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이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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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으리아 공화국

Resphubıllika t"aramʌl Kijı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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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더 나은 삶 - 더 나은 국가
Rjʌt"ajıl ihılkjef - Rjʌt"ajıl t"aramʌl
상징
국가 나는 맹세한다
국화 큰금계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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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2020년 6월 18일
대개혁 2022년 6월 18일
키이으리아 인민 공화국 선포 2023년 6월 10일
SGF 제 3공화국 건국 2023년 7월 2일
SGF 자유국 건국 2024년 11월 29일
SGF 자유국 망명정부 수립 2025년 1월 16일
SGF 자유국 제 2공화국 건국 2025년 1월 17일
키이으리아 공화국 건국 2026년 4월 15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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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카르스 크이우
최대도시 카르스 크이우
면적 172,415km²
접경국 우크라이나, 러시아, 루마니아, 벨라루스
인접국 튀르키예, 조지아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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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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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79명
공용어 키이으리아어, 루마니아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크림 타타르어
모국어 키이으리아어
공용 문자 키이으리아 알파벳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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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에스티주의
국가 지도 위원회 의장 이을드즈 알람기르 에스티 (제 15대)
국가 지도 위원회 부의장 Ygi (초대)
국가 평의회 의장 공석
국가 평의회 부의장 공석
대법원장 공석 (제 3대)
여당 국가 개발 전선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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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 시장 경제
GDP
(명목)
전체 GDP $91억 4565만
1인당 GDP $1,287.84
외환보유액 $308,539.94
신용등급 A
화폐 공식 화폐 키이으리아 에스티(St)
ISO 4217 KYE
세입 $3,470.06
세출 $7,700.77
지니 계수 0.312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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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산업력
시간대 UTC+3
도량형 SI 단위
통행방향 좌측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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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 미가입
ccTLD
.st
국가 코드
FSS, FS
국제 전화 코드
+380
홈페이지
키이으리아 공화국 수도 카르스 크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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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키이으리아 공화국(Resphubllika t"aramʌl Kijıria)은 2020년 6월 18일에 이을드즈 알람기르 에스티(J̇ıltє a. Est'i)에 의해 건국된 친인류 국가이다. 수도는 아크야르였으나, 현재는 카르스 크이우로 이전되었다.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과거 코사 민주 공화국의 역사 또한 SGF 자유국 역사의 일부로 본다.

국가 상징

해당 문단에서는 키이으리아 공화국의 상징들에 대하여 서술한다.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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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는 5개의 별과 삼각형, 국장이 들어간 남홍색오성기이다. 2023년 6월 18일에 채택되었다. 색조와 명칭이 람홍색공화국기와 유사한 것이 특징이다. 자유헌법 제42조에 공식 국기임이 명시되어 있다.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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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은 육각형 속에 정부청사와 붉은 별, 지구본을 형상화한 문양과 광업의 상징인 곡괭이이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국장 또한 국기와 마찬가지로 2023년 6월 18일에 채택되었다. 자유 헌법 제43조에 공식 국장임이 명시되어 있다.

국가

국가는 여타 사회주의 공화국과 같이 러시아어 인터네셔널을 채택하여 사용 중이다. 자유 헌법 제44조에 공식 국가임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국가 변경에 관한 국민 투표에 의해 크림 타타르의 독립 운동가이자 크림 인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얶던 노만 첼레비치 한이 작곡•작사한 《나는 맹세한다》로 변경되었다.

나는 맹세한다 ㅡ 우리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어찌하여 불쌍한 형제들이 썩어 죽어가야한단 말인가?

그들을 위해 슬퍼하지 않고, 괴로워 하지 않으며 살아간다면

내 심장의 어두운 피가 끓지 않고 마르기를 바란다.


나는 맹세한다 ㅡ 이 어두운 땅에 빛을 비추겠다고.

어찌 두 형제가 서로를 보지 못한단 말인가?

이것을 보고도 답답해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타오르지 않는다면

내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피의 바다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맹세한다 ㅡ 민족을 위하여 죽겠다고.

내 민족의 눈물을 알고, 보고, 닦아주겠다고.

그것을 모른 채, 보지 못한 채 천 년을 산다고 한들,

결국 어느 날 무덤지기들이 와서 나를 묻으리라.

— 노만 첼레비치 한

그러나 최근에는 키이으리아 공화국의 새로운 국가를 만드려는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으며, 해당 사안은 15대 국가 지도 위원회 1차 정기회 논의 주제로도 선정되었다.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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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는 금계국이며, 금계국이 국화로 지정된 이유는 금계국이 세계 곳곳의 다양한 환경에서 적응해 퍼져나가기 때문이며, 공화국 또한 세계로 퍼져나가리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자유 헌법 제49조에 공식 국화임이 명시되어 있다.

역사

고대

기원전 4700년경, 쿠쿠테니-트리필랴 문화에 속하던 사람들이 북서부에서 내려와 드니프로강 중류에 정착하여 여러 거대취락이이 생겨났다. 쿠쿠테니-트리필랴 문화인들이 이전에 거주했던 스텝 지대에서는 토양 고갈로 인해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는데, 드니프로강 중류 지역의 토양은 비옥하여 거주지를 옮겨다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쿠쿠테니-트리필랴인들은 이 비옥한 흑토를 신의 선물로 여겼다. 기원전 3900년경, 쿠쿠테니-트리필랴인들은 야생 호밀을 작물화하는데 성공했다. 수백년 간 선별 재배를 하여 이삭이 떨어지지 않는 돌연변이 종을 확보하게 되어 드니프로강 하구의 인구가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300년경, 취락들이 거대해지면서 작물들을 관리해야 하자, 회계문자가 발명되었다.

초기의 드니프로 문명권의 도시국가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과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농업의 생산성이 발달하면서 양자간의 빈부 격차는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대신,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땅을 대신 경작하게 하는 구조가 생겨났다. 이것이 진행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농지를 소유한 몇몇 인물들이 모여 지주 공동체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들은 도시를 이끌게 되었다. 지주 공동체의 등장은 이후 도시 국가의 발현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2800년경, 청동기를 사용한 얌나야 문화인들이 유입되고, 드니프로강 하류에 정착한 쿠쿠테니-트리필랴 문화에 동화되면서 청동기들과 말이 유입되었고, 이들이 먼저 도달한 도시들은 군사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2700년경 드니프로 강 하류 일부 지역에 기초적인 도시국가들이 발현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원전 2500년경에는 도시 연맹 또한 발현하였으며, 기원전 2300년경에 드니프로 고문자가 확립되게 되었다. 기원전 2200년경, 연맹 내 도시국가들 간의 빈부 격차가 생겨났고, 부유한 도시들은 가난한 도시들에게 곡물이나 가축 등을 주는 대신 자신들이 보낸 사람이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게 했다. 당시의 정치는 제사 중심이었고, 이렇게 몇몇 도시가 한 개의 국가로 합쳐지면서 비교적으로 각 국가들의 재정이 안정화되게 되었다. 기원전 2100년경까지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이 공화국 형태로 변화하면서 소공화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1850년경, 하미단 공화국에 흉년이 들어 곡물이 부족해졌지만 지주들은 곡물을 풀지 않았고, 이에 민심이 나빠지게 되었다. 이러던 중 사네피르 아르두라는 인물이 곡물은 신의 것이며, 부자들이 아닌 성직자들이 신의 뜻에 따라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셰즈교를 창시하고, 봉기를 유도했다. 결국 하미단 공화국은 사네피르 아르두를 주축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공화국이 되었으며, 원래 지주 공동체 회의로 구동되던 국가에 처음으로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성직자장이라는 도시의 수장 개념이 생겨났다. 하미단 공화국에서는 원래 성직자장을 성직자 회의를 통해 선출했지만, 기원전 1700년경, 려흐마 왕조의 첫 성직자장은 자신이 사네피르 아르두를 이어 신이 보낸 인물이라 주장하고, 자신의 피가 신성하다며 자신의 자녀들만이 제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그렇게 하미단 공화국에서 려흐마 왕조가 시작되게 되었고, 이는 성직자장의 권위는 더욱 높아지게 만들었다. 또한 사네피르 아르두의 후손이였던 그는 사네피르 아르두를 신격화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1650년경에는 셰즈교의 경전이라고 볼 수 있는 «역사»가 집필되었다.

려흐마 왕조

셰즈교는 기원전 1850년경의 하미단 공화국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던 국가들로 퍼지기 시작했다. 주변 소공화국에서는 점차 려흐마 왕조에 따르려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려흐마 왕조는 기원전 1580년경, 드니프로 문명 처음으로 "해방자"라는 조직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주변 소공화국들을 해방시키고, 계몽시킨다는 명목으로 침공하고, 합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원전 1550년, 드니프로 문명의 첫 번째 통일 왕조인 키이으리아 제국 시대가 시작되었고, 키이으리아 제국의 황제는 온 문명 세계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당시에는 지혜의 나라라고 불렸으며, 기원전 1537년, 사네피르 1세 치하에 제국 법전이 완성되었다. 이후 제국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던 중 기원전 1348년, 직계혈통으로 계속되던 려흐마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 자녀 없이 죽자, 지방을 다스리던 방계혈족들이 자신이 새로운 황제임을 주장하며 키이으리아 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각지에서 키이으리아 제국 계승을 자칭하는 여러 왕국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269년, 현재의 드니프로 페트로우스크에 위치했던 카이흐 왕국의 비흐 려흐마가 수도 하미단과 그까지의 드니프로강 연안을 점거한 뒤 신려흐마 왕조를 선포했고, 여러 왕조들에게 복속을 요구했다.

키이으리아 제국은 황제가 수도와 일대를 다스리고, 황제의 형제자매들을 우선하여 친척들이 황제가 만든 법전에 따라 지방에서 제사관을 지내면서 식량을 관리하고, 분배하며 다스리는 방식이었다. 키이으리아 제국의 제사는 각지 신전에 수확한 곡물들을 나열한 뒤 신에게 곡물들을 수확량을 신고하는 의식을 거친 뒤, 다음 해에는 더 많은 곡물을 수확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키이으리아 제국 시대에는 내정이 상당히 안정적이었고, 기원전 14세기 경부터는 예술이 꽃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전 벽에 «역사»의 내용들이나 어떠한 사건들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석상 등을 만들어 표현하였다. 이것은 문맹률이 높은 고대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무언가를 알리거나 기억하도록 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고, 이러한 일을 잘 수행한 이들은 이 일을 독점하게 되면서 곧 정치에 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에 대한 사회적 작용으로 그림이나 조각을 배우려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는 키이으리아의 유미주의적 사상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740년경부터 키이으리아 지역으로 스키타이인들이 침입하기 시작했고, 외곽 도시들이 약탈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키이으리아 제국의 군대는 스키타이인 기병대의 전술을 당해낼 수 없었고, 제국은 기존 장교단의 권위를 하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새로운 기병 전술을 도입하지 않았다. 결국 지방 도시들은 기원전 730년경부터 이후 독립적인 군대를 만들고, 스키타이인 용병들을 고용하기도 했으며, 자체적인 기병을 양성하기 시작핬다. 독립적인 군대가 생겨난 지방 도시들은 더 이상 중앙 왕조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졌고, 려흐마 왕조의 통제력은 점차 유명무실해지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670년 경에는 수도 하미단 일대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에 스키타이인들의 침입을 받았던 지역들은 힘없는 황제를 버리고 독립했고, 결국 키이으리아 제국은 기원전 636년, 독립적으로 다스리는 영토를 모두 상실하면서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신려흐마 왕조의 황제는 칭호만 온 세계의 지배자인 문화권의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전에 려흐마 왕조에서 분가한 여러 왕조들이 경쟁하게 되었다.

파랄라타이 왕조

이후 용병이었던 스키타이인들이 아르타흐 파랄라타이를 주축으로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602년, 스키타이인 왕조인 파랄라타이 왕조가 생겨나게 되었다. 파랄라타이 왕조는 기병들을 이용해 빠르게 주변 왕국들을 통합한 뒤 제사장들을 아래에 두어 민간의 지지를 얻어냈다. 기원전 571년, 드니프로강 유역과 크림 반도 전체와 북흑해 지역 일부를 통일하여 키이으리아 제국의 세 번째 통일 왕조가 되었고, 수도는 하미단에서 북쪽에 위치한 카이흐로 이전되었다. 또한 기존의 신려흐마 왕조를 성직자 가문으로 격하히고, 신려흐마 왕조의 제사장 독점 권한을 제거한다. 파랄라타이 왕조는 뛰어난 기마병들을 이용해 주변 초원 부족들 일부를 복속시켜 정착하도록 만들고, 돈강 하류와 아조프해 연안 타만 반도, 드네스트르강 하류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기원전 459년, 키이으리아 제국 역사상 최대 판도를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왕조가 지속되면서 파랄라타이 왕조는 점차 키이으리아화 되었고, 스키타이인들의 기동 문화는 점차 키이으리아 제국의 정주 문화에 대입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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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랄라타이 왕조 키이으리아의 최대 강역

파랄라타이 왕조는 복속한 지역들에 도시를 건설하고, 현지인들을 그곳에 정착하게 만들고, 셰즈교 신전을 세워 키이으리아 본토와 동일화시키고, 키이으리아 문화를 전파했다. 그리고 셰즈교 신전을 통해 일정 비율의 식량을 세금을 징수해 셰즈교 신전은 조세 기관처럼 작동하게 된다. 파랄라타이 왕조는 빠르게 출병하고, 지역간에서 소식을 빠르게 주고받기 위해 표준화된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는 키이으리아 제국 최초의 중앙 집권 체제의 밑바탕이 되어 기존의 봉건제적인 사회 구조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기원전 450년경부터 그리스와 교역을 시작하게 되면서 키이으리아에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어 미적이고 사실적인 묘사가 유행하게 되었다. 키이으리아 제국에서는 그리스식의 거대한 건축물들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거대한 도서관이나 궁전 같은 건물들이 건립되기도 한다. 또한 그리스 철학과 사상은 키이으리아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들은 어떠한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리스를 경유해 파피루스를 수입하여 여러 이론들이 글이 되어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지식인들간의 논쟁이 발생하면서 의견이 비슷한 지식인들끼리 학파를 형성하면서 여러 학파들이 형성되었다. 이는 간접적으로 키이으리아인들의 사회관을 변화시키고, 파랄라타이 왕조, 아니 키이으리아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최전성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발달한 도로망은 상업을 크게 부흥하게 만들었으며, 전국을 순회하는 부상 계층이 등장했다.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는 트라키아와 다뉴브 강 일대를 정복한 뒤, 키이으리아 제국 서부 드네스트르 하구 지역으로 진격한다. 키이으리아 제국은 전투에서 패배해 서쪽 지역인 드네스트르 강 하구 지역을 넘기고,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기마 궁병을 지원하는 조약을 맺는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키이으리아를 완전히 정복하려 하였으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고, 이후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붕괴하자 파랄라타이 왕조는 드네스트르 강 하구를 탈환한다. 기원전 3세기 중반, 이란계 유목민인 사르마타이족이 동유럽 초원의 스키타이족을 흡수하고 강력해져 키이으리아 제국의 아조프해 일대 지역을 침입하기 시작하고, 파랄라타이 왕조는 여러 곳에 퍼진 도시들에 대한 산발적인 기습을 효과적으로 막기 어려웠다. 결국 돈강과 타만 반도 일대에 살던 이들이 불안정에 자신들의 고향을 버리고 드니프로강이나 아조프해 북서부로 피난을 떠나 정착하면서 파랄라타이 왕조는 돈강과 타만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고, 드니프로 강과 아조프해 일대의 도시들이 급격하게 확장되고,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도시들을 기존의 행정 제도로 관리하기 어렵게 된다.

혼란기

제국은 대도시들을 관리하기 위해 인구 6만 이상의 도시를 제국도시로 지정하고, 자치 권력을 강화하고 중앙 정부에 내야 하는 세금을 줄여 가용 예산을 높여주었고, 이는 중앙집권을 약화시켰다. 말기의 도시는 고향을 두고 떠나온 피난민들의 이주로 빈부 격차가 심각해졌고, 도시가 과밀화되어 식량 또한 부족해져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제국은 갑작스럽게 식량난에 돌입하게 되었고, 이에 다급해진 파랄라타이 왕조는 제국 본토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드네스트르강 지역에서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고, 기원전 187년, 드네스트르 강에서 반란이 발생하고 도로가 끊겨 식량 공급이 중단되자, 그 해 본토 제국도시도 반란을 일으켰고, 키이으리아 제국의 군대는 각지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기원전 183년, 결국 파랄라타이 왕조는 궁내에 진입한 반란군이 사네피르 6세를 굴복시키면서 완전히 힘을 상실하고, 파랄라타이 왕조는 왕궁에서 퇴거당해 외곽의 작은 성채에 머물게 된다. 이후 키이으리아는 제국 도시들은 기아를 끝내기 위해 비옥한 북서쪽 평원 방향으로 새로운 도시들을 세우고,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드네스트르강 유역에서는 농민이 세운 왕조인 라트 왕조가 발흥하여 키이으리아 제국은 서쪽 지역에서의 영향권도 상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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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도시 시대 파랄라타이 왕조의 북서 확장

키이으리아 제국에서 분리된 라트 왕조는 드니프로강 지역의 식량 부족 문제를 떠맡을 필요가 사라졌다. 라트 왕조는 잉여 곡물들을 제국 도시들에게 팔아 수익을 내며 경제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세기 말, 키이으리아 제국의 북서개척이 효과를 내기 시작했고, 식량 부족 문제와 과밀 문제 또한 어느 정도 해소되며 안정되었으나, 키이으리아 제국은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러한 상태가 기원후 1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47년, 로마 제국은 키이으리아 제국의 크림 반도에 상륙해 키이으리아 제국을 침공하고, 4년 후인 51년, 키이으리아 제국을 무력화시킨 로마제국은 크림 반도와 타만 반도에 로마 제국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보스포루스 변경 왕국을 설치했다. 106년, 로마 제국은 다키아 정복과 함께 라트 왕조를 침공했고, 라트 왕조가 로마 제국에 패배하고 조공국이 되면서 키이으리아는 모두 로마 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2세기 중반부터 고트족이 남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해 제국 도시들이 북서쪽으로 개척했던 도시들에 고트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개척 도시와 드네스트르 강 상류에 정착했고, 로마 제국이나 키이으리아의 군인으로 복무했다.

이후 고트인들은 키이으리아 사회로 스며들면서 키이으리아에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줄여나갔고, 3세기에는 제국 도시들이 고트족의 군사력에 의존하게 되면서 키이으리아 사회에 대한 고트족의 영향력이 강력해졌다. 이후 370년경, 키이으리아 문명권 일대에 훈족이 등장해 사르마타이 질서를 파괴한 뒤 키이으리아 전역을 황폐화시키고, 로마 제국의 흑해 연안 지역들 또한 전부 점령하였다. 375년, 결국 키이으리아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고, 키이으리아는 훈 제국의 유럽 침략의 후방 거점이 된다. 5세기 중반 아틸라 사후 훈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훈 제국의 잔존 세력이 훈 제국의 과거 후방 거점이었던 키이으리아까지 후퇴해 하자르 칸국이 침공해오는 8세기 초반까지 후훈 왕조를 세워 남게 되었으나, 후훈 왕조는 무너진 키이으리아를 다시 일으켜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후훈 왕조는 셰즈교를 인정하고 키이으리아 제국의 정통 후계자임을 주장하며 어느 정도 동화되어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로 지속되었다.

중세

후훈 왕조는 720년, 당대 군사 강국이었던 하자르 칸국의 침공에 무너졌고, 키이으리아는 하자르 칸국의 속령이 되었으나, 하자르 칸국의 정책으로 인해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키이으리아는 유목 제국들이 위치한 초원 지대와 유럽 왕국들의 경계에 위치해있었기에 하자르 칸국 치하에서 무역으로 번성할 수 있게 되었다. 969년, 하자르 칸국이 키예프 대공국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권력 공백이 발생하면서 키이으리아에는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왕국이 등장하게 되면서 키이으리아의 중세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페체네그인들이 키이으리아를 침입해오기 시작했고, 간헐적인 전투가 계속되다가 1036년, 야로슬라프 현공이 키예프에서 페체네그인들을 격파해내 페체네그인들이 약화되자 키이으리아에는 상대적인 안정기가 찾아왔다. 그렇게 키이으리아에서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키이으리아 부흥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카이흐 왕국은 하미단을 수도로 하는 유라냐 왕국을 침공하고 정복해 드니프로강 유역을 통일하고, 키이으리아의 재통일을 꾀했다. 그러나 1050년경부터 쿠만인들이 약화된 페체네그인들을 몰아내고 키이으리아와 루스를 침범하기 시작해 카이흐 왕국의 키이으리아 통일 계획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1223년 몽골 제국이 칼카강 일대에서 루스 공후들과 쿠만 부족, 키이으리아 왕국 군대들과의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이후 잠시의 평화기가 오면서 루스와 쿠만, 키이으리아는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로의 이해 관계 차이로 인해 1237년, 몽골 제국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자 빠르게 와해되고 말았고, 1241년, 키이으리아의 왕국들은 몽골 제국의 제후국이 되었다. 몽골제국을 이어 동유럽 지역을 지배하게 된 킵차크 칸국은 14세기 초, 내분이 발생하게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를 틈타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권력 공백이 발생한 남동쪽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136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블루 워터스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에게 승리해 드니프로강 일대를 장악하면서 키이으리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속하는 공국이 되었다. 키이으리아 내 공국들의 고위 관료들은 정교회로 개종하기도 하였고, 키이으리아의 기독교화가 일부 진행되였다. 그러나 이후 오스만 제국이 들어오면서 이는 무산되게 되었고, 기독교 인구는 소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1457년, 해당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본국과 몰다비아 공국간의 갈등이 발생하고, 몰다비아 공국이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사실상 독립하면서 드네스트르강 유역은 몰다비아 공국의 영향권이 되었다.

근세

1475년, 오스만 제국이 크림 반도 남부에 있는 서방의 식민지 도시들을 정복하고, 크림 반도를 장악한 뒤 1484년에는 몰다비아 공국의 치하에 있던 드네스트르강 하류를, 1503년에는 드네스트르강 중류를 정복하고, 1528년에는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드니프로강 하류와 중류를 정복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키이으리아 전역을 영향권으로 편입하고, 키이으리아의 공국들을 번국으로 삼았다. 16세기 초까지도 셰즈교의 사실상 조세제도화와 도중에 중단된 기독교화로 인해 일원화된 국교가 없었던 키이으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 있으면서 점차 고위 관료들과 병사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모스크를 세우면서 점차적으로 이슬람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1774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키이으리아의 번국들을 내어주게 되었다. 이 때 키이으리아의 번국들은 명목상으로 독립하게 되었으나, 사실상 러시아 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1783년, 러시아 제국은 키이으리아의 공국들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병합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이를 조약 위반이라며 항의하였으나, 1787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고, 1792년,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면서 이는 공인되게 되었다. 키이으리아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러시아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점차적으로 고유 언어인 키이으리아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강제 이주 등을 당하면서 키이으리아적 정체성을 점차 상실해가게 된다

근대

20세기 초, 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키이으리아에도 민족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 제국은 1차 대전 중 붕괴하고, 이후 해당 지역을 점령했던 독일 제국도 항복하게 되어 동유럽에 공백이 발생하게 되면서 키이으리아는 키이으리아 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1919년 혼란기 중, 라스놀 베이에 의해 1199년만에 부활하게 되었다. 키이으리아 인민 공화국은 크림 인민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쿠반 인민 공화국과 연대하여 적군에 맞섰지만, 이들은 적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1922년, 네 개의 국가는 적군의 공세에 모두 멸망하고 말았으나, 이후 민족주의의 발단이 되었다. 키이으리아는 소련 체제 하에서 우크라이나 SSR 내의 키이으리아 ASSR로 관리되었다. 이후 독소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키이으리아의 일부 분리주의자들은, 나치 독일을 소련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해방자라 바라보았다. 1941년 7월, 분리주의자들은 독립을 선포했으나, 나치 독일은 이들을 독립시켜줄 생각이 없었고, 독립을 선언한 이들을 체포하고, 우크라이나-키이으리아 국가판무관부를 설치해 지배를 확고히 했다. 이후 나치 독일은 패망하고, 다시 이들은 소련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된다.

현대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키이으리아는 우크라이나 내 자치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고, 거대한 연방이었던 소련의 해체는 민족주의를 촉발했다. 이후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는 유로마이단 사태가 발생하여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러시아는 기존의 우크라이나를 대체할 완충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2015년, 키이으리아의 분리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지원 아래 키이으리아 독립 전쟁을 일으켰고, 8년 간의 전쟁 끝에 2023년, 키이으리아는 우크라이나 절반에 이르는 거대한 공화국이 되어 독립했다. 그러나 키이으리아와는 역사적으로 그다지 상관이 없는 수미주와 하르키우주를 비롯한 북부 지역도 필요에 따라 포함되었고, 루마니아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키이으리아인, 크림 타타르인이 공존하는 다민족 공화국이 되었다. 키이으리아 공화국은 실제로는 러시아의 완충국 건설을 위해서 생겨난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후 키이으리아는 러시아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2026년 현재, 유럽에서도 주요한 군대로 손꼽히는 키이으리아군을 완성해냈으나, 국제적으로는 부분적으로 승인되고 있다.

기후

전체적으로 온난 습윤 기후를 보이며, 수도인 세바스토폴을 기준으로 보면 서울보다는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좀 더 춥다. 그리고 세바스토폴은 위도 44도에 위치해, 위도 37.5도에 위치한 서울보다 한참 북쪽에 있다. 다만 겨울이 길고 일교차가 적어 낮기온이 낮기 때문에 춥다고 느끼기 쉬우며, 실제로 러시아와 가까운 동부는 강원도 내륙보다 더 춥다.

경제

1인당 GDP 하위 세계 10위 안에 드는 후진국이다. 천천히 경제가 성장하고 있으나 빈부 격차가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오랜 기간 동안 중지되었던 경제 시스템이 완전히 새로우게 개장하여 경제 참여율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높아졌다.

9월 15일부터 경제 프로그램 제작까지 경제 운영이 중단되었다. 실수로 몇 명의 계좌를 만들지 않아 월급이 지급되지 않아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 프로그램이 생기면 더 이상 오스만 제국 경제에 오류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2026년 6월 현재에도 경제 프로그램은 개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간간이 시스템 개혁으로 경제의 질이 좋아졌고, 2025년 4분기에는 가상국가 내 경제 활동량 1위라는 의미있는 기록을 달성하였다.

지리

유크라이네 남쪽에 위지해있으며, 대한민국의 크기와 비슷하다. 면적은 별로 넓은 편이 아니며, 미수복 영토까지 포함하면 대한민국의 3배 크기이나, 미수복 영토가 수복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산지가 거의 없고, 토양 환경이 좋아 농업이 자연스럼게 발달했으며, 예전부터 세계적인 곡창지대로 주목받았다. 사람들이 유럽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와 달리 스텝 지대에 가깝다. 또한 국토의 대부분이 흑토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전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비옥한 땅이다. 이는 노보로시야 지역이 오랜 세월 여러 민족과 국가에게 침입을 당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속하는 나라마다 주요 곡창 지대로서 기능해 오도록 했다. 흑해 연안에 있는 오데사(Одеса) 항구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유명한 영화 전함 포템킨(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의 오데사 계단 학살 장면이 찍힌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터널군인 오데사 카타콤베가 있는 곳이다. 길이만 2,500km 이상. 이 기록은 중국 서부 핵미사일기지인 지하 만리장성에 의해 깨진 듯하다. 지하 만리장성은 무려 5,000km 이상의 길이라고 한다.

교통

고속도로

소련 시절에 깐 고속도로를 그대로 활용중이다. 도로가 낡아 보수 공사가 필요하나, 정부에서는 고속도로 보수에 관심이 없다.

철도

철도는 에스지에프 철도공사라는 공기업에서 운영하고 있다. 도시철도로는 세바스토폴 지하철과 오데사 지하철이 있다.

항공

여객 항공사는 에스지에프 항공이 있다. 수도 세바스토폴에는 공항이 없으며, 최대 도시인 오데사에 오데사 국제공항이 위치해고 있다.

선박

주요 항만으로는 오데사 항구와 세바스토폴 항만이 있다. 두 도시는 모두 항구에 의해 발전했다.

행정 구역

행정구역명인구(명)면적(km²)청사 소재지
니콜라예프Николаев2,125,10153,059니콜라예프
오데사Оде́сса2,368,10733,310오데사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2,353,12926,945세바스토폴
자포로지예Запорожье2,377,33842,743자포로지예
드네프로페트롭스크Днепропетровск2,431,21216,354드네프로페트롭스크

교육

소비에트 체제의 평등 이념에 따라 전반적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이지만, 독립이후 경제난의 영향으로 교육재정 또한 어려워지게 되어 상당수 학교 폐교, 교사 직장이탈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과거 구소련식교육인 11학제에서 개혁 학제인 7-7 학제(14학년제)로 교육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는 교육 개혁을 실시하고 있다. 변경된 새로운 학제의 적용은 저등단계 2017년 9월 1일부터, 중등단계 2024년 9월1일부터, 고등단계는 2031년 9월1일부터 순차적으로 단행할 예정이다.

취학 전 교육(유치원)

  • 5~6세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취학전 교육기관으로 2010년 기준 해당 연령 아동 약 56%가 취학했다.

저중등교육: 에스지에프의 저중등 교육은 우리나라의 초-중-고등 교육에 해당한다

  • 저등학교:7세부터 13세(우리나라의 초등학교에 해당)
  • 중등학교:14세부터 20세(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에 해당)

고등교육: 에스지에프의 고등 교육은 우리나라의 대학 교육에 해당한다

  • 고등학교:21세부터 27세(우리나라의 대학교에 해당)

군사교육: 에스지에프의 군사 교육은 우리나라의 전역에 해당한다.

  • 군사교육:21세부터 29세(우리나라의 입대에 해당) 만약 중등학교에서의 성적이 하위 60%이거나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원하지 않을 시 고등학교가 아닌 군대로 전역해 9년간 군사 교육을 받는다. 고등학교 졸업자는 28세부터 29세까지 전역한다. 고등학교 상위 10% 우수 졸업자는 군사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된다. 군사 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에 관련된 것도 배운다고 한다.

정치

민주주의 지수가 10이라고는 하나 사실 종신집권 독재 채제이며, 국가 요직도 국가 원수가 임명한다. 제 8기 국가 의회 부터는 국민의 의견에 따라 국민이 투표하는 제 8기 총선이 2025년 2월 1일에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1.28 사태로 인해 2월 5일로 연기되었다. 또한 투표가 없을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최근에는 다수 민주화되었으며, 지도 위원장의 권한이 크게 줄어들었다.

국가 의회

국가 지도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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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F 자유국 역대 지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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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 지도위원회
못괜
고기
못괜
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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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누
제 2대 지도위원회
못괜
카엑
못괜
마포
못괜
네온
제 3대 지도위원회
못괜
고기
못괜
밀키
못괜
네온
제 4대 지도위원회
못괜
토리
못괜
밀키
못괜
플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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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제 5대 지도위원회
못괜
고기
못괜
밀키
못괜
네온
무소속
아리아
제 6대 지도위원회
못괜
네온
무소속
아리아
못괜
고기
제 7대 지도위원회
국가개발전선
넨네
국가개발전선
고신
국가개발전선
탐험트
제 8대 지도위원회
못괜
네온
못괜
고기
국가개발전선
무명
국가개발전선
페넨베르데
국가개발전선
넨네


다음은 제 7기 국가 지도 위원이다.

  • 세바스토폴:넨네국가 개발 전선
  • 오데사:탐험트국가 개발 전선
  • 니콜라예프:고신국가 개발 전선

국가 평의회

대선거

제 1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2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3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4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5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6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7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8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9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10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11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12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13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14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제 15대 국가 지도 위원회 선거

군사

12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잠입 또는 야전만을 주요로 해왔다. 6월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습 작전에 참여하였다. 또한 SGF 자유국 국방과학원은 인류제국에서 개발한 불법 프로그램이 아닌 합법적인 군사기술을 개발하였을 정도로 기술력이 높다. 군대는 3개 사단으로 나뉘며, 제 1사단은 지도자 근위, 제 2사단은 야전, 제 3사단은 잠입, 제 4사단은 공습의 역할을 가진다. 기술의 암흑기에는 모든 사단이 잠입의 역할만을 하기도 하였다.

전쟁 능력

인류제국이나 유토제국같은 강대국보다는 현저히 낮지만, 보편적인 국가보다 높은 정찰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중견국 중에는 양호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며, 무기를 소유한 몇 안되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작전 성공률은 평균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다. 김아론 제국, 대오스트리아합중국에 이어 대친인류 피해량이 반인류 내에서 3위이다.

무기 개발

SGF 자유국의 무기 개발 역사는 2025년 2월 중순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에스지에프 자유국은 후방에서 오스트리아 합중국과 협력하며 기습적으로 4개 이상의 친인류 국가를 공습하고 반인류 선언을 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불가능했다. 더 빠르고 효율적인 무기가 필요했다. 무기 개발 프로젝트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실용적인 무기는 그로부터 4달 후인 6월 말에야 개발된다. 이는 SGF 자유국의 반인류 선언과 2.26이 일어난 훨씬 이후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실용적인 무기를 개발할 역량이 부족했고, 2월에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평가된다.

프로토타입

SGF 자유국 국방과학원은 2월 말경, SGF 자유국 국방기술의 시초가 되는 프로토타입 무기를 개발하였다. 하지만 무기 시험 결과 이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였다. 이 무기의 공격 속도가 실제 사람보다 약간 빠른 수준이였고 오폭률 또한 굉장히 높아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고 보류되었다. 효율적인 무기 개발 실패로 2월 말의 대공습 계획은 파기되었다. 만약 후기 기술이 이때 발명되었다면, 친인류 세력은 초반부터 250명 이상의 사상자를 입고 전쟁에 참여해야 했을 것이다. 이때 SGF 자유국이 기술개발에 실패한건 친인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기술의 암흑기

SGF 자유국은 더 이상 이런 비실용적인 기술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고, 또한 SGF 자유국군에서는 친인류 보안 시스템에 대한 두려움으로 공격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집단 잠입 외에는 군대 잠입이나 위장국가 건국 등과 같은 유효한 명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6월부터는 잠입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술 혁신

6월 중순, 우연히도 SGF 자유국 휘하 모의전 방에서친인류 국가 베르니아의 수교 요청이 들어온다. 에스티는 당시 에스티는 하르시드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었고, 즉흥적으로 친인류인 것처럼 연기하여 실베르니아에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지난 한 달간 이루어지지 않은 군사활동의 제시작이였다. 또한 친인류의 보안이 그리 치밀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에스티는 베르니아에 유력하거나 주요한 정치인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였고, 베르니아의 여당인 기독민주당 국무총리 후보로 출마하여 2위로 낙선하였다. 에스티 본인은 낙선한줄 알고 좌절하였으나, 베르니아의 특수한 정치 제도 덕분에 혁신 총리로 당선되었다. 기쁨도 잠시, SGF 자유국은 80명 이상의 대형방에 대한 실전 경력이 전무하였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한 기술 또한 전무하였다. 프로토타입 무기의 사용이 잠시 고려되었으나 이를 이용한 공격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SGF 자유국 국방 과학원은 새로운 무기 개발을 추진한다. 6월 29일 오후 동안 SGF 자유국은 두 가지 종류의 무기를 개발했다. 첫 번째로 개발한 무기는 멘션 후 강퇴하는 방식의 무기였으니 적발 가능성이 높다는 이용으로 투입되지 않았고, 중지되었다. 두 번째로 개발한 무기는 인원 목록을 통해 강퇴하는 무기로서, 성능과 경우의 수를 개선되어 하루 만에 대승을 거두는 쾌거를 이뤘다. 6월 29일부터 6월 30일 새벽까지 7번의 시간 단축 및 오류 검수가 이루어졌고, 6월 30일 오전 7시 정각 베르니아 왕국에 사용하여 1분도 되지않는 찰나의 시간 동안 75명이 추방되고, 베르니아 공화국이 붕괴되었다. 이는 SGF 자유국 최초의 대규모 기습이였고, 6.30 베르니아 폭파는 반인류의 전황이 불리했던 절망스러운 6월을 종결시키고 김아론 제국과 프론제국 같은 여러 반인류 국가의 7월 공세의 시작을 알렸다.

법

현재 헌법은 아래 기술된 헌법이 아닌 공화국 헌법으로 변경되었다. 키이으리아 인민 공화국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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