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이씨

고려 재상지종 15 가문
경주 이씨 | 慶州 李氏
설립년도 미상
관향 동경 계림부
시조 이알평
중시조 이거명
주요인물 이원보
이채도
인경현비
이입헌
이예
이주형
이옥영

개요

동경 계림부를 본관으로 하는 고려의 성씨. 천 3백년 역사에 빛나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중 하나로서 신라 6성에 속한다. 예전에는 동경의 옛 이름을 따라 월성 이씨(月城李氏) 또는 계림 이씨(鷄林李氏)로 불리기도 하였다.

역사

신라 초기(고대)

경주이씨는 전통적으로 신라 왕실 계통에서 분파된 성씨로 전해진다. 다만 신라 초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본관·성씨 체계가 명확히 정립되어 있지 않았으며, 박·석·김 3성 왕통을 중심으로 한 지배 구조 속에서 귀족층 내부의 혈연 집단이 점차 성씨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시기의 경주이씨에 대한 기록은 사료적으로 구체적이지 않으며, 후대 족보와 가전(家傳)을 통해 왕실 또는 진골 귀족 계통과 연결되었다는 전승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신라 초기 단계에서의 경주이씨는 실질적인 문벌 가문이라기보다는, 왕경(王京) 귀족 사회 내부에서 성씨 체계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 속에 위치한 집단으로 이해된다.

신라 후기(통일신라)

통일신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골품제 사회는 점차 문벌 귀족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성씨와 본관을 기반으로 한 가문 의식이 뚜렷해졌다. 이 시기 경주이씨는 경주 지역을 본관으로 삼는 진골 귀족 계열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해진다. 9세기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 세력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존 귀족 가문들은 중앙 정치 기반을 유지하거나 지방 세력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하였다.

신라가 935년 멸망한 이후에는 다수의 신라 귀족 가문이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경주이씨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려 초기 관료층으로 이어졌다는 계통 인식이 존재한다.

고려 초기

신라 멸망 이후 경주이씨는 다른 신라계 귀족 가문들과 마찬가지로 고려에 편입되어 관료층으로 재편되었다고 전해진다. 태조 대에는 신라계 인물을 포섭하는 정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경주 지역 기반의 유력 가문들 역시 중앙 정치 질서 안으로 흡수되었다.

초기에는 두드러진 최고위 관직자보다는 향리·중하급 문관층에서 활동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승에 따르면 고려 초에 활동한 인물로는 경주 출신의 문신 이원보(李元甫)가 있다 전해지는데, 그는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지방 행정 실무를 맡아 신라계 유력층과 고려 조정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의 후손 가운데 일부는 과거제 시행 이후 점차 중앙 관직에 진출하며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전한다.

고려 중기(문종 세가)

고려 중기에는 문종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며 여러 인재를 들였는데 경주이씨의 이채도 또한 천제공과 함께 중서문하성의 재신이 되었다. 이채도의 아내 국대부인 임씨가 무녀라는 이유로 조정에서 외명부 작위 책봉을 막자 가문일원들이 만월대로 찾아가 인예왕후에게 아뢰 작위를 받았고 그 소식이 조정과 경시거리에 많은 소문으로 퍼지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의 자신의 딸 인경현비가 왕실로 시집가 훗날 그녀의 3대가 왕후에 책봉[1]되어 가문의 위세는 더욱 드높아졌다.

작금의 경주이씨

선종재위기 이후로 경주이씨는 큰 대외적인 활동을 보이지 않음은 물론 거의 백여년간 어떠한 행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건 15대 예종 재위기로 , 만호 이입헌이다. 당시 이자겸과 한패였던 윤관의 조카인 윤명하와 혼례를 올려 가문의 위세를 다시 쌓나 싶었지만 윤관이 왕실능멸죄로 팽형에 쳐해지고 가문이 멸문당할 상황에 놓이며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들 이궁예가 팔표방을 통해 태의감에 봉해지니 이궁예이다. 당시 유행하던 역병을 치료하는 약을 치료하며 큰 활약을 했고 이궁예의 아들인 이주형이 금상과 수비 곽씨의 장녀인 화순택주와 혼인하며 왕실의 외척이 되었고 그의 두 아들이 팔표방에 지원해 이번에 어떤 결과릉 가져올지 많은 기대를 불러오고 있는 상황이다.

인물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