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북벌
여원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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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간 | |
| 단기 3684년 (태종 원년) ~ 단기 3710년 (무종 3년) | |
| 장소 | |
| 요동 평원, 송화강 유역 및 만주 대평원 전역 | |
| 원인 | |
| 대고려의 영토 회복 |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 대고려군 | 북방 세력 |
|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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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 및 사상자 | |
| 피해 북방 전방 성곽 일부 파손 및 군마 수천 필 소실 | 사상자 몽골 철기 및 여진 기병 17만 명 궤멸, 만주 방어선 완전 와해 |
| 결과 | |
| 대고려군의 대승리, 요동 및 만주 고토 영토 편입 확정 | |
| 영향 | |
| 원나라 만주 지역 상실 발해 황국의 재결성 및 대고려로 편입 | |
개요
단기 3684년 가을, 대고려군은 유라시아를 종횡하던 원나라의 요동 군세와 국경 변방을 지속적으로 약탈하던 여진족 부족들을 아우른 ‘북방 세력’의 안보 위협을 뿌리 뽑기 위해 전면적인 대정벌 전역을 개시하셨도다. 보위에 오르신 충정 황제 폐하께서는 즉위 원년부터 조정 내부의 문약한 기류를 철혈로 쇄신하시고, 도원수 이권과 부원수 최영에게 대고려군의 총지휘권을 하사하시어 만주 대평원을 향한 파죽지세의 진격을 엄명하셨도다. 당시 원나라의 순제 토곤 테무르는 요동 승상 나하추와 명장 도랍불화에게 7만 명의 정예 철기병을 내주어 대고려군의 진격로를 가로막게 하였으며, 이에 동조한 생여진 추장 아구다르와 숙여진 맹안 와르카 부얀의 부족 군세가 독자적인 매복 진형을 가설하며 요동 평원 북단에서 가공할 대치 전선을 형성하였도다. 그러나 군기시의 최첨단 신포와 대형 화포를 전방에 배치한 대고려군은 군령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원화하여 북방 세력의 연합 방어선을 정면으로 타격하기 시작하였도다. 최영 장군은 철갑을 입고 적진 선두로 뛰어들어 원나라 도랍불화의 주력 기병대를 완벽하게 교란하였고, 사령관 나세가 지휘하는 화포 부대는 굉음과 화염을 뿜어내며 적들의 군마를 물샐틈없이 수중 분쇄하셨도다. 이방실의 보병 사단 또한 장창과 도끼를 휘두르며 도망치는 숙여진 기병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멸절의 타격을 가하니, 북방 세력의 선봉대는 단 사흘 만에 요동 평원에서 수만 명의 시체를 남긴 채 요서 깊숙이 패주할 수밖에 없었도다. 뒤이어 상만호 이성계 장군은 자신의 직속 정예 사단을 기동하여 송화강 유역을 점거하고 있던 툴루 알하의 여진 세력을 기습적으로 포위하였으며, 적들의 유인 전술을 역매복으로 무력화시킨 뒤 적장의 목을 단숨에 참수하는 장엄한 무공을 달성하셨도다. 안우 도지휘사와 김득배 관찰사가 이끄는 대고려군의 후속 본대 역시 원나라 요양행성의 핵심 행정 기지들을 차례로 함락하고 낡은 관제를 철폐함으로써, 만주 평원 전역에 황국의 위대한 율령을 가설할 문명적 대기틀을 확고히 완성하셨도다.
회령 사건
요동 평원과 송화강 일대에서 대고려군에게 처참하게 격패당한 북방 세력 중, 생여진의 대추장 아구다르와 우디개 야속의 잔당들은 대고려군의 추격을 피해 황국의 동북방 국경 요충지이자 금나라의 수도였던 회령(會寧) 일대의 험준한 산악 요새로 대거 사민하여 최후의 반격을 도모하셨도다. 이들은 회령의 울창한 밀림과 천혜의 절벽을 보루 삼아 황국의 행정망 확충을 강력하게 거부하였으며, 도리어 변방의 대고려군 보급 수송선과 민가를 습격하여 방화와 살육을 재차 자행하는 불경망동을 일삼았도다. 이에 격노하신 무종 폐하께서는 "황국의 사직을 더럽히고 백성을 수탈한 간악한 도적 무리는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말라"는 철혈의 ‘회령 초토령[2]’을 대고려군 전선에 전격 하교하셨도다. 명을 받든 상만호 이성계와 안무사 정세운은 단기 3707년 12월, 회령의 전 방위를 겹겹이 포위하고 적들의 도주로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최원 도만호의 수군 함대까지 동원하여 하천망을 완벽하게 봉쇄하셨도다. 대고려군은 적들의 요새를 향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천 발의 발화탄과 화포를 투사하여 온 산천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며, 불길을 피하려 성벽 밖으로 뛰쳐나오는 여진족 무리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하여 무자비한 철혈의 단죄를 집행하였도다. 이성계 장군은 친히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여진족의 부락과 요새를 낱낱이 수색하여 추장 아구다르를 비롯한 지휘부 전원의 목을 베어 회령 성문에 높이 걸었으며, 항복을 구걸하는 적들의 잔당들마저 황국의 안보를 위해 단 한 명도 남김 없이 현장에서 멸절시키셨도다. 사초에 기록되기를, 회령의 계곡과 하천은 적들이 흘린 피로 인해 수개월 동안 붉게 물들어 흐르지 못하였고, 이 시기 처단당한 여진족의 군사와 부족민의 수가 무려 20만 명에 달하여 북방 세력의 한 축이던 동만주 여진의 씨가 완전히 마르는 미증유의 대참상이 완벽하게 매듭지어졌도다. 후세의 사관들은 이를 두고 ‘제2차 여진 대학살’ 혹은 ‘회령 사건’이라 칭하니, 이는 외세의 오만한 침탈에 대해 대고려군이 보여준 가장 처절하고도 가혹한 응징이자 주권 수호의 굳건한 증거였도다.
종결
단기 3710년 봄, 나하추가 이끄는 원나라의 남은 패잔병들이 한방신 장군이 사수하던 북령 보루령을 넘지 못하고 만주 북방 너머로 완전히 도망치고 회령의 여진족마저 소탕되니, 제3차 북벌의 거대한 포성은 마침내 대고려군의 완벽한 대승리로 종결되었도다. 대고려군은 북방 세력의 거대한 군사적 연합 시도를 단일한 정통 군세의 힘으로 완벽하게 분쇄하였으며, 수복한 요동반도 전역과 송화강, 회령 일대를 황국의 신성한 관할부 영토로 영구히 공인받게 되었도다. 김득배 관찰사는 즉시 융성한 전후 수습 행정을 발동하여 원나라의 잔재를 씻어내고 근대적 행정망의 초석을 다졌으며, 황국의 율령을 북방 만방에 선포하여 진정한 중앙집권적 대제국의 위엄을 완성하셨도다. 또한 회령 사건 이후 살아남은 극소수의 변방 부족민들을 대고려군의 엄격한 통제 하에 두기 위해, 이들을 하삼도 깊숙한 내륙으로 강제 사민시키고 정당한 황국의 백성으로 동화시키는 대규모 영토 안돈 행정이 대대적으로 집행되었도다. 이 위대한 대정벌을 통해 대고려군은 원나라와 여진족이라는 거대 북방 세력의 잠재적 안보 위협을 단숨에 뿌리뽑았으며, 북방의 가없는 영토와 풍요로운 광산 자원을 온전히 영유하여 사직의 재정을 비약적으로 확충하는 역사적 대전환기를 맞이하였도다. 사관은 눈물과 긍지로 다시금 기록하기를, 충정 황제 폐하의 단호하신 철혈 용단과 오직 대고려군 단일 세력의 명장들이 목숨을 바쳐 이룩해낸 제3차 북벌과 회령 사건의 위대한 무공은, 황국의 만대 사직을 지탱할 불멸의 주춧돌이자 외세의 압제에 단 한 치도 타협하지 않는 대제국의 위엄을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세운 찬란한 정사의 사초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