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

Ejisu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7월 15일 (일) 21:38 판
월본국
月本国 | Wubon
월본국 국기.png
월본국 국장.png
국기 국장
Wubon world map.png
지리 ·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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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도유수도시 사실상
최대도시 도유수도시
면적 약 384,239km²
1급 행정구역 1부
2급 행정구역 1수도시, 1주, 50군, 1도
3급 행정구역 -시, 1자치시, 7현,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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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약 138,258,000명 설정상
약 250명 회원수
공용어 월본어 설정상
한국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종교 없음 정교분리
군대 국가군방위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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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다당제, 양원제
국황 마사미 제50대 / 傾縄
정부요인 내각총리대신 윤교익 제22대 / 월본유신회
내각부총리대신 한현승 월본유신회
국회의장 (공석)
최고재판소장 (공석)
선거관리위원장 엘마르 욘 무소속
여당 월본유신회.png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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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전체 $ 4,811,378,400,000
1인당 $ 34,800
신용등급 무디스 A1
S&P A+
Fitch A
화폐 공식 화폐 원(円)
ISO 4217 WBW
시간대 도메인 국제 전화 국가 코드
UTC+9 .wb, .月本 +83 WB, WBN
법정 연호
게이조(傾縄) (경승 / 2022年 1月 22日 ~ 現在)
웹사이트
네이버카페 로고.png

월본국 (일본어: 月本国 가츠혼고쿠[*]), 줄여서 월본 (일본어: 月本 가츠혼[*])는 서태평양 마리아나해 해상에 위치한 도서국가로 인구는 약 1억 830만명이다.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왕국으로, 수도는 사이쿄이고 영토는 서태평양 마리아나해 인근에서부터 동북쪽으로 나열된 5개(주곤, 다난, 관본, 마전, 북양도)의 월본열도로 이루어져 있다. 월본은 한국계와 일본계가 혼합된 국가이지만 한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월본으로써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엄연히 한국이나 일본과는 별개의 문화권임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월본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뛰어난 경제력과 기술력을 보유한 선진국이며,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룬 국가이며, 많은 대기업이 소재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통화는 월본 엔을 사용중이며, 약 1000 월본 엔이 1 미국 달러와 비슷한 수준의 환율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월본은 1945년 시드니 조약으로 지위와 정체성을 확립하였으며, 왕실이 입헌 군주직을 세습하는 입헌 군주국이다. 국회는 총 300석의 단원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자유민주당과 새정치미래연합의 양당이 정계를 주도하는 사실상의 양당제 형식의 정치가 운영되고 있다. 현 천황은 1977년 즉위한 EJISU이며, 총리는 2018년 2월 3일 취임한 자유민주당 소속의 구창모이다. 현재 월본은 도보리 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 성장을 통하여 세계 4위의 경제대국 지위에 올라와 있다.

월본은 일본을 모티브한 가상국가로서 철도와 IT강국으로 발전하고 있다. 수도 사이쿄는 도쿄를 기반으로 기획, 도쿄와 서울을 재구성하였으며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 그 특징적인 부분이 잘 나타나있다. 철도강국인 만큼 가상국가 최초 지하철, 철도노선을 시뮬레이션으로 그대로 옮겨와 실제감을 살렸으며 전국토와 지명이 모두 창작되었다. IT분야에서도 소쿄국제전시장에서 상설박람회를 열고 있으며 많은 IT기업이 월본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국가 상징

국호

역사적으로 '월본'이라는 어원은 왜의 상인단이 발견한뒤 그 존재를 보고하지만 허구로 여기며 왜의 이상적인 나라로 '달의 영토'로 불리게된것이 오늘날의 '월본'이다. 역사적으로 월본열도에는 남백제, 월본왕국, 전월본제국이 존재했다. 카페월본에서 한동안 '전월본국'으로 사용했지만 이는 과거 전월본제국(全月本帝国)시대의 잔재이다. 현대에는 '월본', '월본국'으로 불린다. 영문 명칭은 '월본'의 서양상인 발음인 유펀(Jupon)에서 유래되었다.

  • 공식 명칭 : 월본
  • 영문 명칭 : WUBON
  • 다른 표기 : 월본국, 月本, ウホン

국기

공식명칭인 월의청세기는 달의 상징으로 흰색 배경에 파란색 원이 그려진 국기를 사용한다. 달의 푸른 기(氣)를 의미한다.

국장

월본의 상징화(花)인 백일홍을 본따 만들어진 황실 국장으로 백일홍표국장이 사용된다.
국가공식 국장으로는 백일홍표국장이 사용되지만 황실국장으로는 각 천황마다 부여되는 고유 문장이 사용된다.

역사

선사시대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인 빌레못굴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인간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시기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7만~8만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빌레못굴’ 유적이 있다. 이 빌레못굴 유적에서는 타제석기와 함께 오늘날 남중국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동물의 뼈가 발굴되었다. 이 동물 뼈의 발견은 옛날 월본 제도가 오늘날과 같이 섬으로 되어 있지 않고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연륙설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유제에서 가장 오래된 호선지 선사유적이 있으며, 이외에도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월본은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던 섬이였던 관계로, 중국, 한국, 일본 등의 타 국가들에 비해 발전이나 국가 수립이 늦었으며, 6세기까지도 성곽 시대가 이어져오며 문명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며 소규모 부족들이 서로 다툼을 계속하던 시기가 이어졌다.

남백제의 성립

백강전투

월본 제도가 동아시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520년 경 왜의 상인단이 월본 제도를 발견한 뒤의 일이였다. 월본의 존재를 보고 받은 왜는 허구라고 여기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월본 제도에 대한 환상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환상과 미지의 섬으로써 여러 신화나 이야기의 배경이 되며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후에도 어부들이나 일부 사람들에 의해 월본 제도가 목격되며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당시 왜는 한반도의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왜 간무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기도 하였으며, 왜는 백제로부터 수많은 기술과 이념, 사상을 전파받았다. 또한 백제인들은 도왜한 뒤 백제가 왜에 선진 문물을 전수함과 동시에 자신의 학문이나 기술 등을 바탕으로 왜의 지배층에 편입되어 들어가기도 하며 왜와 백제가 혈맹의 관계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7세기 초중반부터 이러한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백제 의자왕 즉위 초기에는 백제의 안정이 지속되어 백제와 왜의 관계가 안정적이였지만 즉위 중기부터 백제가 흔들리게 되자 왜도 동시에 위기를 맞이한다. 후에 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으로 인해 백제가 멸망 직전까지 가게 되자, 왜는 백제촌을 지어 백제로부터 오는 백제 출신 주민들의 이주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백제는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백제의 잔존 세력들은 왜에 지내고 있던 백제의 왕족 풍을 왕으로 추대하여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은 약 10일에 200개의 성을 탈환하고, 당나라 군대의 보급을 끊는 힘을 보여주었으나 나당연합군의 화력과 고립으로 인하여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가 결정타가 되어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왜는 당시 국력의 대부분을 투자하여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백강 전투에 동맹으로서 적극적 개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백강 전투가 패전으로 끝난 뒤 백제 부흥 운동 지원은 중단되었다.

다만 왜는 백제계 유민들과 백제 부흥 운동 잔존 세력들에게 도피를 제안하였으며, 월본 제도의 존재를 알리고 그 곳으로의 도피를 제안하며 마지막까지 그들을 지원하였다. 즉, 전설속의 섬 월본 제도를 찾아 거점으로 마련한 뒤 다시 백제를 재건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제안한 것이다. 그것을 들은 백제 부흥 운동 잔존 세력의 수장이던 지수신과 흑치상지는 끝까지 도피하여 저항해 나가기로 결정했고, 왜의 도움을 받아 백제계 유민들과 군사를 이끌고 월본 제도로의 항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왜에서 백제촌을 이루고 살던 백제계 유민들도 합류하게 된다. 지수신은 이 과정에서 "이는 우리 백제 최대의 도전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건 것이다."라는 발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663년 12월 1일, 백제 부흥 운동의 잔존 세력들과 군사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백제계 유민들을 실은 배는 나가사키항을 떠났으며 이들은 환상의 섬 월본 제도를 찾아 나선다. 2월 8일, 약 2개월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월본 제도에 다다르고 그곳에서 백제의 재건을 다짐한다. 따뜻한 편이였던 월본 제도는 그들이 적응하기에 어렵지 않았고, 그들은 성을 건축하고 도시를 이루는데 성공하였으며 재건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었다.

지수신과 흑치상지는 백제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남백제(南百濟)라는 이름을 지어 세력을 구축하였고, 백제 부흥 운동을 통하여 얻은 실전 경험과 우수한 장비로 원주민 세력을 토벌하고 규합하여 689년 본토의 관서와 관주 지역을 통일한 남백제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남백제는 원주민들과 동화를 시도하며 융화정책을 펼치며 원주민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탄압하는 양면정책을 펼치며 원주민들을 융합했다. 그 결과 현재 원주민들은 한국계에 섞여들어갔으며 언어도 한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원주민과 한국계의 차이는 거의 사라져 구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후 남백제는 8세기 후반 경 월본 전국을 통일하게 된다.그 뒤 700년 부여풍이 남백제의 1대 국왕인 풍왕으로 정식으로 즉위하며 남백제 초기 왕조가 수립되었다. 그 뒤 풍왕의 정책으로 농업과 어업이 발전하며 주민들의 생활이나 경제가 개선되기 시작하였으며 남백제는 문명의 발전을 이뤄내기 시작하였다. 백제계가 남백제를 세우자, 고대 수준에 머물던 월본 제도는 급격히 발달하여 문명 수준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남백제는 초기 한반도와는 거리를 두며 바다를 천혜의 요새로 삼으며 침략에 대비해왔다. 그 뒤 오랜 기간동안 일본을 제외한 모든 국가와 교역을 하지 않으며 내치에 집중하며 본토를 통일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다가, 명이 수립되자 명에 조공과 사신을 보내 교류를 맺고 군신관계를 성립해 인정을 받으며 여엇한 동아시아의 주류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한반도에서 고려가 성립되자 다시 국교를 맺기도 하였으며 조선이 세워진 때에도 국교를 이어나가며 한반도와의 화해를 이루어냈다. 그렇게 남백제는 동아시아의 무역 중심지로 도약하기 시작하였으며 국제시장인 벽골촌(碧汨村)이 발전하여 무려 19세기까지 동아시아의 중심 항구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남백제 중기 왕조

정강성.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청해촌

1407년 남백제는 7세의 어린 나이였던 현왕이 즉위하며 몇몇 신하들을 중심으로 정치가 일어났고, 남백제의 정치는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그 뒤 현왕의 친척 중 한명이였던 부여시현이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명목으로 정해반정를 일으켜 현왕을 내쫒고 자신이 시현왕으로 국왕에 올라 1410년 중기 부여 왕조가 수립된다. 시현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를 바로 다잡기 위하여 개혁 정책을 실시하며 국가발전을 추진했다. 1413년 네덜란드와 스페인 상인들의 배가 남백제에 상륙하게 되고, 시현왕은 그들과 교류해 서방과의 교역을 시작한다. 또한 청해촌(淸海村)이라는 구역을 만들어 서방 상인들의 거주지를 만들어주었으며 1년에 1번 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결과 남백제는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여 개혁을 이뤄내고 상업의 발전도 이뤄냈다. 명나라, 조선, 일본, 인도네시아까지 사절을 보낸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시현왕의 뒤를 이어 집권한 수빈왕은 1442년부터 1480년까지 집권하며 중앙집권의 확립, 지방 호족의 수도 거주 정책, 불교 장려, 지방 호족의 반란 제압으로 통일 국가 유지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수빈왕이 죽은 뒤에도 한동안 남백제는 번영을 누렸는데, 1500년에는 남백제 연구에 중요한 서적인 《아성가초지》가 편찬되기도 했다.

중기 왕조 시기에는 중국-조선-일본과 서양 세력을 잇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아시아 지역의 해양 허브국가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의 교류도 번성했다. 당시 중계무역으로 뻗어나가는 남백제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천해성 만국진량의 종(1528년)에 적힌 명문이 있다. 1534년 즉위한 성현왕은 개혁적인 성향으로 발전을 이끌었다. 명, 일본같은 이웃국가와의 관계보다 서양과의 관계를 우선하게 하여 다른 보수적 아시아 국가와 차별성을 두었으며 조총과 갈레온 등 포르투갈에게서 신식 군사무기와 과학기술을 수입하여 군사력과 기술력을 발전시켰다. 이후 서방 국가들과 통상우호조약 등을 맺었으며 항구를 개방해 서방인들의 거주지역으로 구라파촌을 만들었다. 유럽에서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어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업과 선박수리업등도 발달했으며 남백제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통편의를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주는 기구도 있었다. 이렇게 중기 왕조는 남백제가 발전을 이룬 중요한 시기이다.

남백제 후기 왕조~근대

1865년에 촬영된 도유의 모습

이후 18세기 후반, 유럽에선 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이 일어나며 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서방과 가까웠던 남백제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남백제는 이에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자들이 증가하였으며 당시 왕이던 세주왕이 무능했기에 반왕 정서가 지식인 계층에서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움직임을 왕실은 탄압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기폭제가 되어 반왕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결국 1847년 신하들 사이에서도 입헌군주제라도 받아들여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여 일부 신하들이 세주왕을 몰아내고 세주왕의 동생이던 선진왕을 왕으로 옹립하는 병오반정이 일어난다. 선진왕은 새로운 출발을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국가 이름을 월본(月本)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남백제 후기 왕조는 단절되었고, 월본 부여왕조가 새로 출범하였다. 그러나 세주왕을 지지하던 근왕파 신하 및 장수들은 이에 반발하였으며, 세주왕을 지지하던 세력은 주곤으로 가 서조(西趙)를 세웠다. 왕이 두명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중앙 행정력은 약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지방의 영주들도 분리를 선언하여 각자의 국가를 건국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렇게 소보지역을 중심으로 본토(관서, 관주, 소보, 관북)에는 월본왕국이 세워지고 주곤에는 서조 남백제가, 다난, 마전, 북양은 각각의 영주 출신 왕조가 세워졌고 이후 호요왕을 거쳐 군주의 무사들이 분란을 일으켜 전국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월본 부여왕조는 조타치(도유 동쪽)으로 천도한다. 그렇게 월본은 전국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전국시대는 월본 전역이 갈라져 국가끼리 전쟁을 하던 시기였으며, 월본 열도를 다시 통일하려는 월본과 나머지 세력간의 대치가 이어졌다.

이후 1849년 선진왕은 피로로 인하여 병을 얻어 사망하였고, 이어 월본에는 마치왕이 즉위하였다. 동시에 1849년에는 또다른 대형 사건이 벌어지는데, 미국의 함대가 월본이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고 월본에 접근한 것이다. 미국은 개항과 요구사항들을 요구하고 거절하면 월본을 침공할 생각이였지만, 미국의 예상과 달리 월본은 개항과 요구사항을 받아들인다. 당시 원로였던 남정환은 "월본은 어차피 서방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저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면 다른 세력들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다.. 그렇다면 그냥 저들을 받아들이는게 좋다"는 주장을 했고 그 주장은 일리있다고 여겨져 받아들여졌다. 마치왕은 이들과 접촉한 후 개항을 받아들이고 미국의 문물을 수용한다. 신문물을 수용한 뒤 각 세력을 누를 힘을 되찾겠다는 것이였다. 그 결과 미국의 요구사항을 수용하였고 서구문물을 들여오는 결과를 낳게 되어 식민지화를 피했으며, 발전했다는 점에서 이는 "신의 한수"로 평가받는다.

마치왕은 미국과 조약을 맺은 뒤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며 월본을 황제국으로 선포하였고, 월본 열도를 다시 재통일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마치왕은 월본 재통일을 위해서는 국력의 발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개화파 신하들과 함께 무신유신을 선언하며 근대화를 주도하였다. 마치왕은 개화파인 이헌건을 상좌평에 임명하였고, 이헌건을 주도로 한 '친이개혁세력'은 무신유신을 주도하게 되었다. 우선 친이개혁세력은 개혁을 적극 수용하여 유학생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하였다. 돌아온 사절단은 "서양의 문물과 방식을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고 건의하였고, 건의를 수용하여 많은 개혁적 정책을 본받아 실시하였다. 부역제도와 노예계급을 폐지하고 사법 교육제도를 근대화 하는 한편 철도 통신 사업도 추진하였으며 사회의 모든 방면을 개혁하였다. 또한 정치적 근대화를 이루었으며 월본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후진적인 전통복장 대신 서구식 복장의 대중화를 추진하고 권장하였으며 음력을 폐지하여 그레고리력을 도입하였다. 남녀평등권을 제정하였고 왕의 권력을 축소하고 입헌군주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으며 보통선거권을 부여하였고 정당정치가 실현되었다. 무신유신은 약 10년 가까이 실시되었으며, 사회는 발빠르게 변화되었다. 서양식 건물이나 의복이 수용되어 만들어졌고 군사적 개혁도 이뤄졌다. 무기나 장비를 신식으로 교체하고 서양식으로 편제를 바꾸었다. 공장과 조선소도 건립하여 기술적 발전을 도모하였고 서양의 사상이나 철학, 서적 등을 번역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주국으로써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월본의 근대 문학과 예술도 꽃피어났다. 월본 근대 최고의 문학가로 불리는 이선영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이후 발전된 국력을 통하여 월본은 군사를 양성하였으며, 뛰어난 전략가이자 장군이던 도우곤의 활약을 통하여 월본 전역을 다시 재통일하는데 성공한다. 국토를 다시 통일함과 동시에 충분한 개혁을 거치며 근대적 국가로 탈바꿈한 월본은 내치에 신경을 썼다. 이 시기에는 정당 정치가 확립되고 서방 문물이 일상생활에서 자리잡으며 내부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1870~90년대는 서서히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시기는 정치적으로 대립이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혈맹인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자"는 친일론자들과 "아직 때가 아니다. 다른 국가들과 접촉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친서론자들이 대립하기 시작했던 시기였으며 친일론자들은 후에 대월본제국으로, 친서론자들은 후에 월본 왕국으로 내려져오며 교전하게 된다. 우선은 친서론자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정국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이들은 적극적인 외교로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야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총리였던 김하성은 적극적인 외교로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은 존속했는데, 그것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1902년, 외교관 김동주를 필두로 한 외교단이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미국 정부와 담판(뉴욕 니퍼스 합의)을 벌여 불평등조약을 평등조약으로 바꿔내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은 서구 열강에게서 월본이 근대적 개혁국가로 인정받은 사건으로도 볼수 있다. 친서론자들의 이러한 활동은 월본의 국제적 입지를 넓히는 결과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보면 이득이였던 정책이였다. 그 이후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은 월본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던 사건이다. 월본은 명목상으로 연합국에 가담하였고 이로 외교적 입지가 상승하였다. 또한 물품과 선박등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기며 급발전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은 월본은 산업도 동시에 발전하였고 1920년대는 축적한 부와 호황기를 동시에 맞아 최고의 경기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민권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도 시작되었다. "20년대 데모크레시"나 도서민들의 인권 증진 운동, 공산당의 창당 등의 사건이 벌어져 민주주의가 발전하였다.

암흑기~제2차 세계대전

1944년 관서에서 일어난 대월본제국과 월본왕국-미국과의 전투

1929년, 미국의 대공황 영향으로 경제도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1930년대는 암흑의 시대라 불린다. 또한 이로 인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새로 총리에 취임한 구해민은 새로운 경제 정책을 제시하는데, 월본판 뉴딜 정책이라 불리는 "아성행계획"이다. 구해민이 말한 선언문 중 "월본을 위해서 내가 먼저(我) 살피면서(省) 가겠다(行)"라는 발언에서 따온 이름이였다. 운명계획에 따라 월본 곳곳에는 공공시설이 지어졌으며 경제 구제 정책이 실시된다. 이러한 운명계획은 효과를 어느정도 보게 되었고 1933년을 기점으로 다시 경기가 살아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운명계획도 비판이 많던 정책이였고 장기적으로 시행할수 없던 정책이였으므로 1937년 다시 경기가 악화되고 월본의 경제는 살아날 길이 없어보였다. 더군다나 경기 악화의 영향으로 극단주의가 만연하여 극좌나 극우 세력의 폭동이나 선동도 증가하여 국내 상황도 불안정했다. 또한 일본의 팽창과 중일전쟁으로 인해 외부적으로도 뒤숭숭한 시기가 바로 1930년대였다.

혼란스러웠던 월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더 혼란스러워졌다. 월본은 동맹국이자 친선국이던 일본 제국을 지지하는 세력과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였던 세력으로 나뉘어 내전이 발생하였고, 북부는 민주주의를 지지한 "월본 왕국"이, 남부는 일본 제국을 지지한 파시스트 정권인 "대월본제국"이 들어섰다. 월본 왕국은 명목상으로만 무로, 구리하를 국왕으로 모신, 총리가 사실상 전권을 가진 사실상의 공화국이였고 대월본제국 세력이 무로, 구리하를 모셨다. 세력이 약하던 민주주의 세력은 남부 다난도 등지로 도피하였으며, 이후 월본 왕국의 구해민 총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전군을 동원해 혹시 모를 일본과 대월본제국 등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며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연합국의 편에 가담하였다. 그 이후 대월본제국은 일본 제국을 지지하며 동남아시아를 침공하고 월본 왕국과의 내전을 전개하였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지지하며 지원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대월본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한 1942년까지는 월본 왕국을 밀어붙이는데 성공하였으나, 일본의 몰락이 시작되자 동반으로 쇠퇴하였으며 마침내 미국과 월본 왕국이 공동으로 전개한 미군의 월본 본토 상륙 이후 패배하여 1945년 일본 제국의 멸망과 동시에 소멸되었다. 월본은 비록 파시스트 정권을 몰아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고 국토가 황폐화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 일로 미국과의 우호가 증진되었고 동맹 관계가 구축되었다는 장점도 있었다. 월본 왕국은 무로, 구리하 천황 당시의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추축국에 가담한 대월본제국이라는 파시스트 정권을 몰아냈지만 당시 천년 이상 정신적 지주로 국가의 중심을 유지하던 천황을 몰아내면 국민들의 반발이 심할 것을 우려해 천황제는 존속하고, 대신 국민들의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총리'가 민주주의 통치를 시작하기로 하였고, 구 대월본제국, 월본 왕국, 미국이 1945년 9월 10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서 조약을 맺으며(시드니 조약) 월본의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현대

현대 도유 도의 아름다운 야경
현직 총리 구창모

종전 후에는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함과 함께 미국의 대공산포위망에 합류하였다. 월본은 중국과 인접하였기에 공산화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로 인해 반공주의로 국가 노선을 잡으며 미국과 급격히 가까워졌고 혈맹관계로 발전한다. 일본과는 전쟁 후 새로운 조약을 맺으며 전통적 우방국임을 재확인하였고, 다시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 또한 당시 신생 독립국이던 대한민국을 지지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공주의적 외교 노선을 확정하였다. 그로 인하여 소련, 중국과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도서지역 및 북양도 등지에서는 공산주의 게릴라가 활동하였으며, 이들의 주도로 1948년 북양도에서 정해공란(丁亥共亂)이 발생해 북양도에서 정부군과 공산주의 게릴라가 교전을 치루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월본은 반공주의를 강화하였고 주월미군을 증설하였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월본은 대한민국을 지지하며 국제연합군에 전투병 15,000명과 의료병 5,000명을 파견하며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동시에 월본은 미국의 전진기지와 군수물자 공급지로 활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전쟁특수를 누리게 되어 종전 복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1955년에는 전쟁 피해를 말끔히 씻고 다시 발전의 길로 들어섰다. 또한 일본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중계무역을 통해 상당한 이득을 얻게 된다.

그러나 경제 성장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벌려놓았고, 정치적 분열을 가중시켜 1950년대 월본은 1년을 넘긴 내각이 단 2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정치가 불안하였다. 결국 1963년 2월 13일 강일한 장군이 주도하여, 군부에 의한 쿠데타(임인정변, 발렌타인 쿠데타)가 발생하며 1963년 군부의 군사정권이 시작되었다. 군부는 왕실을 꼭두각시로 내세우며 민주주의 탄압과 국민 감시 등으로 집권을 해나간다. 강일한은 경제발전계획을 통해 월본의 경제와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월남전에 개입하여 월남전에 월본군을 파견하는 조건으로 각종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2차 산업을 다시 부흥시켜 현재의 관서임해공업지대를 만들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육성하기도 하였다. 이후 1969년 강일한이 병사하자 그의 후계자였던 이도완이 최고권력자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도완은 언론검열을 넘어 언론사와 결탁해서 사실상의 선전기관으로 변질시키고 민주화운동을 철저하게 진압함으로서 독재권력을 공고히 했고 그럼으로 수반되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각종 노력을 해왔다. 이도완은 억압정책으로 물가를 안정시키고 각종 규제를 풀어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 하였으며, 그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1978년 도유 아시안 게임을 개최한다.

이렇게 군부는 경제개발과 반공을 내세워 집권을 이어가는데, 1960년대 초부터 추진된 경제성장 계획으로 연평균 8~10%대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게 되며 1963~1974년에는 초고도경제성장을 이뤄내었다. 이를 사이쿄를 흐르는 도보리 강에서 따와 "도보리 강의 기적"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 이후 오일 쇼크로 경제에 큰 타격을 입고 민주화 운동가인 민태진과 조선관의 활동으로 인한 민주화의 바람이 불게 되며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점차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1970년대 초반부터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1974년에는 당시 명문대학이던 경당대학교에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1974년 9월 1일, 500여명의 학생권 운동가들을 따라 도유 시민들이 합류해 50만명이 운집하게 되는 도유 9월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도유 9월 혁명은 타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월본의 전역으로 번져 국민들이 독재정권의 종식을 촉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부와 이도완은 끝끝내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고, 시위대를 탄압하고 붙잡았지만 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군부의 하야를 외쳤다. 미국과 일본, 다른 아시아와 유럽의 국가들까지 시위대 지지와 군부 퇴위 요구를 공개적으로 천명하자, 결국 10월 9일 이도완은 하야하였다. 군부는 총리 간선제 폐지와 점진적으로 개혁을 한다는 교섭안을 제안했으나 국민들은 교섭안 대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요구하였으며, 시위가 거세지며 전세계가 주목하고 미국까지도 시위대 지지를 선언하며 결국 군부는 하야하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약속하였다.

그 이후 자유민주당, 전월국민당, 민주정치당 3개 정당의 삼당정치가 자리잡으며 정치의 안정과 함께 경제의 안정성장도 이어지게 되었고 198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3저호황은 월본의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최고호황기를 누리며 엄연한 민주국가이자 경제대국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1990년에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 등이 붕괴되자 월본은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대서방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외교적 입지를 넓혔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에서 타격을 입고 마이너스 성장세로 추락하였으나, 세계 4위에 달했던 외환보유고와 세계 6위에 달했던 금보유량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이나 동남아 등에 비해서는 타격을 크게 받지 않았다. 그 이후 소일랑 총리의 주도로 강력한 경제 회복 정책이 시행된다. 소일랑 총리는 개혁형 보수 성향이였으며, 강력한 경제 회복 정책 및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불황을 탈피하는데 성공하였으며, 2002년 다시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되었다. 그 이후 골디락스 호황의 영향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듯 했으나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로 또다시 경제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시위가 일어나는 등 혼란을 겪기도 하였으나 2015년 다시 회복 추세로 접어들었다. 2018년에는 자유민주당의 구창모 총리가 선출되었으며, 구창모 총리는 '외교월본'을 선언하며 월본의 국제적 영향력 증대를 천명하며 월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행정구역


행정관할구역 구분

5개의 대(大)섬을 중심으로 3분류로 구분한다.

  • 도(島): 열도 대섬 단위
    관본도, 북양도, 주곤도, 다난도, 마전도
  • 도(都): 수도 사이쿄도
    • 구(區): 지역구 단위
      • 촌(村): 소지역구, 번지구분 단위
  • 주(州) : 광역지방자치단체 단위
    • 부(府): 중소도시(광역도시군) 단위
      • 구(區): 지역구 단위
        • 촌(村): 소지역구, 번지구분 단위
    • 정(亭) : 소도시 단위
      • 촌(村) : 소지역구, 번지구분 단위

사라진 행정구역 단위

  • 분 : 지역구내의 촌단위의 그룹이었으나 (예: 신번연분=신번연1촌, 신번연2촌) 촌 단위로 분할하면서 삭제
  • 리 : 지역 분의 옛 이름으로, 마을이 드문 시절 마을을 묶는 단위로 사용

지역 구분

월본의 지방 및 도도부정

  • 주곤도
    • 주곤부
  • 다난도
    • 다난부
  • 관본도
    • 관서
    • 관주
      • 사이쿄도[2]
      • 수도권
    • 소보
      • 유천부
      • 신설부
      • 도본특별자치지구(도본부)
    • 관북
      • 선전부
  • 마전도
    • 마전부
  • 북양도
    • 보와부

주요도시

월본의 주요 도시로는 사이쿄도, 서번부, 유전부, 청하부, 도이부, 유공부, 양곡부, 신설부, 도본부, 선전부, 보와부가 있다.

정치

외교

2018년 6월 현재 14개국과 수교되어있다.

G7
신성제국 삼극기.png한빛국장.pngFlag of Hanulmir.jpgWubon flag.png프로이센 공화국 국기.pngFlag of Nieuw Holland.pngx100px
대한제국(신성)한빛민주공화국하늘미르왕국월본프로이센 공화국니우홀란트크라스나야

교류국

  • 최우선 동맹 관계는 월본의 기조 정책에 관하여 반드시 협력해야할 관계이다. 이 단계에서 양국 관계는 서로의 역사에 등장하고 아주 밀접한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 동맹국관계는 '우방'을 넘어서 양국의 안보, 민생현안, 군사에 협력과 도움을 주는 동맹관계
  • 우방국관계는 우호 관계이나 적은 교류단계
  • 교류국은 단순 수교의 의미에서 월본과 물적, 지적교류를 시작하는 단계
월본의 수교국
최우선 동맹국[3]
동맹국한빛민주공화국
우방국하늘미르 왕국, 프로이센, (니우홀란트, 크라스나야, 가상대한제국)[4]
교류국난카이제국[5]
수교국가온인민민주주의공화국, 독일국, 대부여국, 방유국, 빈트제국, 세이운제국, 앨런 제국, 월화국, 중산국, 포르모사공화국, 페레이션

경제

월본/기업집단

월본의 대표적인 기업은 현성그룹, SHOCK Inc., JTB, AKN-JPON, 樂泉談, 월본항공(WAL), CORSAIR UNION AIRWAYS, WR 월본철도공사, 소쿄메트로, 도번전철, TOMON그룹, NU Co., SHITA그룹, Neptune, ELOT, NP Gruppe 루시아 그룹등이 있다.

군사

관광

월본정부관광국의 슬로건이다.

"Navigate Wubon"

월본정부관광국을 통해 가상국가를 처음 접하거나 월본을 처음 방문하는 방문자를 위해 여러 정보를 게시하고 있다.

입국심사

카페에 가입하고 입국심사를 거치면 입국절차가 완료된다.

일반적으로 월본에 입국하여 둘러보거나 기업활동을 하는 경우 외국인의 신분으로 입국심사를 완료한다.
월본의 국적을 얻고자 하는 경우 기본적으로 외국인신분에서 국민권을 취득한다.
타국에서 외교활동의 목적으로 가입하는 경우에도 외국인신분에서 입국심사를 마친후 수교/외교대사 문의에서 신청한다.

  • 외교관과 기업인(이등국민)의 경우 각 국가, 회사에서 대표자 한명만 등록가능

입국심사는 간단하다. 카페 가입을 마친 후 출입국관리소에서 양식에 따라 입국심사를 완료한다. 입국신고서 양식은 작성 가이드라인에 따라 작성하면 간편하다.

관광지

수상 및 실적

관련 문서

설정

기업

환경

각주

  1. 유전부, 청하부 지역
  2. 수도
  3. 아직 확정된 바 없다.
  4. 괄호안 3국은 미수교이나 G7 세계경제협의회에 의거하여 경제적 우방국이다.
  5. 세계관에서 월본과 많은 교역을 할 수 있고, 지리적·문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