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언년/생애

개요

가상국가 고려의 재신 임언년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생애

정안 임씨 출신으로 아버지는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재상 임원애다. 이후 호부상서 이혁과 혼인하였으며 이혁이 국난으로 인해 얼마 안가 생을 마감한 이후엔 가주로서 자리를 지켰다.

이자겸의 난과 박지만의 정변 이후 조정의 중서시랑으로서 김지한이 문하시중에 등극하기 이전까지 수상의 역할을 맡았다.

이후 1185년 12월 25일 여러번의 상소 끝에 퇴직하였으며 약 60년간 재신의 자리를 지키었다. 퇴임할 때 문하시랑평장사로 올려졌으며 판호부사, 이부상서 그리고 수태부가 더해졌다.

최연소 관리

임언년은 당시 15세라는 나이에 팔표방 잡과에 응시하고 급제하여 단번에 정 3품 태의감이 되었다. 15세의 소녀였기에 당시 모든 백성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중서시랑 임언년은 최연소로 태의감에 임명되어, 단 이주 만에 서책만으로 태의감 약재의 명목과 효능을 모두 꿰뚫어보았다고 전해진다.

약방일지를 작성하다.

임언년은 태의감과 동시에 시간이 빌때마다 중추원 관리들의 부족한 일손을 도왔다고 한다. 이때부터 기록의 중요성을 느끼고 왕실 약방일지를 작성했다.[1] 약방일지에는 이자겸이 궁중 내부에서 저질른 죄악들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기록되어있었는데 그 덕에 먼 훗날 이자겸의 난으로 피해받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2]

국난을 겪다.

이자겸의 난

당시 대왕태후였던 사숙왕후의 진찬연중 이자겸의 만행으로 사숙왕후가 혼절하자 당시 문하시중이였던 김지원과 중서시랑이였던 어머니 곽덕순 등등 주요 신료들과 함께 자경궁으로 향했었다.

이자겸이 자경궁을 포위하고 사숙왕후에게 폐위교서를 들고 갈때 사숙왕후의 처소 앞에서 이자겸의 걸음을 막았다.

이자겸이 칼을 들고 비키라고 호통쳤으나 임언년은

네가 이 문을 열고 들어가고싶거든 나를 먼저 죽이거라 !

라고 외치며 이자겸의 걸음을 막았다.

중서시랑께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쌍욕들을 해대며 이자겸의 신경을 긁어댔고 이자겸이 분노하여 사병을 시켜 중서시랑의 몸을 노끈으로 묶었다. —  고려사 내용 일부

용기만은 여장부와 같았지만 손쉽게 제압당해 전각 구석에 던져저 있었다. 다행이 김지원과 사숙왕후가 이자겸을 처리하며 바로 풀려났다.

박지만의 정변

난이 진압되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서 박지만이 정변을 일으켰다. 임언년은 부상당한 신료들을 치료한 약을 찾으러 자경궁 창고들을 뒤지고 있었는데 그 도중 박지만이 사숙왕후와 김지원, 어머니였던 곽덕순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임언년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으나 정신을 붙잡고 남편 이혁에게 박지만을 맡긴 후 선경귀비와 평주원부인을 피난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박지만의 군에게 잡혀 가마에 실린채로 다시 자경궁으로 끌려왔고 부여후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

이후 선경귀비가 박지만에게 간절히 부탁하여 남편이 삭탈관직 당하고 홀로 유일하게 조정에 서있게 되었다.

부여후 복위를 도모하다

당시 상당후였다 박지만을 통해 옹립된 새로운 국왕 인종의 즉위를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박지만이 자신의 정변을 도운 무신들에게 작위를 난발하듯이 하사하고 교정도감을 설치해 그 권세를 악용하자 정안임씨 , 영천이씨 , 현풍곽씨 가문원들을 동원해 폐위당한 부여후의 재복위를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박지만의 일원중 한명이 박지만의 만행들에 대한 증좌들을 인종에게 보고하고 자수하며 박지만 일행들이 처형당하고 교정도감이 폐지되자 생각이 바뀐것인지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

종신 노동

임언년은 나이가 들어 인종 재위 후반부터 현 국왕 재위기까지 지속적으로 퇴직을 요구했으나 무려 4차례나 거절당했었다.

제 1차 사직 상소

신이 이미 고령에 이르러 기력이 예전 같지 아니하니, 후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나고자 합니다.

첫번째 상소를 올리자 당시 국왕이었던 인종이 " 지난번에 양궁대회에 참여하는것도 보았소. 아직 팔팔하신듯 한데 그런 말장난 마시게 " 라며 임언년을 돌려보냈다.

제 2차 사직 상소

근래 병환이 잦고 정무를 감당함이 점점 버거우니, 조정에 누를 끼치기 전에 물러나게 해주십시오.

병식이 깊어져 업무를 이행하기 어렵다며 두번째 상소를 올렸으나 인종은 약재를 주며 다시 상소를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이후 이틀뒤 인종은 붕어하였다.

제 3차 사직 상소

신은 이미 할 만큼 했고, 이 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 자체가 도리에 어긋납니다. 더는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예를 명목으로 자신을 퇴직시켜달라며 강경한 태도로 사직을 올렸다. 18대 금상. 즉 작금의 금상에게까지 2대에 걸쳐 상소를 올린것이자.

그러자 금상이 " 아니되오. " 라 하였고 임언년이 이유를 묻자 금상께서 그냥 돌려보내셨다.

제 4차 사직 상소

척준경도 은퇴시켜주는데 나는 왜 안시켜줘요??????

네번째 상소를 올렸을 당시 늙어서 겁을 상실했다고 신하들에게 비난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상께선 임언년의 상소를 불살라버렸다.

퇴직 항의 노쇼

결국 이러한 사태를 참지 못한 임언년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기생옷을 입은체 개경 시장 한가운데로 나아가 마지막 퇴직 항의 상소를 올렸다.

신 중서시랑평장사 겸 태의감 임언년은 머리를 땅에 조아려 아뢰옵니다. 신이 조정에 들어온 지 어언 사십여 년, 사람으로 태어나 네 분의 왕을 섬겼사오며 뼈는 닳고 피는 말랐으며, 이제는 숨만 붙어 있는 노구가 되었사옵니다. 헌데 신이 사직을 청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옵니까.

첫번째 두번째 사직서를 거절하실때는 나름의 이유라도 알려주시더니

세 번째에는 이유조차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저 “아니되오” 하셨사옵니다.

네 번째에는 신의 사직서를 보시지도 아니하시고 불태워 버리셨사오니, 신은 그날이 조정의 날이었는지 장작불의 날이었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사옵니다.

이에 신이 묻고자 하나이다.

신이 아직 젊사옵니까? 신의 다리가 성하옵니까? 신의 기억이 또렷하옵니까?

요사이 조정에서는 “임언년이 노망이 들었다”는 말까지 돌고 있사오니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노망난 노인을 조정에 붙잡아 두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겠사옵니까?

혹여 그것이 거짓이라면 신에게 이리한 모욕을 준 자들을 어찌 그대로 두시겠사옵니까? 신은 이제 더 이상 왕족의 발을 주무르라 불려 다니고, 두통에는 발바닥을 찌르며 예절을 가르치고, 노망이 났다느니 아니느니 하는 말을 뒷간에서 전해 듣는 삶을 살고 싶지 아니하옵니다.

신은 벼슬을 탐하지 아니하고 권세를 붙들 생각 또한 없사오며 다만 살아 있는 동안 조용히 약을 달이고 숨을 고르고자 할 뿐이옵니다.

부디 이번에는 사직서를 불태우지 마시고, “아니되오” 한 마디로 넘기지 마시고, 늙은 신을 사람답게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만일 이번에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면 신은 더 이상 사직을 청하지 아니하고 그저 내일 아침부터 조정에 나오되, 말을 하지 아니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아니하며, 질문을 받으면 침만 들고 서 있겠사오니 그 또한 성상께서 감당하실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신, 더는 버틸 힘이 없어 이 다섯 번째 상소를 올리옵니다. 부디 허락하시옵소서.

신 임언년, 진심으로, 아주 진심으로, 이제는 정말로 물러나고자 하옵니다.


퇴직에 성공하다

결국 이러한 사태를 지켜만 보던 섭정공 문하시중 김지한에 의해 1185년 12월 25일 퇴직 상소가 받아들여져 문하시랑퍙장사로 올려진 후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10년 간 천수를 누리다 1195년 1월 15일 노환으로 사망한다.

여담

각주

  1. ↑ 다만 일부 내용중 종친들이나 후궁들을 돌려까는듯한 내용도 포함되어 한동안 논란이 되었었다.
  2. ↑ 남편 이 혁이 사망하기 전 난중필록을 표함한 유품들 사이에 임언년의 약방일기를 함께 섞어 묘에 묻었고 영천이씨 묘역 이장중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