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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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KOREA
대고려
공식문서
※ 본 문서는 황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공식 기록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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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MPERIAL FEDERATION OF
GREAT KOREA

대고려연합황국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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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 ]
대몽항쟁
여몽전쟁
여몽전쟁.jpeg
기간
단기 3564년 (고종 황제 18년) ~ 단기 3603년 (원종 황제 11년)
장소
한반도 전역, 만주 평원, 요동 및 발해 고토
원인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 및 몽골 제국의 유라시아 팽창
교전 국가 및 세력
대고려군 몽골군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대고려연합황국
원나라국기.webp 몽골 제국
지휘관
[ 목록 보기 ]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고종 황제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원종 황제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최우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최항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최의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김준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박서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김윤후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송문주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이현비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대위해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고원경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신현보
대고려연합황국기5.png 궁선남

[ 목록 보기 ]

원나라국기.webp 오고타이 칸
원나라국기.webp 구유크 칸
원나라국기.webp 몽케 칸
원나라국기.webp 쿠빌라이 칸
원나라국기.webp 살리타이 (撒禮塔)
원나라국기.webp 탕구 (唐古)
원나라국기.webp 아모간 (阿母侃)
원나라국기.webp 자랄타이 (車羅大)
원나라국기.webp 은주 (忻都)

피해 및 사상자
피해 국토 전역 수탈 및 발해 성곽 일부 파괴 사상자 수십만 명 기병 전사 및 한반도 내륙 진격 저지
결과
강도 천도 및 장기 항전 후 전격 화친 체결
영향
개경 환도 및 세조구제(世祖舊制) 확립
발해 황국 몽골에 합병
태봉 몽골의 제후국화

개요

여몽 전쟁은 대고려연합황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한 세계 제국 몽골의 침략에 맞서 단기 3564년부터 단기 3603년까지 무려 40년에 걸쳐 전개한 호국의 장기 항전 전역이도다. 유라시아를 사로잡은 몽골의 철기병들이 황국의 북방 국경을 침탈하자, 개경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해전의 이점을 극대화하였고, 만주와 발해 고토를 영도하던 발해 방면군과 태봉 자치령군은 독자적인 성곽 수성 전술로 대륙의 군세를 후방에서 교란하였도다. 총 1차에서 9차에 이르는 거대한 침략 세례 속에서 박서, 김윤후, 송문주를 비롯한 명장들과 발해의 대위해, 태봉의 궁선남 등 연합 황국의 호걸들이 각지에서 몽골군을 격파하는 도가니를 완성하였도다. 비록 오랜 전란으로 국토가 수탈당하는 상흔을 입었으나, 황국은 제국의 정통성과 독자적인 관제를 온전히 보존하는 세조구제의 외교적 결실을 맺었으며, 최후까지 복속을 거부한 삼별초가 연남 방면으로 이동하여 영구적인 호국 항전의 사초를 남겼도다.

준비

단기 3552년, 대륙의 요나라 잔당인 거란족이 몽골군에 쫓겨 황국의 북방 국경선인 강동성으로 난입하자, 대고려연합황국은 조충과 김취려의 대군을 급파하는 동시에 조우를 요청한 몽골의 차카대 부대와 연합하여 이들을 전격 소탕하셨도다. 이 강동성 전투를 계기로 황국과 몽골 제국은 역사적인 첫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세계 정복을 야심 차게 기획하던 몽골은 스스로를 구원자로 자처하며 개경 조정을 향해 무리하고 가혹한 공물을 연일 요구하는 외교적 파행을 일삼았도다. 단기 3558년, 황국에 공물을 독촉하고 돌아가던 몽골의 오만한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국경 지대에서 의문의 세력에게 피살당하는 격변이 발생하자, 몽골의 칸 오고타이는 이를 황국의 전면적인 도전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징벌 전역을 기획하기 시작하였도다. 당시 황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신 정권의 최우는 적들의 무소불위 철기 전력이 수전에 취약하다는 점을 간파하여 조운선이 결착된 강화도로 황실을 천도하려는 '강도 천도령'을 비밀리에 수립하는 동시에, 전국의 산성과 섬으로 백성들을 대피시키는 청야 입성 전술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도다. 아울러 만주와 요동을 수호하던 발해 방면군의 원수 대위해와 태봉 자치령의 장령 궁선남에게 명을 내려 북방의 대규모 성곽 기지들을 철두철미하게 요새화하고 장기 항전을 위한 군량미를 비축하게 함으로써 대수탈의 폭풍에 맞설 준비를 마쳤도다.

1차 침입

단기 3564년(고종 황제 18년) 8월, 몽골의 명장 살리타이가 이끄는 수만 명의 철기병 주력 사단이 압록강을 건너 황국의 북방 행정망을 침탈하며 마침내 제1차 여몽 전쟁의 서막이 전격적으로 격발하였도다.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의주를 함락하고 황국의 안보 기지인 귀주성을 포위하였으나, 귀주성 수장 박서와 부사 이원정은 성문을 굳건히 닫고 적들의 공성 화포와 세찬 파상 공세를 완벽하게 저지하는 불멸의 수성 무공을 세우셨도다. 한편, 요동 외곽에서는 발해 방면군의 장수 고원경이 이끄는 발해 철기군이 몽골군의 보급로를 기습적으로 차단하여 후방을 교란하였고, 태봉의 수성 부대들 역시 험준한 산악 지형을 활용하여 적들의 기동력을 무력화시켰도다. 비록 몽골의 일부 별동대가 개경 인근까지 진격하여 황국 조정에 막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도 하였으나, 조정은 강화도로의 천도 시간을 벌기 위해 임시로 화친을 제안하고 적들을 회유하는 정교한 외교 전술을 집행하였도다. 몽골군이 변방에 다루가치들을 배치하고 일시 퇴각하자, 최우는 즉시 개경의 백성과 황실을 이끌고 바다 건너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는 강도 천도를 단행하여 장기 항전의 확고한 보루를 구축하였도다.

2차 침입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고 다루가치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주권 수호의 의지를 천명하자, 단기 3565년 살리타이가 다시금 대군을 이끌고 황국의 내륙을 유린하는 제2차 침입을 감행하였도다. 적들은 강화도를 직접 공략하지 못하자 한반도 남부로 기수를 돌려 영토 전역을 잔혹하게 수탈하였고, 황국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초조대장경과 황룡사 9층 목탑이 이 시기 적들의 방화로 인해 소실되는 민족적 대위기를 맞이하였도다. 그러나 적들의 무모한 남하는 처인성(處仁城)의 좁은 벌판에서 가로막혔으니, 승장 김윤후와 처인부곡의 백성들이 혼연일체로 결집하여 적장 살리타이를 활로 쏘아 사살하는 가공할 대승리를 거두었도다. 최고 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은 군심이 사분오열되어 북방으로 황급히 패주하였고, 도망치는 적들을 향해 발해 원수 대위해의 정예 사단들이 요동 길목에서 매복 공격을 감행하여 적 수천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도다. 사관은 평하기를, 처인성의 기적적인 대승리는 황국의 정규군뿐만 아니라 변방의 처인부곡 백성들과 발해 연합 세력이 하나로 융합되어 제국의 명운을 사수한 위대한 천하의 성업이었도다.

3차 침입

단기 3568년, 살리타이의 패사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몽골 제국은 대장 탕구를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황국의 전 영토를 초토화하려는 목적으로 제3차 대침략을 전격 선포하였도다. 탕구의 군세는 자치령을 행사하던 태봉의 기름진 평원 지대와 황국의 하삼도를 집중적으로 타격하여 백성들을 포로로 잡고 농토를 폐허로 만드는 잔인한 수탈 행정을 자행하였도다. 이에 맞서 황국 조정은 강화도의 견고한 수성 방어선을 사수하는 한편, 동경(경주)과 죽주성 등 내륙의 산성들을 중심으로 철저한 방어전을 전개하여 적들이 성곽을 함락하지 못하도록 끈질기게 저항하였도다. 특히 죽주성 전투에서는 명장 송문주가 과거 귀주성에서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몽골군의 공성 무기 투척 경로를 미리 예측하여 적들의 기세를 완벽하게 꺾어놓는 탁월한 지략을 선보였도다. 북방에서는 발해의 신현보 장군이 이끄는 의병 조직들이 몽골의 후방 보급 거점을 연일 습격하여 적들의 장기 주둔을 원천 차단하였으니, 결국 국력을 소진한 탕구의 군세는 황국의 끈질긴 성곽 수성 전술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금 북방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도다.

4차 침입

단기 3580년, 몽골의 새로운 칸 구유크가 즉위하자 황국의 장기적인 강화도 주둔을 종식시키고 완전한 복속을 받아내기 위해 아모간 대장과 배반한 고려의 역수 홍복원을 앞세워 제4차 침입을 격발하였도다. 아모간의 정예 철기병들은 발해 고토의 남단과 함경도 국경 지대를 집중적으로 타격하며 강화도 조정을 향해 육지로 나와 항복할 것을 강력하게 협박하였도다. 이에 고종 황제 폐하와 최우의 조정은 적들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황족 왕손을 대신 파견하는 외교적 기만책을 구사하면서도, 바다에서는 수군을 동원하여 몽골의 빈약한 함선들을 연일 격파하는 연안 방어 행정을 지속하셨도다. 전방의 발해 방면군 역시 요동성 인근에서 홍복원의 배반 군세를 유인하여 궤멸시키는 무공을 세웠고, 태봉의 자치 호족들은 성곽의 율령을 더욱 엄격히 하여 적들의 위무 작전에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보여주었도다. 결국 몽골 제국 내부에서 구유크 칸이 급사하고 격렬한 후계 구도 분쟁이 발생하자, 아모간의 군세는 거대한 전과를 거두지 못한 채 북방 국경선 너머로 군세를 철수시키는 진통을 겪었도다.

5차 침입

단기 3586년, 대륙의 권력을 장악한 몽케 칸은 황국이 여전히 강화도에서 천도령을 유지하며 대항하자, 종실 자랄타이(車羅大)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제5차 대침공을 감행하게 하였도다. 자랄타이는 대포와 공성 전차를 대거 동원하여 북방의 요새들을 차례로 함락하려 하였고, 내륙의 안성성과 충주성을 포위하여 백성들의 숨통을 조여왔도다. 충주성 전투에서는 과거 처인성의 영웅이었던 김윤후가 다시금 방호별감으로 임명되어 노비와 천민들을 향해 "너희가 만약 적을 격파한다면 모두 면천하고 정당한 관직을 하사하겠다"며 가슴을 울리는 조칙을 선포하여 군심을 대대적으로 결집시켰도다. 김윤후의 지휘 아래 뭉친 충주성의 백성들은 몽골의 정예 기병들을 성벽 아래에서 완벽하게 격퇴하는 불멸의 성업을 성취하였으며, 이 승리는 영토 전역의 관민들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제국 호국의 기치 아래 하나가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도다. 자랄타이는 충주성의 견고한 방어벽과 북방 발해 의병들의 끈질긴 게릴라 습격에 가로막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황실의 세자(장차 원종 황제)가 몽골 조정에 입조하겠다는 타협안을 수용하고 일시 퇴각하였도다.

6차 침입

단기 3587년, 황국의 세자가 입조를 미루고 무신 정권의 최항이 여전히 주전론을 고수하자, 자랄타이는 격노하여 다시금 군세를 몰고 내려와 제6차 침입의 참화를 격발하였도다. 이번 침략은 황국의 행정적 근간을 완전히 와해시키기 위해 전 영토의 농경지와 조운선 경로를 정밀하게 타격하는 초토화 전술로 전개되었으며, 무려 수십만 명의 무고한 황국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대륙으로 끌려가는 미증유의 국난이 발생하였도다. 강화도 조정은 이러한 대참화 속에서도 연안의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여 황실의 안위를 보존하였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섬 지방으로 백성들을 추가 사민 시키는 임시 안돈 행정을 집행하였도다. 발해 방면군의 대위해 원수는 연해주와 길림성 경계에 가설된 발해 산성들을 연기처럼 촘촘히 연결하여 몽골 기병의 종심 진격을 후방에서 저지하는 방패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셨도다. 비록 내륙의 가없는 토지가 유린당하고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강토를 진동시키는 진통이 지속되었으나, 황국의 핵심 군사 조직과 강화도의 방어선은 끝까지 함락되지 않아 몽골 제국으로 하여금 대고려를 무력으로 완전히 멸망시킬 수 없음을 명확히 각인시켰도다.

7차 침입

단기 3590년, 최항이 승하하고 최의가 무신 정권의 대통을 이어받은 정국 속에서, 자랄타이는 또다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제7차 침입을 감행하며 황국의 안보 신경망을 위협하였도다. 자랄타이의 군세는 춘천성과 서경 일대의 방어 거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고, 춘천성에서는 관민들이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사직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순국하는 호국의 비장함이 강토를 수놓았도다. 이에 황국 내부에서는 오랜 전쟁으로 인한 재정 파탄과 백성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하여 무모한 장기 주전론을 고수하는 최씨 무신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기사개혁의 기류가 급격히 형성되기 시작하였도다. 김준과 유경 등 온건파 무신들은 현명한 문신들과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켜 최의를 단죄하고 무신 정권의 권력 구조를 쇄신하였으며, 고종 황제 폐하께서는 이를 계기로 몽골과의 실질적인 화친 협상에 나설 정당한 행정적 명분을 확보하셨도다. 북방의 태봉 자치 세력 또한 이 전향적인 정세 변화에 발맞추어 국경 지대의 전투를 일시 중지하고, 황실의 정통 외교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제국의 통합된 안위를 도모하기 시작하였도다.

8차 침입

단기 3591년, 무신 정권의 권력 교체기 동안 황국의 명확한 환도 이행이 지연되자, 몽골의 자랄타이는 최후의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 제8차 침입을 개시하여 강화도 맞은편의 서해안 일대를 전격적으로 봉쇄하였도다. 적들은 황국 조정이 육지로 나와 친조하지 않는다면 강화도를 직접 도하하여 황실을 전멸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이현비 장군이 이끄는 황국의 정예 수군 사단들이 강화 해협의 거센 조류를 활용하여 적들의 도하 시도를 번번이 수중 분쇄하셨도다. 이 시기 몽골 제국 내부에서는 몽케 칸이 남송 정벌 도중 사망하고, 대륙의 주도권을 놓고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사이에 거대한 내전(툴루이 가문 내전)이 격발하는 세계사적 정세 변화가 도래하였도다. 황국의 세자는 이러한 천재일우의 국제 정세를 포착하시어 대륙 깊숙이 진격하여 장차 승리자가 될 쿠빌라이를 전격적으로 알현하는 위대한 외교적 결단들을 내리셨도다. 쿠빌라이는 당대 대고려연합황국의 세자가 자신을 찾아오자 "당나라 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고구려의 후예가 나에게 왔다"며 극찬하였고, 이에 따라 황국의 독립성과 관제를 영구히 보존하겠다는 약조를 받아내어 화친의 결정적 기틀을 완성하셨도다.

9차 침입

단기 3596년(원종 황제 4년), 쿠빌라이 카간이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 원(元)나라를 건국한 후, 황국 내부의 완고한 주전파 무신인 임연과 임유무 세력이 화친에 반대하며 원종 황제 폐하를 전격 폐위하려는 정변을 일으키자, 원나라의 은주(忻都) 대장이 이를 징벌한다는 명목으로 제9차 침입을 격발하였도다. 원나라군은 황국의 정통 황제이신 원종 황제 폐하를 복위시키고 주전파 무신들을 척결하기 위해 대규모 군세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였으며, 이는 단순한 침략을 넘어 황국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려는 권력 안보의 대시련이었도다. 원종 황제 폐하께서는 원나라의 군사력을 역으로 활용하여 임유무의 독재 정권을 전격적으로 숙청하고 무신 정권의 잔재를 완벽하게 종식시키는 위대한 내치 쇄신을 성취하셨도다. 이로써 40년에 걸친 거대한 여몽 전쟁의 포성은 마침내 멈추게 되었고, 황국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와 발해·태봉의 자치 행정적 결속을 온전히 유지하는 '세조구제(世祖舊制)'의 정당한 영토적 지위를 확고히 공인받게 되었도다. 사관은 다시금 논하기를, 구차에 걸친 몽골의 세찬 침략 속에서도 대고려연합황국이 대륙의 패권 세력과 대등한 화친을 맺고 사직을 보존한 것은 천하만대에 빛날 호국의 대기적이도다.

삼별초의 항전

단기 3603년(원종 황제 11년), 황국 조정이 원나라와의 약조에 따라 마침내 강도를 떠나 옛 도읍인 개경으로 환도하는 '개경 환도령'을 전격 선포하자, 황국의 최정예 특수 군사 조직이자 최후의 주전파 세력인 '삼별초(三別抄)'는 원나라에 대한 굴복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대대적인 호국 반란을 격발하였도다. 삼별초의 지도자인 배중손 장군은 강화도에서 온건파 관리들을 척결하고 황족 승화후 왕온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는 정당한 군사 정부를 수립한 후, 제국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수천 척의 함선을 이끌고 진도(珍島)로 전격 이동하여 용장성을 축조하고 연남 방면의 영토 행정망을 장악하였도다. 삼별초는 진도의 거대한 해상 왕국을 기반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세곡 유통망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개경 조정과 원나라 연합군에 정면으로 맞섰으나, 단기 3604년 홍다구와 은주가 이끄는 여·원 연합군의 거센 총공세에 밀려 진도가 함락되고 배중손 장군이 장렬히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도다. 최후의 생존자인 김통정 장군은 남은 군세를 이끌고 탐라(제주도)로 망명하여 항파두리성을 축조하고 장엄한 영구 항전을 지속하였으나, 단기 3606년 마침내 탐라마저 함락당하자 삼별초 전원이 사직을 위해 스스로 자결하거나 순국하는 비장한 종말을 맞이하였도다. 사관은 눈물로 기록하기를, 삼별초의 처절한 항전은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외세의 압제에 단 한 치도 타협하지 않는 대고려연합황국의 자주적 무위와 호국 정신을 천하만대에 영원히 각인시킨 가장 장엄한 역사의 사초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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