이 생성되기 때문에 그는 제1 원인이시며, 성령 안에서 신자의 성화 및 완전이 가능케 되어 인간이 신과 같이 되기 때문에 그는 창조의 완성자라고 해석한다. 이는 위격의 차이일 뿐 본성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는 해석과 동일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가 성부에게도 사용될 때가 많음을 주장하며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3장 9절[35]을 통하여 성부 안에는 계시가 숨겨져 있고 그것이 성령과 성자를 통하여 나타난다고 말한다. 반대로 성령께도 ‘그로부터’가 사용[36]됨을 주장한다.
결론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세 표현(-로부터, -통하여, -안에서)이 성부, 성자, 성령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 인간에게 자기를 계시 하실 때, 하느님의 신성이 드러나고 하느님이 하느님 됨을 보여주며,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계시의 주체요, 같은 본질임이 밝혀진다. 다시 말해 세 분 모두는 동일본체이며 세 분 모두 동일한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셨고 동일한 구원의 뜻을 가지고 일하심을 증명하며, 본질과 능력의 다양성이 없고 하나임을 밝히며, 나아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신다. 성부가 창조와 역사 섭리의 근원이신 주체자라면, 성자는 창조와 역사 섭리의 대행자시요, 성령은 완성자라는 것이 카파도키아 학파의 결론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카파도키아 학파의 삼위일체론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정죄를 당한 마케도니아 학파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하여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1.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본체라는 신앙고백의 성립 2. 성부, 성자, 성령은 동등위격으로 존재, 어떤 위치로의 종속적인 개념x 3. 샘의 근원이 있듯이 근원이 성부 4. 성부는 창조주, 성자는 구세주, 성령은 성화주로 기능이 분화 5. 성자는 성부와 성자와 같은 참하느님이면서, 우리들과 같은 참인간[37] 6.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완덕으로 나아가게 한다 |
이단적 사상
예수는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존재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예수는 자신과 '하느님 아버지'가 특별한 관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는데[38], 문제는 이런 논쟁이 그리스 철학 때문에 벌어진 거지 예수 본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예수는 그냥 아버지라고만 말했는데, 당연히 예수가 존재론적으로 아버지를 규정하지는 않았다. 복음서 내에서도 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너희들도 나처럼 하면 아버지의 자녀들이 된다"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으며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플라톤마냥 치밀하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는 예수가 학자형이 아니라 예언자형 인물, 즉 엄밀한 주장과 논리에 의거하여 사람을 설득하지 않고 카리스마와 직관력으로 세상에 대해 경고하는 인물상이었기 때문이다. 예언자형 인물은 좋게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예언자가 될 수 있지만, 나쁘게는 허황된 말로 사람을 혹세무민하게 될 수도 있다. 기독교도 유대교에서 나온 만큼 유일신을 주장하는데, 세례를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등 유대교로서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일을 해 왔다.
당연히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존재론적인 문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그리스 세계로 전파되면서 그리스 철학에 익숙한 인간들이 "그럼 예수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처럼 신의 아들인가?" "예수도 신이면 기독교는 유일신교가 아니라 다신교 아닌가?" 하면서 의문을 제기하자 곤란해진 것. 자연히 기독교 내부에서 도대체 유일신 사상과 예수가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가 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몇 가지 이론이 나왔다.
- 예수를 예언자로 정의한 경우: 예수 사후 극초창기 에비온파의 사상이다. 예수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유대교와 사실상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어느 파와도 손을 잡지 못하고 맥이 끊겼다. 이슬람이 이렇게 설명하며, 유대교 중 예수에게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 이렇게 이해하기도 한다. '양자론'이라 불리는 설에서는 예수는 원래 그냥 인간인데 처음으로 성령을 통하여 양자가 된 경우로 주장하기도 한다.
- 예수를 성부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경우 (성부수난설, 양태론)
- 예수를 신의 특별한 창조물로 생각한 경우: 대체로 아리우스파와 영지주의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미카엘 대천사가 예수로 나타났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2세기 초와 현대 여호와의 증인까지 있었다. 요한의 복음서의 로고스 그리스도론도 얼핏 보면 이런 입장인 듯하지만, 요한의 복음서는 "로고스는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하느님이다"라는 모순적인 말로 로고스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이단으로 정죄된 사상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자면,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간략하게 흔히 착각하는 것 위주로 서술한다.
-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하는 삼위일체론
앞에서 말했듯이 표현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위격과 사람의 인격이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삼위일체를 설명할때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방식이다. 참고로 예수 그리스도는 1개의 위격(Hypostasis) 안에 2개의 본성인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
- 양태론
삼위일체론과 가장 많이 헷갈려하는 이론.
”성부=성자=성령”을 주장한다. 그냥 한 하느님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흔히 삼위일체를 쉽게 설명하려고 하나의 H2O가 물이기도 얼음이기도 수증기이기도 한다고 설명하거나 한 남자가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고, 자녀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회사에서는 사장이 된다는 식의 설명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설명들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널리 쓰이지만 잘못 이해할 경우 성부=성자=성령으로 오해할 수 있다.[39]
- 신명론 관련 일부 주장
양태론의 확장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양태론 중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섞어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양태론 안에 있기에 특별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 이를테면 성부 하느님의 이름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야훼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야훼'는 엄밀히 말해서 어떤 특정한 신의 이름(이를테면 제우스나 오딘 같은 이름)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을 표현하는 어휘이기 때문. 이 부분은 베네딕토 16세의 저서인 <나자렛 예수>의 다음 인용문을 참조해보자.
| 당시에는 많은 신이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다. 실제로 하느님은 다른 신들과 비교해 특별한 권위를 지닌 분으로 당신의 신분을 밝히신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관념은 일차적으로 다신교를 믿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관념이다. 그러니 이런 세계에서는 모세의 하느님도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은 여느 신이 아니고 진짜 하느님이시다. 본래 참된 의미의 하느님이란 여럿일 수 없다. 하느님은 본질상 한 분 뿐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은 신들의 세계에 있는 신들 중 하나로 등장하실 수 없다. 그분의 이름이 다른 신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 주시는 응답은 모세의 물음에 거절하는 답이기도 하고 그 물음에 응하는 답이기도 하다. 그분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나는 있는 나다."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분은 단순히 '있는 분'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이 당신의 신원을 몸소 밝혀주신 이름, 곧 '야훼(YHWH)'라는 이름을 소리 내서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것은 그분의 이 이름을 다른 신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성경을 새로 번역하면서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나 신비에 차 있고 함부로 발음해서는 안 되었던 이 이름을 여느 이름처럼 적어놓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그분의 신비를 일반적인 종교사의 평범한 사례로 끌어내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하느님께는 그분을 그려 보일 수 있는 어떤 그림도, 그분을 부를 수 있는 어떤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
| -교황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국역본 1권 221~222p에서 |
- 역동적 군주신론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질인 것을 부인한다.
비록 성자가 하느님도 맞고, 인간도 맞다는 것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와 동일하다. 그러나, 예수는 본질적으로 원래 인간이었고 후에 하느님의 양자가 되어 신이 되었다고 바라본다. 그렇기에 성자와 성령이 동일본질이라고 보지 않고, 성자가 성부에 비해서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고 바라본다. 이런 점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삼위일체론과 비슷하다.
- 형태론적 군주신론
성부수난설 또는 가현설이라고도 한다. 예수를 하느님의 현현으로 보는 것이다. 즉, 예수라는 개체는 실존하지 않고, 성부가 현현하였다는 보는 것이다. 다만 성부가 실제로 현현했다고 가정하지 않고 다만 '성부도 고통을 안다'는 형태의 주장은 신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특히 위르겐 몰트만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원제: Der gekreuzigte Gott) 이후로 신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몰트만은 예수를 하느님의 현현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의 불변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성부의 수난을 논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였다. 주로 소외계층 등 Minority, SJW 이슈와 관련된 신학분야에서 몰트만의 이론을 반긴다.
비삼위일체파
삼위일체론이 기독교의 근간을 이룬다거나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여기는 교파도 있고, 아예 완강히 부인하는 교파도 있다.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비성경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으며, 가톨릭과의 차별성을 더욱 강조하고 가톨릭의 유산을 탈피하다가 발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오늘날의 기독교는 삼위일체론을 지지하는 단체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 때문에, 보통 삼위일체론을 무시하는 교파의 경우에는 이단은 물론이고 아예 그리스도교로도 취급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주로 하느님은 삼위가 아닌 단일한 인격체이며, 예수는 별개의 창조물이고 성령 역시 별개의 인격체가 아닌 하느님의 활동력이라고 주장한다거나 아니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1세대 반삼위일체 교파는 아리우스파로 여겨진다. 한편 삼위일체설을 고집한 아타나시우스가 반삼위일체를 주장하던 아리우스를 이기고 삼위일체 교리를 공식화하면서 현대까지 기독교 전통이 계승되는 상당수의 교파들은 삼위일체론을 지지한다. 즉, 삼위일체를 지지하지 않는 교파는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인 셈.
오늘날 현존하는 대표적인 반삼위일체 교파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19세기 이후 등장한 교파들이며 그들 스스로는 니케아 공의회 이전 사도들의 교회를 회복한다고 주장하여 '회복주의'(Restorationism)로 분류한다.(단 모든 회복주의 교단이 비삼위일체파인 것은 아니므로 주의.)[40] 연원을 따지면 개신교에서 파생됐으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바 개신교와는 별개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 여호와의 증인[41]
- 참예수교회
- 유니테리언 - 단, 현대 유니테리언 교파는 이름과 달리 종교다원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 단일오순절교 - 정식으로 양태론 교리를 채택한 교단들 중 하나이다.
- 그리스도아델피안
- 세계복음화전도협회[42]
-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모르몬교)[43]
더 심한 경우는 삼위일체에 자기들의 교주를 재림예수나 그에 준하는 존재로 등극시킨 결과, 자연스럽게 기존 삼위일체론을 따르지 않는 신생 사이비 종교들도 있다. 해당 교주들은 기존 기독교 교리에 편승하여 1~2세대에 걸친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종교적 권위를 가진 뒤 혹세무민을 일삼기 일쑤였다.
인용문
기타
삼위일체의 상징과 회화
요한의 콤마
주요 문헌
- Volker Henning DRECOLL (Hg.): Trinität (독일어), 2011 (Themen der Theologie 2). ISBN: 9783825234324. eISBN: 9783838534329.
- Wilfried HÄRLE: 10. "Die Dreieinigkeit Gottes (trinitätslehre)", Dogmatik (독일어), Berlin/Boston 62022, 341-366. ISBN: 9783110777734. eISBN (PDF): 9783110777888. eISBN (EPUB): 9783110777956. 영어 번역: 11."The Triune Essence of God (Doctrine of the Trinity)", Outline of Christian Doctrine: An Evangelical Dogmatics, trans. Nicholas Sagovsky and Ruth Yule, ed. N. Sagovsky, Michigan/Cambridge 2015, 322-344. ISBN: 9780802848420.
- 로후스 레온하르트, § 7. "신론 II: 삼위일체 하나님",《조직신학 연구방법론》역: 장경노, 서울 22022, 387-420쪽. ISBN: 9788934117650. 원문: Rochus LEONHARDT:Grundinformation Dogmatik (독일어). Ein Lehr- und Arbeitsbuch für das Studium der Theologie, Göttingen 52022. ISBN: 9783825254773.
- Sabine PEMSEL-MAIER: "Dreifaltigkeit/Trinität" (독일어), In: M. BAUKS, K. KOENEN, S. ALKIER (Hrsg.): Das wissenschaftliche Bibellexikon im Internet (WiBiLex), Stuttgart 2016. http://bibelwissenschaft.de/stichwort/100168/
- Klaus von STOSCH: Trinität (독일어), Stuttgart 2017 (Grundwissen Theologie). ISBN: 9783825248550. eISBN: 9783838548555.
각주
- ↑ 보통 줄여서 Trinity라고 알려져 있다.
- ↑ 하느님의 본질이 아닌 것을 부정하여 남은 것만을 인정하는 형태. 삼위일체론도 아리우스주의나 성부수난설 등의 이단설을 부정해 결론을 내린 형태이다.
- ↑ 서로를 자신 외에 지상에 있는 유일한 정통 교파로 여기는 두 교파인 가톨릭과 정교회에선 개신교 자체는 근세 초에 갑툭튀한 이단 교파로 규정하지만, 최소한 개신교 내의 전체 분파들이 주류적으로 표방하는 삼위일체 신(神)론에 한정해선 가톨릭과 정교회의 정통 교리를 그대로 수용했단 사실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다. 또한 가톨릭이든, 정교회이든,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계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간에 초기 교회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종파들은 모두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곧 한 하느님 실체의 세 페르소나는 공유한다. 이들의 차이는 그리스도론의 구체적인 해석에서 나왔다.
- ↑ 둘 다 정통 교리에서는 이단적 사상이라고 본다.
- ↑ 즉 예수 그리스도가 초월자가 다른 모습을 취해서 나타나는 화신(아바타)이라 생각한다면.
- ↑ 서방교회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현한다.
- ↑ 이같이 복수형 표현으로 단수형을 높이는 표현은 현대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교황들도 공식 석상에서 자신을 '우리'라고 지칭했다. 또한, 유럽의 여러 언어들에서 T-V구분이라 하여 2인칭에는 지금도 남아있는데,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는 '당신'이라는 경어로써 너(ты)의 복수형인 너희(вы)를 쓴다. 영어가 2인칭 단수와 복수가 같은 것도 2인칭 복수였던 you를 높임말로 쓰다가 예삿말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원래 단수였던 thou는 두에-랭스 성경이나 킹 제임스 성경 같은 옛 문체를 쓰는 영어 성서에서 볼 수 있다.
- ↑ 동치관계를 참조해보자. 다만 해당 문서는 동치관계의 전반을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사용하는 것은 대상의 동일성 관계이다.
- ↑ 다만 '같다'라는 표현이 중의적이라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가령 기종이 같은 두 스마트폰이 있을 때 '이 두 스마트폰은 같다'라고 하는 것은 그 두 스마트폰이 같은 종류 혹은 모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그 두 스마트폰이 하나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같다'라는 말은 마치 " '아이유'와 '이지은'은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라고 할 때 바로 그 '같다'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경우는 '아이유'라는 말과 '이지은'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같다.
- ↑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사랑이 있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받는 사람, 사랑 그 자체. 이 셋은 서로 다르지만 사랑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 ↑ '아이유'라는 단어가 특정한 한 사람을 지칭하듯이, '성부'라는 단어도 특정한 신을 지칭한다.
- ↑ 다만 성부만 야훼고 예수를 야훼와 완전히 다른 존재로만 구분짓는 게 틀린 거지 성부를 야훼로 지칭하는 것 자체는 틀렸다고 보기에 어폐가 있다. 야훼를 다르게 지칭하는 표현이 '주(Dominus)' 혹은 '하느님'인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성부의 아들임을 표현할 때 흔히 '하느님의 외아들'이라고 한다. 여기서 하느님은 편의상 성부를 지칭함이 당연하다.(하느님 앞에 성부를 생략했다고 보면 된다.) 성부 역시 하느님의 한 위격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성부라는 위격을 하느님이나 주님이라고 지칭하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애초에 야훼는 존재론적 표현이지 호칭을 위해 만들어진 표현이 아니므로 호칭 문제는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도 않다. 각 위격에게만 해당되는 호칭을 다른 위격에게 사용한다든가 하지만 않으면 된다.
- ↑ 인용한 국역 성서와 영어 성서는 각각 『성경』(가톨릭, 2005년판)과 『The CTS New Catholic Bible』(영국 가톨릭 성경)이다. I Am과 I am He의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이 역본들을 인용했다. 또한 영어 성서에서 I Am과 I am He를 대문자로 강조한 것도 그대로 인용했다.
- ↑ 구약 시대에는 삼위일체론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신약에서는 '야훼'라는 표현을 직접 쓰지 않았다.
- ↑ 성경에 대한 이해와 사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 ↑ 레온하르트, 로후스: 조직신학 연구 방법론⁴, 함부르크 2009, 389-391 (역. 장경노, ²서울 2022, CLC).
- ↑ 리터, 고대교회, 193(para. 20-)f.
- ↑ 공동번역과 개역개정에는 각각 '본질'과 '본체'로 의역되었다.
- ↑ 역사적 연구에서는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심을 진심이라고 본다. 자세한 건 콘스탄티누스 1세 문서 참고.
- ↑ (라틴어)Synodus. 교회회의를 뜻한다. 후술할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한 전세계적 교회회의부터 지역의 다양한 교회회의들까지 모두 포괄하는 용어다.
- ↑ 다만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받은 아리우스파의 교리도 상당기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 ↑ 더 깊이 있게 들어가자면 "이러이러한 제도를 만들자"하면서 세계 공의회 제도가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라, 특정한 몇몇 시노드들이 (마치 성경의 정경이 합의되듯이) 높은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동의되어 가면서 오늘날의 '세계 공의회' 인식이 출현했다.
- ↑ 레온하르트, 조직신학, 393-394.
- ↑ 리터, 고대교회, 154.
- ↑ 리터, 고대교회, 240-241.
- ↑ 레온하르트, 조직신학, 394.
- ↑ 리터, 고대교회, 153.
- ↑ 레온하르트, 조직신학, 395.
- ↑ 리터, 고대교회, 241f.
- ↑ 아담이 아내 하와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외쳤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창세 4:1),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풀어줄 사람이 없소." 요셉은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자기에게 이야기 해달라고 청하였다(창세 40:8 공동번역),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1고린 1:9)
- ↑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로마 11:36)
- ↑ 야훼께서 내 주님께 선언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시편 110:1)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신성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 1:3)
- ↑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1코린 1:30), 나 바울로와 실바노와 티모테오는 아버지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살로니카 교회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깃들기를 빕니다.(1테살 1:1),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요한 4:13).
- ↑ 또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그대가 맡은 훌륭한 보화를 잘 간직하시오.(2티모 1:14),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을,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습니다(1코린 12:8-10).
- ↑ 또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과거에 감추고 계시던 심오한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려주게 하셨습니다. (에페 3:9).
- ↑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갈라 6:8),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1요한 3:24),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 ↑ 50% 신+50% 인간이 아니라, 100% 신인 동시에 100% 인간
- ↑ 비단 존재론적 부분 뿐만 아니라, 법에 대해서도 비유만 해주었지 구체적으로 법문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다만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란 조건이 갖추어져야 완성되는 것이니 당연하다 쳐도... 사도 성 바울로의 서신들에서 뭔가 비밀스러운 게 있는 듯한 느낌을 계속 주지만 마지막 서신에서까지 그 내용은 없다. 즉, 신약의 서신들도 구체적인 설명은 안 해준다. 그리고 하필 비밀이란 언급을 하기 때문에 온갖 논쟁이 나는 것은 물론, 온갖 사이비와 이단들이 양산되어왔다. 신약을 읽어보면 분명 레위기에 적힌 그 법을 대신하여 새롭게, 하지만 그 이전의 모든 것이 폐해지지 않는, 법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대관절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은 결국 없다. 이것은 복음서들의 차이와 함께 기독교계에 기나긴 난제로 남아있다. 이로 인해 양산된 엄청난 물량의 사이비 이단은 덤.
- ↑ 잘못된 비유인 것은 아니다. 다만 비유는 어디까지나 쉽게 이해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므로, 엄밀히 이해하고 싶다면 페르소나와 실체 등의 개념과 연결해야 한다.
- ↑ 한국에서 정식 개신교 교단으로 인정되는 그리스도의 교회만 해도 회복주의를 주장했지만 엄연히 삼위일체를 인정했다.
- ↑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이 최초로 창조한 영적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똑같지는 않지만 예수를 피조물로 보는 측면에서 아리우스파의 주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 ↑ 양태론적 삼위일체를 주장한다.
- ↑ 삼위일체가 아닌 삼위삼체를 주장한다. 하느님 아버지, 구약의 여호와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신이 모두 하느님이다. 세 하느님 모두 완전히 같은 목적과 의지로 행동하기에 하나의 하느님이라고 주장한다. 비종교인이라면 딱히 구분이 안될 수 있지만, 상기 삼위일체론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