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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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제6대 국왕 성종ㅣ成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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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961년 1월 15일 |
| 고려 서경 평양부 명복궁 | |
| 즉위 | 981년 8월 13일 |
| 고려 서경 평양부 명복궁 정전 | |
| 사망 | 997년 11월 27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천덕전 | |
| 능묘 | 강릉 |
| 재위기간 | 고려 정윤ㅣ개령군[1] |
| 981년 8월 11일 ~ 981년 8월 13일 | |
| 고려 국왕 | |
| 981년 8월 13일~997년 11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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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강릉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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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묘가 찬술하여 말하기를,
"성종(成宗)은 태묘(太廟)를 세우고 사직단(社稷壇)을 설치하였으며, 교육 재정을 확보하여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覆試)를 시행하여 어진 이를 구하였다. 지방 수령을 독려(督勵)하여 백성을 구휼(救恤)하였고, 효자(孝子)와 절부(節婦)에게 선물을 하사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매번 손수 써서 내린 편지마다 말뜻이 간곡하였으며 백성의 풍속을 올바르게 바꾸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북쪽에 거란(契丹)이 우리나라를 집어삼켜 씹어 먹을 뜻이 있어 장수를 보내 침략해오자, 일찌감치 서경에 가서 안북부(安北府)까지 진군(進軍)하였으니 곧 구준(寇準)이 전연(澶淵)에서 보인 계책(計策)이었다. 당시 방어선을 절령(岊嶺)으로 옮기고 쌓아둔 곡식을 대동강(大同江)에 버리려고 하였던 것은 당시 어리석은 신하들의 의논일 뿐이지 반드시 성종의 본래 뜻은 아니었다. 일찍이 만일 최승로(崔承老)의 글을 보고 기뻐하며 그 뜻을 풀어보았다면, 허상(虛像)을 버리고 실질(實質)에 힘쓰며, 옛 것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이치를 구하고, 행함에 게으름이 없으면서 빨리 가고자 함을 경계하며,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얻어 자기로 미루어 남에게 이를 수 있고, 제(齊)가 변하여 노(魯)에 이르고 노가 변하여 왕도(王道)에 이르렀던 것을 바랄 수 있었다. 소손녕(蕭遜寧)이 다투어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지 않는다는 무함(誣陷)으로 명분 없는 군대를 일으켰겠는가? 이지백(李知白)이 어찌 감히 고유의 풍속을 고치지 않는 것을 적을 물리치는 계책으로 삼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아직 채 늙기도 전에 후계자를 세운 것은 국가를 위한 생각으로 가장 잘한 일이었으며, 죽음에 다다라서도 사면령 내리기를 아낀 것은 사생(死生)의 이치에 통달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른바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불어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아아! 현명하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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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6대 국왕
휘는 치(治), 자는 온고(溫古)이다. 여러 유교 제도와 예법을 도입하였으며 2성 6부제를 도입하여 중앙정치제도가 잡혀있지 않아 혼란스럽던 고려 초기 사회를 진정시켰다.
묘호와 시호
생애
성종은 대종(戴宗) 왕욱과 선의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왕과 모후를 모두 여의어, 두 여동생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와 함께 할머니 신정왕후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다.
훗날 경종이 중병에 시달리며 정사를 돌보지 못하고 향락에 빠져 지내게 되자, 당시 그의 아들 왕송(훗날 목종)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갓난아이에 불과하였다. 이에 경종은 종실 가운데 총명하고 덕망이 높던 성종을 차기 계승자로 삼고 정윤 개령군(開寧君)에 봉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종은 다음과 같은 유구를 남긴 채 왕위를 성종에게 전하고 붕어하였다.
"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치(治)는 나라의 현명한 친척이며 내(予)가 아끼는 자다. 그는 반드시 조종(祖宗)의 대업(大業)을 받들고 국가(國家)의 창기(昌基)를 보호할 것이다." — 경종의 유구 중
그리하여 성종은 고려의 제6대 황제로 즉위하여 새로운 치세를 열게 되었다.
재위
내치
유교식 예법 도입
성종은 즉위 직후부터 유교적 제도와 예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이는 선왕들과 달리 “검소함이 곧 백성을 살리는 길”이라 여긴 성종의 정치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종은 재위 초기에 팔관회와 연등회를 완전히 폐지하였다. 당시의 불교 행사는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한번 개최되면 짧게는 열흘 가까이 이어질 정도로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었다. 성종은 이를 국고를 탕진시키는 폐단으로 보아, 재위 기간 동안 대부분의 대규모 불교 행사를 중단시켜 국가 재정을 절약하고자 하였다.
한편 성종은 고려가 천자국(天子國)으로서의 위엄을 갖추도록 여러 제도 또한 정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환구단의 설치였다. 본래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중국 황실에서는 익숙한 시설이었으나, 고려에서 유교적 예법에 따라 이를 정식으로 설치하고 숭상한 것은 성종 대가 처음이었다.
이후 성종은 사직단을 세워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고, 태묘를 정비하여 오묘제(五廟制)를 실시하였다. 흔히 천자국은 칠묘(七廟), 제후국은 오묘를 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중국 중심의 예제 질서에서 비롯된 관념에 가까웠다.
성종이 오묘제를 택한 것은 단순히 제후의 예를 따른 것이 아니라, 지방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또한 실제로 칠묘제를 시행한다 하더라도 이를 온전히 채운 국가는 드물었기에, 성종은 형식보다 국가 운영의 실리를 우선시하였던 것이다.
남궁희진의 난 제압
자세한 내용은 남궁희진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운영부 건립 3주년을 기념하는 연회가 개경 국가행사장에서 성대히 열리고 있었다. 수많은 신료들과 그들의 처자식들이 자리를 함께하며 연회를 즐겼고, 성종 또한 문하시중 황보제공에게 축문을 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행사장 한복판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로 인해 수많은 신료들이 죽거나 팔다리를 잃었으며, 청력을 상실하거나 시력을 잃었다. 강가에서 축제를 즐기던 외명부 부인들은 놀라 달아나다 강물에 빠져 휩쓸려갔고, 이를 틈탄 불온한 무리들이 만월대를 습격하였다.” — 《고려사》 〈성종본기〉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는 공부상서 유마의 처이자 정당문학이었던 남궁희진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녀는 왕실 시위군이 행사장 혼란 수습에 발이 묶인 틈을 노려 사병을 이끌고 만월대를 기습하였다.
남궁희진의 목적은 성종의 왕후인 문덕왕후를 납치하여 왕실을 협박하는 데 있었다. 소식을 접한 성종은 크게 노하여 박수연·설묘·황보제공 등을 직접 거느리고 만월대로 향하였고, 치열한 추격 끝에 남궁희진을 생포하였다.
격분한 성종은 그 자리에서 직접 남궁희진의 목을 베어 처형하려 하였으나, 곁에 있던 신료들이 극구 만류하여 겨우 이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군편제 개선
남궁희진의 난이 있은 뒤, 성종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제의 정비가 시급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에 그는 기존의 군사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수도 방위를 전담하는 중앙군인 2군 6위(二軍六衛)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이군은 궁성과 황실을 호위하는 친위군의 역할을 맡았으며, 육위는 개경과 그 외곽을 방비하며 유사시 반란과 외침에 대비하였다. 성종은 군권을 왕실 직속으로 강화함으로써 지방 세력의 사병 의존을 줄이고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훗날 이군육위는 여러 차례의 변란과 외침 속에서도 황실과 수도를 지켜내며 고려 왕실의 안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3]
2성 6부제 도입
... 성종이 크게 제도를 새로 만들어 내외 관직을 정했다. 중앙정부엔 성, 부, 대, 원, 시, 사, 관, 국이 있었고, 지방제도엔 목, 부, 주, 현이 있었다. 관위에 계급과 정원이 있으니 일대의 제도가 준비되었다. 문종, 예종이 비록 조금씩 증감했지만 대개 성종의 옛 제도를 이은 것이니 자손이 서로 지켜 왔다. ... — 《고려사》 〈성종본기〉
고려 초기에는 태조가 신라 및 태봉의 제도를 섞어 만든 6관제를 사용했다. 광평성, 내의성, 내봉성이 있었고, 내봉성 밑에 6관이 설치된 모습이었는데 성종이 당의 3성 6부제를 변형한 2성 6부제로 대체했다.
성종이 만든 2성 6부, 중추원-중서문하성 양부 체제는 조금씩 바뀌지만 전체적인 토대를 유지한 채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방 제도 도입
고려는 초대 태조부터 5대 경종까진 기존 신라의 지방 제도를 사용했다. 제6대 성종은 중앙정부의 지배력 강화와 더불어 지방 호족의 독립성을 누르기 위해 재위 14년 차인 995년에 대대적인 변혁을 일으켰다. 바로 10도(道)와 12목(牧)의 제정이었다.
지방 관제의 최고 단위인 도(道)는 성종이 도입한 이후 조선 왕조, 대한제국에 이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된다. 참고로 '도'는 원래 당나라의 제도로 성종이 당제를 수입한 뒤에 고려의 자연지리에 적합한 광역 단위에 맞춰 개조한 것으로:
- 관내(關內)
- 중원(中原)
- 하남(河南)
- 강남(江南)
- 영남(嶺南)
- 영동(嶺東)
- 산남(山南)
- 해양(海陽)
- 삭방(朔方)
- 패서(浿西)
총 10개 도를 만들었다.
10도 아래에 대도시를 선정해 목(牧) 12곳을 두어 목사를 파견했는데 이는 위 군대 재편과도 연관된다.
물론 성종의 지방제도 개편은 12목을 설치함으로써 고려는 지방관 체계의 기틀은 잡았으나, 고려 왕조 내내 지방관이 파견된 곳보다 아닌 곳이 많았던만큼 바둑에서 포석 깔듯 12구역에 걸쳐 임시로 체계를 다진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고려는 여전히 호족들의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에 이 지방관들의 권한도 매우 약했다. 고려의 지방관은 기껏해야 외침이 있을 때 군령권 정도나 발휘하지 행정권이나 사법권은 여전히 지방 토호인 호족들이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외치
제1차 여요전쟁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여요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붕어와 유조
여요전쟁 당시 서희를 보내 소손녕과 담판하게 하여 거란군을 물러가게 한 이후, 성종은 오래 앓아오던 소갈의 증세가 더욱 깊어져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태의감 안씨가 “송으로 건너가 새로운 치료법을 구해오겠다” 아뢰자, 성종은 잠시 침묵한 뒤 다음과 같은 유구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아, 인간의 삶이란 이토록 덧없고도 아름다우며, 또한 허망한 것인가.태조대왕께서 일찍이 이르시기를, 인생은 뜬구름과 같이 흘러가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제 나 또한 그 한 조각 구름이 되어 떠나가려 한다.
내가 죽거든 왕후는 더 이상 궁에 머물지 말고, 개경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남은 생을 살아가도록 하라.”
숭덕궁(崇德宮)[4]의 적남(嫡男) 송(誦)은, 태조영손(太祖令孫)이자 과인(寡人)의 유자(猶子)[5]이다.
어려서부터 바름(正)을 길러냈고 빼어난 재주를 가졌다. 덕을 키우는데 있어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 이미 성인의 그릇(成人之器)을 가졌다.
옛 일을 떠올리고 되뇌이니 친족을 아끼는 것은 백세(百世)의 양규(良規)이고 어린 친족을 보다듬는 것은 5상(五常)의 아지(雅旨)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감히 소봉(疏封)[6]함을 아낄 수 있겠는가? 곧 아름다움을 펼칠 것이라 믿고 오늘을 시작으로 은혜를 내리겠다.
"존경하라! 진중하라! 내 명령을 저버리지 말라." — 성종의 유조
이 말을 마지막으로 성종은 숨을 거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