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상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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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日本国 ┃ Japan
국기 국장
Flag of Japan.svg
Imperial Seal of Japan.svg
국가 정보
국가 기미가요

수도 도쿄 도
면적 377,973㎢
인구 127,185,000명(2018어림)
공용 언어 일본어
군사 조직 자위대
역사 정보
건국신화 기원전 660년 2월 11일
일본통일 1573년
GHQ 점령 1945년 9월 2일
국권 회복 1952년 4월 28일
정치 정보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양원제
단일국가, 의원내각제
천황 나루히토 孝德(고도쿠)
정부요인 아베 비자 총리(자민)
고이즈미 맹박 부총리(자민)
키리기리 쿄코 중의원 의장(입헌)
코로 부켄 중의원 부의장
(자민 , 자민)
이아란
경제 정보
경제 체제 혼합 경제
GDP(명목) 전체 GDP 5조 4,202억 $
1인당 GDP 38,282 $
공식 화폐 엔(JPY, ¥) (JPY)
기타 정보
ccTLD .jp
국가 코드 392, JP, JPN
시간대 UTC+9
가상국제연합 가입 미가입국
공식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위치
Japan on the globe (de-facto) (Japan centered).svg
Imperial Seal of Japan.svg

일본국(일본어: 日本国 니혼코쿠[*][1], にっぽんこく 닛폰코쿠[*]), 약칭 일본(日本, 일본어: 日本 니혼[*], にっぽん 닛폰[*])은 동아시아에 있는 국가다. 국토는 태평양에 있는 일본 열도의 네 개의 큰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과 이들 주변에 산재한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의 전체 면적은 37만7973 km²이며, 독일(35만7386 km²)과 비슷하다.[2]

6,85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3]인 일본은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4개의 섬이 일본 전체 면적의 97%를 차지하며, 대부분의 섬들이 화산 활동을 통해 생겨났다.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640만 명으로, 세계에서 11번째로 많다. 도쿄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간토 지방은 세계에서 가장 큰 메트로폴리탄이며, 이 지역에만 4,350만 명(일본 전체 인구의 34.4%)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의 일본은 1945년 포츠담 선언에 서명한 이후 1947년에 제정·시행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법적으로 성립된 국가이다.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고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상징적인 국가원수 역할을 하는 천황과 국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참의원(상원)·중의원(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가 공존하고 있다. 현재의 천황은 나루히토, 국회의 집권당은 자유민주당이며 내각총리대신아베 비자이다.

경제력은 명목 기준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네 번째로 크다.(2017년 기준) 또한 세계에서 네 번째로 수출이 많으며 다섯 번째로 수입이 많은 나라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부터 2010년 중화인민공화국에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20여 년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국내 총생산이 높았으며[4] 1993년 당시에는 룩셈부르크에 이어 1인당 명목 국내 총생산도 세계 2위를 기록하였으나 버블 붕괴 이후부터는 점차 하락세에 있어 현재는 20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일본은 선진국으로, 인간개발지수는 2015년 기준 세계 20위에서 2016년 세계 17위로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1위이다.[5] 또한 아시아 국가 중에서 G7에 들어가는 유일한 국가이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비록 일본은 헌법에 따라 군대 및 교전권을 포기하였으나 국토의 방위와 평화,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자위대는 현대적이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6] 유엔세계 보건 기구에 따르면 일본은 영아 사망률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낮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균 수명을 기록하고 있다.[7][8] 대졸자 초봉은 2010년 기준으로 약 235만엔으로, G7 국가 중에서는 가장 낮으며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다.[9]

역사

일본의 역사
하나국 선사시대.png
Circle Japanese Emperor.png
Circle Edo Shogunate.png
Circle JPN.gif
선사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죠몬 시대(縄文時代) 야요이 시대(弥生時代)
고분 시대(古墳時代)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나라 시대(奈良時代)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安土桃山時代)
에도 시대(江戸時代) 일본 제국(大日本帝国) 현대 일본(日本国)
세키가하라 전투 메이지 유신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군정기

고대

선사시대 일본 열도에는 죠몬인들이 살고 있었다. 죠몬인들은 수렵, 채집과 조잡한 농업을 경제기반으로 하여 살아가던 종족이었다. 이후 북방계 야요이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일본을 건국한 첫 천황인 진무 천황.

기원전 7~8세기경 국가가 성립되었으며 이 때 최초로 천황(덴노)라는 것이 등장했다. 첫 덴노는 진무(神武) 덴노이다. 죠몬인들은 일본 열도에서 1만년 이상 주류종족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나, 기원전 4~3세기경에 한반도와 중국에서 넘어온 야요이인들에게 숫적, 기술적으로 압도당하여 주류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야요이인들은 일본 열도에 선진화된 기술들을 이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쌀 농사와 청동기 등이 있다. 이같은 문명의 전파는 일본 열도에 농업을 기반으로 한 고대 부족국가가 형성될 환경을 조성하였다.

초기의 일본 역사는 큐슈 및 혼슈 서쪽에서 서서히 혼슈 동북부로 영향력을 넓혀간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왜국(倭國)은 이미 기원전 중국의 '한서'에서 그 국명이 등판하지만, 최초로 중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일본의 왕국은 야마타이국이었다. 야마타이의 여왕인 히미코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던 위(魏)나라의 천황인 조비에게 사절단을 보내 후한 대접을 받고 왜왕으로 책봉받았다. 이 야마타이국은 큐슈에 위치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큐슈 야마토론 떡밥의 주 소재가 됬으나, 지금은 혼슈의 키나이 지방에서 야마토가 출발했다는게 다수론이다.

키나이의 비옥한 평야를 기반으로 수립된 일본 최초의 고대 국가인 야마토는 주변의 잡부족국가들을 쓸어담아 세력을 확장한 후, 지옥불반도의 백제와 친교 관계를 맺고 긴밀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였다. 우호적인 외교적 관계를 토대로 양국 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백제로부터 대륙의 선진화 된 문화를 전수 받기에 이른다.

고대 헤이안의 도시구조

7세기 후반 일명 당나라 따라하기 유행의 영향을 받은 쇼토쿠 태자에 의해 다이카 개신이 단행되어 대거 수입한 중국의 제도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국가가 완성된다. 당시 일본은 수차례 수도를 바꾸다 결국 오늘날의 쿄토인 헤이안(平安)에 안착하게 되었는데, 헤이안은 당시 일본의 권력이 집중된 정치도시로 리즈시절 인구가 약 20만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따라하기 운동은 헤이안 시대 일본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국뽕적인 조류인 국풍(國風)운동에 의해 사그러들고, 9세기 말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과 안록사의 난이 일어나 중국 상황이 개막장이 되자 견수사, 견당사와 같은 견중국사절단 제도가 영구히 폐지됨으로 그 종지부를 찍게 된다.[10] 일본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력이 축소됨으로 인해 그 반동으로 고유 문화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헤이안 시대는 일본 문화가 그 아이덴티티를 확립한 시기이다. 일본의 고유문자인 가나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고,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인 '겐지 모노가타리'가 이 시대에 집필되었다.

헤이안 시대의 주역은 경쟁 가문들을 박살낸 후지와라 가문이었다. 후지와라 가문은 천황을 사실상의 바지사장으로 만들고, 중앙의 막강한 정치권력을 기반으로 전국에 '장원'이라 불리는 가문 사유지를 두고 이를 확장하였다.

이 장원제도는 일본이 대륙국가와 다른길을 걸어가는데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장원들은 물리적 거리, 그리고 교통상의 문제로 인해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그 관리권이 위임되었고 장원을 위임경영하면서 부를 획득한 지방 유력자들이 호위무사를 고용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사무라이의 기원이 된다. 또한 일본은 중국의 제도를 카피하면서 중국의 고유 사회제도인 양천제(良賤制)를 도입했지만 장원제도의 영향으로 양천제(그리고 노비제도)가 일본의 인문환경에 맞지않아 폐기되었는데 이 또한 지방권력의 강화에 그 원인이 있다.

중세

일본 최초의 쇼군 미나모토 요리토모

국가의 중앙집권체제와 강력한 지방세력의 공존이라는 모순적인 권력구조 상황은 헤이안 시대 일본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심화시켰고, 결국 장원체제 하에서 발달한 무사 계층이 12세기에 왕과 중앙귀족을 누르고 새로운 권력 집단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일본의 권력을 차지한 무사들은 천황과 중앙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헤이안의 기존 조정을 폐지하지 않고 존속시키는대신 무사들을 축으로 하는 또 다른 군사정부를 수립하였는데 그 군사정부를 '막부'라고 부른다.

최초의 막부는 카마쿠라 막부로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의해 설립되였다. 미나모토 가문은 절치부심 끝에 타이라 가문을 권력에서 밀어내고 일본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카마쿠라 막부는 그 권력이 미약하였다. 카마쿠라 막부의 실질통치력이 미쳤던 지역은 일본 동부의 일부 지역들뿐이었고, 대부분의 지역은 사실상 막부의 통치권력 바깥에 있는 지역유지들의 소왕국들이었다. 결정적으로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카마쿠라 막부의 재정이 소진되어 쇠퇴해버렸다.

카마쿠라 막부의 세력 약화를 감지한 조정의 고다이고 천황이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앞세워 막부에 황금 죽창을 선사하여 이를 멸망시켰으나, 죽창질의 선봉장인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통수를 쳐서 결국 고다이고 천황은 카마쿠라 막부와 함께 사이좋게 망하게 된다.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 고다이고 천황이 수도인 쿄토를 버리고 쿄토 남쪽의 요시노에 분조를 수립함에 따라 일본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조정이 둘로 나뉘게 되지만, 고다이고 천황의 분조인 남조는 얼마가지않아 아시카가에 의해 멸망 당하였다.

일본의 새로운 집권자가 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쿄토의 '무로마치'라는 곳에 막부를 세우는데, 이 막부가 '무로마치 막부'이다. 무로막치 막부는 일본 역대 막부들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정권에 속하는데, 이는 카마쿠라 막부를 창업한 미나모토 요리토모나 에도 막부를 창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달리 막부 설립자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자체세력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기반을 토대로 다른 지방충들에게 강제력을 동반한 영향력을 행사한 미나모토나 도쿠가와와는 달리 아시카가는 지방세력에 강제력을 행사할 능력이 종범이었기 때문에 지방세력과의 친밀도를 올리는 방식으로 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이 취약한 중앙권력 자체가 훗날 센고쿠 시대 도래의 원인이 되었다.

중국에서 명나라가 들어선 이래로 일본은 왜구문제로 인해 중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명나라가 조공무역제도를 도입함으로 인해 명나라와의 무역로가 막히는 사태가 일어난다. 중국의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타격을 받은 일본의 무로마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명나라에 조공을 하여 책봉까지 받고 감합무역을 하려고 사대를 하였으나 명나라의 일본 취급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중국에서 왜구활동은 지속되었다.

외교상황도 좋지 않았지만, 내부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상기한 대로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구조는 매우 취약하였고 결국 오닌의 난이라 불리는 지방충들의 세력다툼을 막부가 중재하는데 실패하여 국가는 사실상의 무정부상태에 빠졌고 이로 인해 전국에서 다이묘들이 미쳐날뛰게 된다. 이 각지에서 소규모 다이묘들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였던 시대를 전국(戰國)시대, 일본어로 센고쿠 시대라고 부른다.

센고쿠 시대에 영지 내 군소세력들을 잘 수습하고 두각을 드러낸 다이묘로는 오다 노부나가, 타케다 신겐, 우에스기 켄신이 있었다. 하지만 타케다와 우에스기가 사이좋게 병걸려 사망하여 라이벌이 사라진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심복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혼노지에서 배신을 당해 일본의 통일은 오다 노부나가의 심복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달성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저를 빠르게 얹기는 했지만 근본없는 똥수저 출신이었고, 라이벌인 은수저 출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의 빵셔틀 경력이 더 길다는 점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를 계승할 명분이 취약했었다. 실제로 도요토미가 노부나가가 남겨놓은 세력을 장악하자 동쪽의 도쿠가와는 분노했고 결국 양측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인 오다 노부카츠와 동맹을 했기 때문에 명분론적 우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지의 규모도 도요토미 직할령보다 도쿠가와의 직할령이 더 컸었고 실제로 도요토미 군과 도쿠가와 군이 맞붙은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군이 우세를 점하였다. 하지만 오다 노부카츠가 단독으로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자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에 대항할 명분을 상실하고 이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최대의 라이벌을 격퇴한 도요토미는 최후의 반항세력인 시마즈 세력과 후 호죠 세력을 정리하여 일본을 완전통일하였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세력권을 일본 열도를 넘어 대륙까지 확장하고자 본인의 최측근 다이묘들을 앞세워 조선과 명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이에 실패하고 본인은 병사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자 도요토미 가문은 그 세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는데, 이는 무로막치 막부와 마찬가지로 도요토미의 통치기반이 취약했고 사실상 도요토미 정권은 히데요시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의해 유지됬던 것이기 때문이다. 기회를 엿보며 칼을 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통수를 세키가하라에서 멋드러지게 치고 일본 동부의 칸토 평야에 위치한 도시인 에도에 막부를 건설하였다.

근세

에도 성 복원모형

에도 막부는 이전 일본 군벌정권들에 비해 훨씬 더 안정적인 통치체제를 갖췄다. 우선 일본 영토의 약 1/4이 도쿠가와 가문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통치가문의 자체권력이 막강했을 뿐만이 아니라, 오랜 군벌통치의 전통과 경험에서 유래한 정교한 제도들이 등판했기 때문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산킨코타이 제도가 있었는데, 산킨코타이 제도는 지방충들의 세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막부거점도시인 에도의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수 있는 제도였다. 여하튼 이러한 안정적인 통치기반 하에 250년간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 일본의 주력수출품이었던 미네랄이 고갈되고 이로 인해 나타난 사무라이 계층의 몰락문제나 기후변화로 인한 기근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막부의 위신은 추락하게 된다.

결국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개항시키기 위해[11] 군대를 끌고 강제로 문을 열어버리게 되자 천황파와 막부파의 내전을 거쳐 에도 막부는 망하고,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어 드디어 천황이 다시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근대

페리에 의한 개국으로 인해, 일본은 중화의 사대교린질서에서 벗어나 서양근대국제법질서로 편입하게 된다. 그 이후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내부구조 개편을 성공적으로 단행,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하게 된 일본이었지만 1868년 당시 일본은 삼류 후진농업국가에 불과했고 대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노무노무 많았다. 당시 일본엔 충분한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자본이 축적되어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간이 자체적으로 산업을 육성하기 힘들었고 이에 정부가 나서서 국영 산업을 육성하여 모범을 보인 후 국영기업들을 헐값에 (정부와 커넥션이 있는)기업가들에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산업을 육성하였다. 또한 오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해외로 사절단을 대거 보내 구미국가의 기술과 제도를 배우고 들어왔다.
당시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세력은 조슈번과 사츠마번 출신의 무사들이였다고 한다.

최초로 일본의 주력 수출품이 된 아이템은 실크였다. 1870년경 일본의 실크 생산량은 연 1000톤 수준이었지만, 40년 후에는 약 연 12,000톤을 생산하게 되면서 세계 1위 실크 수출국가가 된다. 일본의 상사들은 점차 영국과 미국 선사들을 따돌리고 대중국 무역에서 우위를 점해갔고, 산업의 쌀인 석탄생산량 증가도 연 두자릿수를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은 눈부신 국력의 신장을 근거로 일본 제국은 국제적인 세력권 다툼의 장에 뛰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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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전비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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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총 전비지출[12]
(A)
1년 세금수입[13]
(B)
A/B
청일전쟁 2억 3240만엔 1억 1843만엔
(1895년)
1.96
러일전쟁 18억 2629만엔 5억 3525만엔
(1905년)
3.41
1차대전 및
시베리아 출병
15억 5368만엔
만주사변 18억 8338만엔
2차대전[14] 2036억 3634만엔

류큐

류큐 왕국은 1609년 사츠마 번에 의해 복속된 이후로 줄곧 일본의 속국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류큐는 청나라의 속국이기도 하였다. 새로이 출범한 일본 제국은 류큐의 왕을 류큐의 다이묘로 격하시키고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에 청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발생하였으나, 대만 원주민에 의해 류큐 어민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일본 본국이 이에 시비를 틀고 대만에 출병하자 쓸데없는 외교문제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았던 청나라가 귀차니즘에 일본의 류큐지배를 용인해버린다. 결국 류큐를 둘러싸고 대결할 라이벌이 사라진일본 제국에 의해 류큐 왕실은 후작으로 봉해지고, 류큐 왕국은 폐지되어 오키나와 현이 된다.

조선

쇄국체제를 굳게 유지하던 중국과 일본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조선_왕조는 중국과 일본의 개방에도 불구하고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면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반서양정책에 의해 쇄국화된 상태였고, 일본은 페리 제독에 의해 개방된 후 한창 근대화되고 있었다. 일본은 운요호를 보내 조선과 의도적으로 시비를 틀게 한 후 이를 빌미로 강화도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조선을 강제로 개항하였고, 강화도조약을 맺음으로서 조선을 자주지방인 독립국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중국과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조선은 류큐와는 달리 청나라로서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선이 자주지방이 된다는 뜻은, 사대교린질서의 청 속방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므로 청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조선을 잃은 것이다. 반면 일본도 조선을 일본의 세력권에 편입시켜야 일본 본토의 안보를 확신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중국과 일본의 대결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청은 사대교린질서에 입각해 덩저우에 주둔하고 있던 화이군 육영 3,000명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청은 나약한 조선군대를 쉽게 진압하고, 대원군과 회담을 벌였는데, 회담을 벌이던 도중 우장칭은 대원군 납치계획을 완료하였고, 마젠종은 명령조로 사대교린질서를 거론하며 대원군을 납치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청이 조선을 보는 시각은 코메디스럽게도 근대 국제법질서에서 보는 종속국의 위치를 강요했다. 슈펠트 주청미국대사가 하도 사대교린같은 서양에 씨알도 안먹히는 개념을 조약에 삽입하지 말라해서 기존의 사대교린 질서가 아닌 근대 국제법질서에서 말하는 종속국(식민지)의 위치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후에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가 조선의 자국 주둔군 3000명 중 1500명을 차출해갔다. 이를 호기라고 생각한 일본은 조선의 개화파 일당을 사주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종의 계획에 의해 조선의 개화파는 쫓겨나고 일본에도 그 불씨가 떨어져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는 사건을 겪게된다. 하지만 일본은 이 사건을 외교 테이블로 끌고가 조선으로부터 배상금을 얻어내고 상시주둔군을 배치할 권리를 획득하는 한편, 조선에서 문제를 확장시키길 원치않던 청나라와도 텐진 조약을 체결해 중일간 대결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로부터 10년 후 조선에서 동학당이 대거 죽창을 들고 일어나자 버틸수가 없던 고종 정권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에 대규모 군세를 파병하였고 조선에 파병된 이들 양국군간 충돌이 일어나 결국 청일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 전쟁에서 근대국가 일본은 전근대국가인 청나라에게 승리했다. 심지어 일본 해군과 전력이 엇비슷했던 청국 해군도 일본 해군에 대패하고 청나라의 주력전함 중 하나였던 진원함은 일본 해군에 나포되어 버렸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와 조선간의 주종관계를 청산시키고 청나라로부터 2억냥의 배상금과 청의 영토였던 대만, 요동반도, 팽호열도를 획득했다. 이 중 요동반도는 중국에 눈독을 들이던 러시아가 칭구인 독일,프랑스를 꼬드겨 일본에 압력을 행사해 반강제적으로 중국에 반환시켰고 일본은 요동반도를 포기하는대신 3000만냥의 배상금을 추가로 획득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요동의 남만주철도를 원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적대관계가 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때 일본은 러시아에 비해 국력에서 열세였고, 러시아도 쓸데없이 동아시아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기에 양측은 조약을 통해 충돌을 완화하고자 했으나 양측간 의견차이로 번번히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 조선왕조의 정치에서는 일본과 손을 잡은 대원군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은 친러노선을 밟았는데, 일본은 후자 파벌이 러시아 세력을 조선에 끌여들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조선 내 친러파의 주축인 명성황후를 제거하였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고종은 라사(러시아)의 공사으로 파천하였고 역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고종은 러시아에 온갖 이권을 퍼주며 러브콜을 열렬히 보내어 일본의 심기를 자극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이러한 고종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고종이 퍼준 이권만 누린채 일본과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체결하여 대조선외교에서 일본과 조정모드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된 고종이 분노하며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자신이 조선의 황제임을 선포함으로 인해 일본과 고종과의 관계도 완화되게 된다.

그러나 대한제국 고종정권의 일관되지 못한 외교정책(박쥐외교)은 일본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에서 온건파가 강경파에 의해 실각하고, 실권을 장악하자, 그들은 어전회의를 열어 만주와 조선을 점령해야 된다는 모험주의적 노선을 주장했고, 그 노선의 일환으로 일본이 탐내고 있던 만주를 군사력으로 점거하고 조선의 용암포를 점령하자 일본은 안보에 중대한 위기가 도래했음을 통감했으나,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고자 만한교환론을 근거로 러일교섭을 벌이게 된다. 일본은 조선을 먹고, 러시아는 만주를 먹는다는 구상을 일본측에서 제시했으나, 러시아에서 "좆까, 다쳐먹을거야"하는 바람에 무산이되고, 결국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완공이전에 동아시아의 러시아 세력을 분쇄하기로 결의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뤼순 항에 있던 극동함대를 선제공격함으로 인해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러시아와 불화관계였던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밀어주었다.[15] 일본은 전비의 약 70%를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융자받았다. 반면 러시아는 전비의 약 60%를 독일과 프랑스의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받았다.

한 러일전쟁 만화

당시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언론 및 여론은 일본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뒤집고 일본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자 점점 러시아의 대외신인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과 프랑스의 금융기관들이 러시아에 대한 대출을 거절하자 러시아는 전쟁 자금줄이 막혀버렸다.[16] 그러나 일본 또한 전비지출을 심각하게 한건 마찬가지라 일본은 봉천 전투와 츠시마 해전에서 러시아군을 패퇴시킨 후 포츠머스 조약으로 전쟁을 종결지었다. 이 조약으로 배상금을 뜯어내지 못한덕에 협상단이 일본 국내에서 쌍욕을 먹었지만 그 대신 일본이 원했던 남만주철도를 확보하게 되었고, 부가적으로 남사할린과 조선에서의 세력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러일전쟁 승전 전리품 중 하나인 조선은 1905년 일본의 보호령이 된후, 1910년 일본에 합병되었다.

양차대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독일령 칭다오를 점령하고 중국에 21개조를 요구하여 1개조를 제외한 나머지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제국령 태평양 군도들을 할양받고 적백내전에 그 어떤 국가보다 길고 굵게 개입하였다. 그러나 별 소득없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였고, 칭다오도 곧 반환되었다. 당시 일본은 온건적인 민주주의 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관계도 일방주의보다는 협력주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가 일본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민권운동가들의 공로가 크다 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민권운동은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되어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그 결실을 맺었고 이로 인해 일본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들어선 민주주의 내각은 그 권위가 취약하여 꼰대들의 무시를 한몸에 받았고, 결국 시퍼런 관동군 장교들이 본국 의회를 쌩까고 자기네들끼리 중화민국의 만주를 침략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내각의 사태를 확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명령과 3개 사단의 증원부대 파병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의 정부지시없이 한 행동이 너무 성공적이었다는데 있다. 관동군은 병력규모상으로 만주의 중국군에 비해 열위에 있었지만 중국군에게 승리하고 1년 만에 만주를 장악하였다. 결국 일본 내각은 불가침, 주권존중의 협정을 중국과 맺게된다. 그 이후 장악한 만주에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었다. 어쨌든 이들이 한 행동이 너무 성공적이라 정부를 무시하고 군이 멋대로 움직이는, 군의 민관통제가 안되는 것이 일본제국의 전통이 되어버린다.

이렇듯 그 입지가 불안불안하던 민주주의 정부는 결국 1936년 청년장교들의 대규모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천황의 거부로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영향은 군부에 큰 인식변화를 일으켜 일본이 군국주의로 가는데 한몫하게 된다. 의회는 비록 존속되긴 했지만, 사실상 군부정권의 들러리가 되고 만다.

2차세계대전 중에는 중일전쟁을 벌이던 일본은 패망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에게 장제스 루트를 끊을 것을 약속받았고, 마쓰오카-앙리 협정으로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군 통행이 가능했으나, 군부들이 통킹지역의 진주를 단행한다. 그리고 일본 내각은 제국정책요강에서 소련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미국 역시 마찬가지지만, 미국이 참전하는 경우 추축국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이었고, 인도차이나를 계속 쳐먹는다는 것을 결의했다. 그것이 실행되자, 미국은 미국내 일본자산을 동결하기에 이르렀고, 2차 고노에 내각은 미국과의 전쟁을 회피하고자 친미파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대장을 미국대사로 임명했으며, 헐 국무장관과 교섭을 시작한다. 그러나 유럽 순방에서 돌아온 마쓰오카 외상은 지랄하고, 수정안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미국과의 협의를 무효화시키고, 소련과 맞짱까자는 나찌적 주장을 했다. 이런 미친놈을 해고하고자 고노에 수상은 총사직하고 3차 고노에 내각을 출범시켰다.

3차 고노에 내각은 도요다 데이지로 해군대장을 외상으로 임명했고, 통제불능한 군부의 남 인도차이나 진주가 결정되자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직접회담을 제의하게 이른다. 한편 히틀러는 일본이 미국과 짝짝꿍하는 것에 항의하였고, 독일이 계속 연합군을 좆바르자 교섭을 중지하였다.(;;) 이에 미국은 석유수출 중단과 루즈벨트 직접교섭을 사실상 거부했으며, 이에 일본은 제국국책수행요강을 9월 6일에 발표해 미,영국과의 전쟁준비 및 외교수단으로서 일본의 요구관철에 노력, 그 노력이 무산될 경우 개전을 결정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이에 고노에 내각은 일본정부의 방침을 미 정부에 제시했고, 미국은 헐노트를 전달했다.[17] 이 점에 관해 일본 육군은 존나 빡쳤고, 도조 히데키 육상과 고노에 수상, 도요다 데이지로 외상이 설전을 펼치다가 지친 고노에는 사표를 제출했다. 고노에와 도조는 황족을 수상으로 천거했으나 황족내각 형성에 반대로 도조 히데키가 수상이된다.


이윽고 군부정권은 구체적인 제국국책수행요령을 결정했고, 그 내용은 추축국과의 제휴강화, 인도차이나는 중일문제 해결시 철병, 미국의 인도차이나 진출 저지 및 미국의 일본 석유공급, 중일문제 불가침을 미국에게 요구한다는 상당히 정신병자적 내용을 결의했다... 그걸 받아든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대사에게 추축국 탈퇴, 인도차이나 철병안하면 공격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당연히 도조는 이를 거부하고 진주만을 공격한다.[18] 그리고는 자신들과 비슷한 집단인 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아시아-태평양 곳곳을 휘젓다가 결국 대규모 공습과 원폭투하로 인해 항복하고 몰락한다.

현대

비록 제국은 처참하게 멸망했지만 일본은 다시 일어섰고, 오히려 이전 시대에 비해 더 선진화된 사회로 진보하였다. 세계대전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기술력과 잘 교육받은 노동력, 1억에 가까운 인구는 일본이 부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빠르게 회복되어 1952년에 전전(戰前) 경제수준을 회복하였다. 50년대의 한국전쟁특수[19]와 인도산 저가양품의 철광석 수입특수로 인하여 일본 경제는 빠른 발전을 구가하였고, 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연합군 총사령부를 앞세워 전쟁의 원흉인 재벌들을 죄다 철퇴로 찍어버렸으며, 이 덕에 일본의 트러스트 자본주의는 붕괴되고, 새로운 기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 국민들도 전전(戰前)의 파시즘적인 국민에서 전후(戰後)의 보다 평화주의적인 국민으로 바뀌어갔다. 일본 정부는 미국과의 모의 하에 일본군을 부활시키고 핵 무기를 확보 및 미국과 동맹[20]을 체결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으나 이에 분노한 일본 국민들이 1960년에 대대적으로 안보투쟁을 일으켰고 결국 국민의 뜻에 굴복한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총사퇴함에 따라 재무장 계획이 백지화되기에 이르렀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주요국가들 중 유일하게 정식 군사조직이 없는 국가로 남아 있다.

안보투쟁의 영향으로 일본은 국가의 자원투자를 극단적으로 경제에 배분하게 되었고 이는 다른 분야에서는 문제점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국가의 경제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실보다는 득을 더 많이 가져왔고, 미국의 도움이 많이 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도시란 도시를 폭탄으로 쑥대밭을 만든 미군 덕에 일본에는 개발할 곳이 넘쳐났고, 강제적 재개발이 이루어져 수많은 투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국은 극동 소련 방어선으로 일본을 밀어주기 위하여 유럽에 행해진 마셜플랜과 유사한 자금 지원을 일본에 함으로서, 일본은 그 돈을 투자자금으로 쑥대밭이 된 전국토를 일으키는데 사용하고, 이는 전쟁수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성장에 기여한다.

그리하여 일본경제는 60년대까지 10%대의 고성장을 보였고, 70년대에는 경제가 성숙기로 진입하였다. 선진강대국 클럽인 G7에 창립멤버로 가입하였고 1969년에 서독을 제치고 자본주의 진영의 제2경제대국에 등극하여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제1경제대국 타이틀을 넘볼 정도로 성장하였다.

일본과 독일의 저환율 수출로 인한 급속한 성장은 다른 경쟁국들의 경계심을 환기시켰고 결국 미국 및 기타 주요 경제국들과의 플라자협정이 체결됨으로 인해 엔화 및 마르크 환율이 떨어졌다. 본래 240엔/달러였던 환율은 하룻밤 사이에 220엔/달러로 20엔이나 떨어졌고 1년 후에는 120엔/달러가 되었다.[21] 버블 붕괴로 인해 경제는 침체하고 되었고 부실채권이 급격히 늘어나 많은 은행들이 파산하였다. 단카이 세대의 은퇴라는 인구사이클 폭탄을 맞게 되었으나 일본의 정부와 사회가 이에 대한 대국적인 대처를 제대로 못함에 따라 장기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정권때 고강도의 개혁과 양적완화로 살아나는듯 했으나 리먼 쇼크로 일본은 또 한번 불황에 빠지게 되었고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한때 한물간 국가로 취급받게 된다. 하지만 이후 아베 비자의 집권과 비자노믹스라는 또 한번의 양적완화와 근본적인 구조개혁으로 일본은 장기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반등하게 되었다.

국토

일본 열도

일본 열도라고 불리는 네 개의 주 섬인 혼슈(本州), 큐슈(九州), 시코쿠(四國), 홋카이도(北海道)와 3000여개의 부속 도서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 도서로 분류되는 섬들 중 가장 큰 섬은 부속도서라고 하기엔 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 섬으로, 인구가 대략 150만에 이른다.

오키나와 섬은 류큐 제도의 일개 섬이다. 일본 남서쪽에 있는 제도라고 하여 난세이(南西)제도라고도 불리는 류큐 제도는 최대 섬인 오키나와 본섬을 주축으로 하여 오스미 섬, 토카라 섬, 아마미 섬, 미야코 섬, 야에야마 섬의 규모를 갖춘 섬들과 그 섬들의 부속도서들의 띠 형태를 이루고 있다.

혼슈 섬은 지옥불반도 면적보다 조오오금 더 크고 일본 인구의 약 80%가 거주하고 있다. 일본 열도의 중심 섬답게 도쿄, 오사카, 나고야의 3대 도시가 모두 이 섬에 위치해 있다.

인구가 두번째로 많은 큐슈 섬에는 일본 인구의 약 10%가 거주하고 있다. 최대도시는 후쿠오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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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토이용비율
2010년

삼림&녹지 농토 육수(陸水)
비율 67.1% 12.4% 3.5%
도로 건축용지 기타
비율 3.6% 5.0% 8.4%

면적은 홋카이도가 일본 열도에서 두번째로 넓다. (남한보다 조금 작다) 홋카이도는 일본 본섬들 중 가장 정착역사가 짧은 섬으로, 본격적으로 개척된 시기는 메이지 시대이다. 일본 열도는 전 세계를 대국적으로 볼 때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 속하나, 홋카이도 섬은 면적 제곱킬로미터 당 인구 수가 60명대로 식민화가 덜 이루어진 섬이며 자연생태계가 일본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섬으로 꼽힌다. 시코쿠 섬은 4개 본섬 중 가장 면적이 작고, 인구수도 제일 적은 섬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촌동네이자 그런 이미지를 가진 동네이지만 세토 연안에 접해있는 북부는 제법 도시화가 진척되어 있는 상태이며 본토에 비해서도 발전수준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일본 4대 섬은 모두 도로와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홋카이도는 세이칸 터널을, 큐슈는 칸몬 터널을, 시코쿠는 아카시 해협대교를 통해 혼슈와 연결되어 있다.

일본의 국토는 남북으로(토호쿠 지역의 경우 동서로) 협소한 지형의 중앙에 높은 산맥이 존재하여 지역을 다른 기후권으로 분할한다는 특성이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산맥으로는 중부 지방의 일본 알프스가 있다. 훗카이도 최북단에서 규슈 남단 가고시마 까지의 거리가 베이징에서 광저우 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길이는 은근히 대륙에 맞먹게 길지만 폭은 더럽게 좁다.

수도인 도쿄를 포함한 칸토(關東) 지역은 무려 4000만명이 살고 있다. 제 2의 도시[22] 오사카가 있는 칸사이(關西) 지방에 2300만명이 사는걸 생각하면 많은 인구가 도쿄에 몰려사는걸 알 수 있다. 특히 수도권에서 후쿠오카 권까지는 아우르는 일본의 태평양 연안 '태평양 벨트'에는 1억명에 이르는 인구가 거주하며, 도쿄에서 오사카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지역에는 전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거주하여 메갈로폴리스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태평양 연안권에 인구가 밀집해 있는 반면, 동해(日本海) 연안권은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일본의 20대 도시 중 동해 연안권에 위치해 있는 도시는 니가타 한 개 도시뿐이다.

이따금 수도권 집중도가 높은 국가 중 하나로 거론되곤 한다. 하지만 일본은 기본적으로 인구가 많기 때문에 도쿄 한 개 도시에 모든 국가적 기능이 몰빵된 수준까지는 아니다. 1990년대 이후로 도쿄 일극화 현상이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방의 오사카나 나고야, 후쿠오카 등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기후

일본의 기후대
쾨펜의 기후구분

일본 본토의 기후는 크게 태평양 연안지방 기후와 동해(일본해)연안지방 기후로 나뉜다.

태평양 연안지방은 태평양에서 흐르는 난류인 쿠로시오 해류 때문에 여름 기후가 정말 덥다. 반면 동해연안지방은 가장 더운시즌의 평균기온이 25도 수준으로 양호한 편이다. 동해연안지방은 설국(雪國)이라는 이명에 어울리게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하다. 여름 강수량도 적은편은 아니나 특히 겨울의 강설량이 엄청나서 많이 내리는 해에는 한달에 300mm 이상의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 외에 오키나와는 아열대기후이며(오키나와 본토 그 아래부터는 열대기후이다. 예시로 이시가키같은데는 일반적으로 낮은 기온이18도 이다.), 홋카이도는 대부분의 지역이 냉대기후이다. 홋카이도는 일본 본토와는 달리 여름이 시원한 대륙성 기후이며, 특히 홋카이도 남부는 겨울 기온이 그리 혹독하지 않으면서도 여름 온도가 대개 22~25도 선에서 유지된다.

겨울에는 한국보다 훨씬 따뜻하다. 기온이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는 북쪽지방을 제외하면 없다.

일본의 특수한 기후대로 세토내해(-內海)형 기후가 있다. 세토내해는 일본 열도의 혼슈 섬, 큐슈 섬, 시코쿠 섬으로 둘러쌓인 소규모의 지중해(地中海)로, 세토내해 연안지방은 남유럽-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지방의 기후와 유사한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남유럽의 특산품인 올리브 등이 이 지역에서 재배되기도 한다.

그 이외에 내륙 산간지대에 내륙형 기후권과 산간지형 기후권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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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후 및 강수량
1981-2010년 평균
단위: 섭씨(기온)/mm(강수량)
도시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연간[23]
삿포로
(홋카이도)
온도 고점 -0.6 0.1 4.0 11.5 17.3 21.5 24.9 26.4 22.4 16.2 8.5 2.1 12.9
저점 -7.0 -6.6 -2.9 3.2 8.3 12.9 17.3 19.1 14.2 7.5 1.3 -4.1 5.3
강수량 114 94 78 57 53 47 81 124 135 109 104 112 1,107
도쿄
(칸토)
온도 고점 9.9 10.4 13.3 18.8 22.8 25.5 29.4 31.1 27.2 21.8 16.9 12.4 20.0
저점 2.5 2.9 5.6 10.7 15.4 19.1 23.0 24.5 21.1 15.4 9.9 5.1 13.0
강수량 52 58 118 125 138 168 154 168 210 198 93 51 1,529
카나자와
(츄부/호쿠리쿠)
온도 고점 6.8 7.3 11.0 16.9 21.6 25.0 28.8 30.9 26.6 21.3 15.5 10.2 18.5
저점 0.9 0.7 3.0 8.2 13.1 18.0 22.3 23.7 19.5 13.3 7.7 3.4 11.2
강수량 270 172 159 137 155 185 232 139 226 177 265 282 2,399
쿄토
(칸사이)
온도 고점 8.9 9.7 13.4 19.9 24.6 27.8 31.5 33.3 28.8 22.9 17.0 11.6 20.8
저점 1.2 1.4 4.0 9.0 14.0 18.8 23.2 24.3 20.3 13.6 7.8 3.2 11.7
강수량 50 68 113 116 161 214 220 132 176 121 71 48 1,491
타카마츠
(시코쿠/세토 해안)
온도 고점 9.4 10.1 13.4 19.5 24.1 27.3 31.2 32.4 28.4 22.8 17.2 12.1 20.7
저점 1.6 1.8 4.4 9.4 14.4 19.3 23.6 24.4 20.7 14.2 8.5 3.7 12.2
강수량 38 48 83 76 108 151 144 86 148 104 60 37 1,082
카고시마
(큐슈/남부)
온도 고점 12.8 14.3 17.0 21.6 25.2 27.6 31.9 32.5 30.1 25.4 20.3 15.3 22.8
저점 4.6 5.7 8.4 12.7 17.1 21.0 25.3 25.6 22.8 17.5 11.9 6.7 14.9
강수량 78 112 180 205 221 452 319 223 211 102 92 71 2,266
나하
(오키나와)
온도 고점 19.5 19.8 21.7 24.1 26.7 29.4 31.8 31.5 30.4 27.9 24.6 21.2 25.7
저점 14.6 14.8 16.5 19.0 21.8 24.8 26.8 26.6 25.5 23.1 19.9 16.3 20.8
강수량 107 120 161 166 232 247 141 241 261 153 110 103 2,041

인구

인구는 약 1억 2,700만 명으로, 세계에서 열 번째로 많다. 인구가 많지만 땅이 커서 대한민국보다 인구밀도는 훨씬 낮다고 한다.하지만 체감 인구밀도는 한국의 몇배 이상이다. 합계출산율이 1.45인 저출산 현상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다만 체감인구밀도가 높아서 그런지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이 현상을 반기고 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위협을 느끼고 일본의 전문가들도 일본의 인구감소를 매우 걱정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본의 인구감소를 좋은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의 인구는 세계대전 종전인 1945년엔 7000만명 수준이었으나 전후 베이비붐으로 10년 만에 인구가 약 2000만명 증가한 바 있으며, 이후 완만한 증가세를 보여 2010년에 인구 1억 2800만여명의 고점을 찍고 감소세로 전환하였다. 현재는 매년 20만씩 감소하고 있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일본의 출산율은 1980년대 수준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고, 1990년대와 비교하면 오히려 증가한 수준이나 전전세대와 베이비붐 세대의 인생기한이 최근래에 도래하여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여 인구감소세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근본적인 원인은 저출산에 있기 때문에 이의 해결이 인구감소문제 해결의 중요한 키포인트임은 확실하다.

일본의 영아사망률은 전 세계에서 모나코 다음으로 2번째로 낮은 수준이지만 이가 인구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수준인데반면 가임여성인구의 수는 매년 전년비 0.5%~1%의 감소율을 보이기 때문에 신생아의 수는 매년 줄고 있다. 1970년대 초반 연 200만명이었던 신생아 수는 1990년 122만여명으로 떨어졌고 2014년엔 100만 3539명까지 떨어져 연 100만명 라인을 위협하고 있다.

일본의 신생아 수의 감소는 인구의 고령화 현상으로, 인구 고령화 현상은 유아인구비중 및 노동인구비중의 감소와 노년인구비중의 폭발적 증가로 귀결되고 있다. 1995년 일본 인구에서 유아인구와 노동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6%, 69.5%였으나 2015년에는 각각 12.5%, 60.7%로 줄어든 반면, 65세이상 인구비중은 14.6%에서 26.8%로 폭증하였다. 이와 같은 인구의 급속한 고령화는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것이다.

반면 2014년 기준 일본에 체재하고 있는 외국인의 수는 약 212만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5만명 증가하는 등 일본 내 외국인 인구는 증가세에 있다.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약 80%가 중장기체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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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적별 체류 외국인 수
2014년 말 기준[24]
국적 중국 한국+북한 필리핀 브라질 베트남 미국 페루 타이 네팔 대만 기타
인구 654,777 501,230 217,585 175,410 99,865 51,265 47,978 43,081 42,346 40,197 248,106
증감율 +0.9% -3.6% +4.0% -3.3% +38.2% +2.6% -1.3% +4.5% +34.3% +20.6% +7.8%

일본 인구의 외국인 인구 비중은 약 1.7%로 북미나 유럽의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낮은 편이다. 그러나 최근 일본 국내경기는 금융위기 직후에 비해 활성화된 데 반해 국내 노동력 공급은 이를 따라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본 산업계를 중심으로 외국인 노동력 수요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일본에서 외국인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앞으로도 증가할 전망이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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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회의석현황
(2019년 10월 21일 기준)

정당 참의원
의석수
중의원
의석수
여당 자유민주당 미정 303
공명당 미정 7
합계 미정 310
야당 입헌민주당 미정 126
일본공산당 미정 44
합계 미정 170
정원 미정 480

일본은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양 제도 공히 메이지 유신 시절부터 내려왔으며 과거 메이지 시대 당시에는 천황이 국가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권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이 존재하기도 하나 현대 일본의 입헌군주제 체제 하의 천황은 상징적 국가원수로서 자리잡고 있다. 천황에 관한 헌법조항인 일본국헌법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그 지위는 주권의 근간인 일본국민들의 총의에 의한다'[25]로 천황의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일본 헌법에는 국가원수가 누구인지에 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천황은 일본의 원수가 아니고 따라서 천황이 일본의 최고지도자가 아니라는 의견이 존재하나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이것도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다.)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일본의 최고지도자이자 원수라고 보아야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일본국헌법 제3조는 '천황의 국사에 관한 전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하며 내각이 (천황의 국사행위에 대한)책임을 진다.'[26]라고 규정하여 천황의 조건부 하의 국사(國事)행위를 인정하고 있다.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사행위'는 그 격이 높은 중대한 정치적 권한들로 총리대신(입법부-행정부의 최고위직)임명권, 최고재판관(사법부의 최고위직)임명권, 중의원 해산권, 헌법 개정권 및 법률, 정령, 조약 공포권 등의 권리가 포함되어 있는 개념으로, 사실상 국가원수와 같은 권한이므로 이와 같은 권한을 가진 천황이 국가원수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헌법조항은 천황의 국사행위는 내각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는 조건을 따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천황은 내각의 관할하에 있는 국가원수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하며 실제로 최소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천황이 국사에 직접관여한 사례는 없다.

현대 일본의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내각에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내각의 수장은 총리대신으로, 총리대신은 일본 국회에서 의원투표로 선출되므로 사실상 의회 다수당의 수장이 총리가 된다.

일본은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상원인 참의원의 정원은 250명, 하원인 중의원의 정원은 480명이다. 이는 영국의 양원의원 숫자보다는 적지만 미국의 양원의원 정원 수의 2배에 달하기 때문에 국회도 리스토라해야한다는 의견이 존재하는 한편, 미국은 연방제 국가이므로 비교대상이 못되고, 일본의 국회의원 1인당 인구수는 OECD 평균의 약 2배에 달해 국회의원 수가 많은게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행정 구역

일본은 1871년 전통적인 행정단위였던 국(國)과 번(藩)을 폐기하고 새로이 프로이센식의 현(縣)을 도입하여 국토행정의 최상위단위로 삼았다. 현은 초기 72개가 설치되었으나 합병과 폐지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47개의 도도부현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일본의 47개의 도도부현 중 일반 현은 43개이며, 이외 4개 현은 현(県)이 아닌 도(都),도(道),부(府)로 불리고 있다. 수도가 위치해 있는 도쿄는 도(都)이고, 그 영역규모가 다른 현들에 비해 유달리 크고 메이지시대에 본격적으로 개척되었다는 역사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홋카이도는 이 섬의 명칭과 마찬가지로 도(道)이며[27], 메이지시대 당시 일본 제2, 제3의 대도시를 핵으로 한 역사적인 중심지 오사카 부와 쿄토 부는 부(府)이다.

최근 일본 내에서 행정구역 통폐합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기존의 47개 현 체제 또한 통폐합하자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과거 47개 현 제도를 폐지하고 13개의 광역구로 기초자치단위를 재편하자는 논의가 존재하였으며, 최근에는 오사카 시장인 하시모토 토오루가 기존의 현 체제 아래에서 주요 현 중 하나인 오사카 부(府)를 주변 광역권을 합병하여 오사카 도(都)로 확장하자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일본일본의 도도부현
도(都)

도쿄도

도(道)

홋카이도

부(府)

교토부

오사카부

현(縣)

가가와 현

가고시마 현

가나가와 현

고치 현

구마모토 현

군마 현

기후 현

나가노 현

나가사키 현

나라 현

니가타 현

도야마 현

도치기 현

도쿠시마 현

돗토리 현

미야기 현

미야자키 현

미에 현

사가 현

사이타마 현

시가 현

시마네 현

시즈오카 현

아오모리 현

아이치 현

아키타 현

야마가타 현

야마구치 현

야마나시 현

에히메 현

오이타 현

오카야마 현

오키나와 현

와카야마 현

이바라키 현

이시카와 현

이와테 현

치바 현

효고 현

후쿠시마 현

후쿠오카 현

후쿠이 현

히로시마 현

도도부현의 하위행정단위로는 시(市), 정(町), 촌(村)이 있다. 시는 정령지정시, 중핵시, 특별시, 일반 시로 나뉘어지는데, 일반 시는 그냥 소규모 잡도시이며 규정상 인구가 4만을 넘어야 한다. 특별시는 모 반도와는 달리 인구 20만 이상이라는 그리 높지않은 조건을 충족하면 획득할 수 있는 행정적 지위이다. 특별시 상태에서 중요한 상업적 지위를 갖추거나, 혹은 인구 30만을 넘으면서 괜찮은 수준의 도시경제기반을 갖추면 중핵시로 승급할 수 있다. 정령지정시는 원래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만 지정된 최상급 도시 지위였으나, 높으신 분들이 하도 특례를 남발해대다보니 어느새 정령지정시 승격의 검토대상이 되기 위한 기본스펙요건이 인구 50만 이상까지 떨어진 상태이다. 정령지정시가 되면 구(區)를 설치할 수 있게된다. 현재 일본에는 20개의 정령지정시가 존재한다.

정은 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촌락이며, 촌은 그냥 말 그대로 촌이다. 최근에는 지자체간 합병이 활발해짐에 따라 많은 정과 촌들이 인근 주요도시들에게 흡수되어서 그 수가 과거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었다.

외교

일본은 과거 일본제국 시대부터 신중한 외교를 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임오군란 당시의 이토가 주도하던 외무부는 군부가 좌지우지하던 1940년까지 신중한 노선을 취했으며, 만주사변 이후에는 관동군의 침략질을 무마하느라 개고생한다. 또한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 중 하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주요5개국 중 하나로 굵직한 전후처리조약에 빠짐없이 참가했었던 일본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문민내각이 미국과의 전쟁을 끝까지 피해볼라고 했으나, 돌팍 도조 히데키가 군사내각을 열게 되고, 미국에 선전포고 후 패전하게 되며, 미국의 임시통치를 받게 되면서 그 외교적 위상이 밑바닥으로 추락한 바가 있다. 심지어 국제연맹을 대체하여 새로이 조직된 국제연합(UN)의 법에서 명기하고 있는 적국조항의 대상이 되는 굴욕까지도 겪었다.[28]

이러한 충격적인 외교적인 입지에 놓이게 된 일본이 국격의 제고를 위해 자본주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는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밀착노선을 채택한 것은 옵션에서 택한 선택이 아닌 필수선택지를 취한 것이었을수도 있다.

당시 미국 또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본주의 진원지로서의 일본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이러한 양국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양국은 (미국이 우위에 있는)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52년 미군정이 열도에서 철수한후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한지 23년만인 1956년에 UN으로 복귀에 성공한다.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하자 또 다른 초강대국인 소련 또한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소련은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대국인 중국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고 이에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당시 소련은 공식적으로 양국간 전쟁상태를 끝냄과 동시에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던 남쿠릴 4개섬 중 2개섬을 반환하고 영유권 갈등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소련의 이와 같은 제안을 두고 일본 내에서 남쿠릴 2개섬으로 만족하고 영유권 종식을 끝내자는 의견과 남쿠릴 4개섬을 다 돌려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했지만, 일본과 소련이 가까워지는걸 경계한 미국의 압력이 영향을 미쳐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진행형 문제로 남게 된다.

자유중국과 공산중국 문제 또한 미국이 닉슨 독트린을 내세우며 대만과 일방적으로 단교해버리고 중국과 수교하자 일본도 미국 뒤따라서 공산중국을 유일한 중국의 합법정부로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미국 응딩이 쫓아다니는 일련의 모습을 국제사회에 내비치면서 당시 제2,3세계 국가들과 데탕트주의 국가들로부터 미국 2중대라는 비아냥을 듣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2중대 포지션을 취함으로 인해 일본이 냉전상황 하의 심각한 방위비 부담을 미국에 전가시키고 경제성장에 집중하여 상당한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일본의 경제력이 미국을 위협할 수준이 되자 일본이 외교면에서 의존하던 미국이 오히려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서부터 일본 외교는 난국에 빠지게 된다. 이 시기부터 일본은 아시아 방면의 외교를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하는데, 한 일본의 언론을 이를 두고 '탈구입아'로 표현하였다. 일본은 제1세계 일변도의 외교노선을 어느정도 탈피하고 데탕트 세력들과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강화에 힘쓰게 되었는데, 일례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일본을 무려 40회나 방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으로 인해 강대국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면에서는 강대국들로부터 여전히 공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는 일본이 외국에 행사할 수 있는 두가지 주요 외교수단 중 하나인 군사력의 해외파병을 스스로 막은 탓이 크다. 1990년 걸프전쟁 당시 일본은 연합군 측에 재정원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경제대국이 병력을 전혀 안보내냐는 비난만 사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계에서 자위대의 해외활동 확대안이 심도깊게 다루어졌고, 결국 헌법의 선을 넘지않는 한도내의 자위대의 해외활동(UN평화유지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90년대에 일본은 경제패권국 지위를 노리는 위치에까지 올라 미국과의 외교적 대립이 한층 더 가열되었으나 90년대 중반 일본이 버블경제가 꺼지고 침체국면을 맞은 반면, 미국은 IT호황으로 날아오름에 따라 다시금 미국의 패권국 지위가 공고화되었고 미일관계는 21세기에 들어 코이즈미 정권과 미국 부시 정권에 의한 신 밀월관계를 맞이하게 된다.

군사

항공자위대의 주력기 F-15J
해상자위대의 이즈모급 헬기항모(혹은 헬기구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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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대의 전력[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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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기준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
무기종류 수량 함종 수량 배수량합계 기종 종류 수량
전차 690 구축함[30] 47 24만톤 F-15J/DJ 전투기 201
장갑차 970 잠수함 16 4만5천톤 F-4EJ 전투기 55
무반동포 2500 기뢰함 27 2만6천톤 F-2A/B 전투기 92
박격포 1100 초계함 6 1천톤 RF-4E/EJ 정찰기 13
야전포 500 수송함 11 2만8천톤 C-1 수송기 24
로켓탄 발사기 100 보조함정 30 12만6천톤 C-130H 수송기 15
고사기관포 50 KC-767 공중급유/수송기 4
육상자위대 항공전력 해상자위대 항공전력 KC-130H 공중급유/수송기 1
E-2C 조기경보기 13
기종 종류 수량 기종 종류 수량 E-767 조기경보관제기 4
LR-1 정찰기 1 P-1 초계기 9 CH-47J 수송헬기 15
LR-2 정찰기 7 P-3C 초계기 61
AH-1S 대전차 헬기 60 SH-60J 초계헬기 42
OH-6D 정찰헬기 48 SH-60K 초계헬기 44
OH-1 정찰헬기 38 MH-53E 소해/수송헬기 5
UH-1H/J 다목적헬기 131 MCH-101 소해/수송헬기 6
CH-47J/JA 수송헬기 55
UH-60JA 다목적헬기 36
AH-64D 전투헬기 11

현재 일본의 군사적 역량은 자위대라는 공식명칭을 가진 준군사조직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자위대는 공식적으로는 경찰조직이지만, 사실상 일본의 군대로 간주되고 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원래 일본의 군사력을 해체하려고 하였으나 공산주의 국가들이 동아시아 대륙에서 활개를 치는 상황이 벌어지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GHQ 주도하에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었다. 경찰예비대는 소화기로 무장한 75,0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동시기에 구 일본제국해군 패잔떨거지들을 규합하여 해상경비대를 조직하였고 이 해상경비대는 얼마 안가 경비대로 재편되었다. 이로써 육상의 경무는 경찰예비대, 해상의 경무는 경비대가 관장하는 체계가 완성되었고, 이를 관장하기 위한 정부기관인 보안청이 설치되었다.

그후 경찰예비대보안대로 리뉴얼되었는데, 1954년에 이들 보안대와 경비대를 합병하여 자위대를 발족시켰다. 두말할 것 없이 보안대는 육상자위대가 되었으며, 경비대는 해상자위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 제국군 시절엔 육군과 해군에서 분리되어있지않던 공군과가 독립하여 항공자위대가 추가됨으로써 오늘날의 자위대 체제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미 당국은 (명칭이야 어찌됬든)일본군의 부활 그 자체를 원했으나 60년대의 일본 안보투쟁의 여파로 미일상호방위협정 개정안이 좌절되면서 자위대는 전수방위조직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냉전 이후 1990년대부터 UN PKO활동에 자위대가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자위대의 활동범위는 일본을 넘게 되었고, 최근 아베 정권이 평화안전법제를 통과시키면서 다가올 2016년 5월 15일부로 일본 자위대는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여전히 일본국 헌법 제9조는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일본 자체적으로 특정국에 선전포고하는 등의 행위는 불가능하다.

현재 자위대의 장비현황은 위의 표와 같으며, 육전병력은 14만명 규모로 15개의 사단과 여단이 존재한다. 자위대는 비록 명목적인 숫자로 보면 주변국들에 비해 전투병력이나 병기의 댓수에 의해 열세인것처럼 보이나, 병기의 질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일례로 해상자위대의 함선 댓수는 137척으로, 중국 해군의 870척이나 대한민국 해군의 210척보다 적은것처럼 보이나, 해상자위대 함선의 90% 이상이 중대형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다 무장의 기술적 수준이 높기 때문에 대한민국 해군에 비하면 그 전력이 압도적이며, 중국 해군과도 전력이 비슷하거나 우위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제

전쟁의 영향으로 1인당 GDP가 100달러 이하였던 국가였지만, 1950년대 들어서 소련의 성장을 막기위해 미국이 일본에게 물자와 돈을 지원해줬고 한국전쟁때 미군,유엔연합군 군수물자들을 생산하게끔 하여 자연스레 일본의 경제는 성장하였고 1960년대 고도성장을 이룩할만한 발판을 마련하게된다. 1960년대 일본은 이케다 하야토 총리,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주도로 전세계 경제성장률 최상위권의 국가로 굉장한 고도성장을 이룬다.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전세계의 경제가 악화일로를 걷는 와중에도 일본은 1년을 제외하고는 전부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였고 1980년대에 1인당 gdp 1만달러를 돌파한다. 80년대까지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미국을 따라잡을 것처럼 보였지만, 주식,부동산 버블이 붕괴한 이래 대략 20년간 일본의 경제는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엔화환율이 달러=120엔대를 찍은 1995년에 일본의 GDP는 미국의 75% 수준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1990년부터 주가는 큰폭으로 하락했고 부동산은 1991년부터 하락세로 가고 있었다.

1997년 일본의 GDP규모는 무려 536조엔(한국돈으로 무려 5500조원에 달하는 규모이다.)에 달해 미국의 3분의 2에 근접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이후 일본의 경제규모는 20년간 하락하거나 정체되는 모습을 보여왔으며 2011년에 중국과의 경제규모순위가 역전됨에 따라 40년 만에 세계 제2의 경제대국 타이틀을 내려놓게 되었다. 2018년 현재 일본의 엔화 gdp는 530조엔으로 다시 성장중이다. 비자노믹스 실시 이후 gdp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회복을 넘어 확장 기세로 바뀌었다.

G7국가 국부 비교
국가 1인당 순자산[31] 최상위10%가
점하는 부의 비중[32]
미국 119,570유로 74.6%
일본 92,147유로 48.5%
캐나다 65,900유로 57.0%
영국 56,810유로 54.1%
이탈리아 47,400유로 51.5%
프랑스 43,420유로 53.1%
독일 42,050유로 61.7%

본래 일본에서는 버블붕괴이후 장기불황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러왔으나, 장기불황이 현재까지 이어짐에 따라 최근에는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용어가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비교적 많이 나오지 않는말이다.

'잃어버린 20년' 시기에 보인 평균소득 및 생산성 증가세의 정체는 불황도 불황이지만 인구구조의 변화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현재 일본인들의 평균 연간노동시간은 90년대에 비해 1/4이상 감소하여 현재는 OECD가맹국 평균 노동시간 이하수준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인당GDP 통계로 보면 일본의 생산성은 정체한 수준이지만, 노동인구 대비 GDP나 노동시간 대비 GDP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일본 경제가 20년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건 아닌 부분이다. 또한 서비스 생산성은 정체했지만 반대로 제조업 생산성은 G7 중에서도 1위를 찍었다.

일본의 설비투자추이

다만 장기적으로 볼때 일본 경제가 2000년대 초반정도면 모를까 80년대 경제동물로 불리던 위엄을 되찾을 확률은 0에 수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의 경제는 미국에 비해 뒤쳐져 있는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래도 통계적으로는 아직 서유럽 수준은 된다. 일본이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서비스업 분야의 급진적인 개선 혹은 확장적인 인구정책(=다문화 정책)이 필요하나 양쪽 모두 현재 상황 하에서는 요원해 보인다.

한편으로 설비투자의 해외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000년대에는 해외로 나갔던 제조기업들이 일본 국내로 U턴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그러한 기조는 사라졌다. 설비투자규모는 매년 매분기 소폭의 증감을 거듭하며 답보 중이며, 최근인 2015년 3분기에는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17년 최근에는 계속해서 일본으로 유턴하는 일본기업이 늘어나고있으며 역수입 비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무역

과학

문화

교육

사회 제도

종교

스포츠

  1. 이 소리의 정보듣기 
  2. 월드 팩트북 2005년판 미국 중앙정보국, 2005년 2월 15일
  3. Facts and Figures of Japan 2007 01: Land (PDF). Foreign Press Center Japan. 2009년 7월 4일에 확인함. 
  4. GDP - Million - Flags, Maps, Economy, Geography, Climate, Natural Resources, Current Issues, International Agreements, Population, Social Statistics, Political System
  5. UNDP. “UNDP human development report” (PDF). 2017년 4월 6일에 확인함. 
  6. 한국 '삶의 질' 세계 26위, 4년째 제자리 머니투데이, 2009년 10월 5일
  7. WHO: Life expectancy in Israel among highest in the world Archived 2010년 1월 15일 - 웨이백 머신 Haaretz, May, 2009
  8. United Nations World Population Propsects: 2006 revision – Table A.17 for 2005–2010
  9. http://www.taxcom.co.jp/snews/keiei/2010/2010_11/keiei2010_11_22_2.htm
  10.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중국 문화의 영향권에서 벗어난건 아니다. 에도막부 말기인 19세기까지도 일본에서 중국 문물 수입은 주류계층의 지지를 받아 활발히 이루어졌다.
  11. 당시 미국은 일본을 식민지화할 계획 자체가 없었다. 페리 함대가 일본의 개항을 종용한건 대중국 무역로 중간의 석탄보급항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12. 테이코쿠서원 DB
  13. 일본 재무성 DB
  14. 중일전쟁 포함
  15. 영국은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으로 근동에서는 흑해에서 일어난 크리미아 전쟁, 중동에서는 영국식민지를 통한 중동방어, 극동에서는 일본을 통한 러일전쟁을 지원하고 있었고, 미국의 경우 만주철도를 얻고싶어했으나, 러시아가 무작정 만주를 쳐먹는 바람에 그것이 무산될 판이었다.
  16. 결정적인 사건은 러시아 발트함대의 전멸인데, 이는 영국의 공작이 꽤나 먹혀들었다. 영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에 자금지원을 해주었고, 극동에 함대가 없던 러시아가 발트함대를 동아시아로 파견하는 동안 러시아에서 요청한 영국항구에서 석탄공급(아마 인도, 중동쯤이라 생각된다.)을 요구했다. 영국은 무시했고, 발트함대는 마다가스카르까지 가서 석탄을 공급받고 오는동안, 일본은 이탈리아에서 건조된 아르헨티나 소유 군함 두 척을 매입하여 영국 해군의 보호로 대러함대의 전력으로 포함시켰다. 그 이후 지칠대로 지친 발트함대는 동해(혹은 일본해)에서 전멸당한다.
  17. 1.모든 국가의 영토보전 및 주권존중 2.타국의 내정불간섭 3.통상기회균등 4.비평화적 방법에 의한 태평양 지역에서의 현상변경의 반대 그리고 일본군의 중국주둔이 불법적인 것이라고 인정할 것.
  18. 사실 기습이라고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1941년 12월 6일 시게노리 외상이 7일 오후 1시를 기하여 진주만 폭격을 미국에 전달하라는 전문을 주미대사관에 발송했는데, 노무라 대사가 그 문서를 받은 것은 미국시간으로 2시 20분이었다. 그래서 진주만이 기습공격이 된 것이다.
  19. 한국전쟁 연간특수규모는 당시 일본 GDP의 3.5% 규모 선으로 결정적인 요인 수준은 아니었으나, 경기회복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출처 : 미와 료이치, '일본경제사'
  20. 오늘날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상호방위'관계이지, '동맹'관계가 아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
  21. 그러나 플라자협정이 바로 일본경제에 직격탄을 때린건 아니다. 오히려 플라자합의 직후엔 일본 경제에 미친듯한 버블이 끼면서 (환율 변동에 의한 착시지만) 일본의 경제력이 몇십% 뻥튀기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때 이 버블에 취해서 환율 변동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는 커녕 갈라파고스화가 일어나 스스로 몰락하게 되었다.
  22. 광역권 기준. 행정구역 상 인구는 제 3위.
  23. 기온은 평균, 강수량은 합계
  24. 일본 법무성 DB
  25. (天皇は、日本国の象徴であり日本国民統合の象徴であって、この地位は、主権の存する日本国民の総意に基く)
  26. (天皇の国事に関するすべての行為には、内閣の助言と承認を必要とし、内閣が、その責任を負ふ)
  27. 율령시대 행정구역명의 잔재이다.
  28. 이 조항은 현재까지도 폐지되지 않고 남아있지만,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29. 출처 : 2018년 일본 국방백서
  30. 일본에서는 호위함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31. Allianz Global Wealth Report 2014
  32. Credit Suisse Wealth Report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