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대리청정
고려 국왕 대리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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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청정(代理聽政)은 군주가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태자, 태제, 태손 같은 후계자가 군주 대신 정사를 돌보는 것으로, 섭정의 하위 개념이다. 이때 대리를 하는 태자, 태제, 태손을 소조(小朝), 군주를 대조(大朝)라 칭하여 구분했다.
고려의 대리청정
고려의 대리청정은 다른 왕조에서 이루어진 대리청정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본래 고려에는 국왕의 어머니가 어린 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는 섭정 및 수렴청정의 개념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생존한 상태에서 태자에게 국정의 일부 또는 전부를 맡기는 형태의 대리청정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무엇보다 국왕 자신이 국정의 최고 명분과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 생존해 있음에도 태자에게 별도의 정치적 권한을 부여하여 왕권을 나눌 필요가 없었으며, 국왕이 병환이나 기타 사정으로 직접 정사를 돌보기 어려운 경우에는 왕후나 재추를 비롯한 최고위 신료들이 국정을 보좌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따라서 태자가 생존한 국왕을 대신하여 직접 정무를 처리할 정치적·제도적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려사에서 예외적으로 대리청정이 이루어진 사례가 약 두 차례 존재한다. 바로 제15대 예종과 제17대 인종의 사례이다.
예종은 즉위 직전 부친 숙종이 암살 위협 속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일을 겪었으며, 자신 역시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자신을 제거하려는 신료가 존재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에 예종은 신료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워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리청정을 맡은 태자에게 지나치게 협력하거나 그의 편에 서는 신료가 발견될 경우, 이를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하여 파직하거나 심한 경우 유배에 처하기도 하였다. 즉, 예종에게 대리청정은 태자에게 실질적인 왕권을 이양하기 위한 제도라기보다 신료들의 충성 대상을 확인하고 잠재적인 반대 세력을 가려내기 위한 정치적 수단에 가까웠다.
이후 예종이 실제로 병석에 눕게 되자 대리청정은 곧바로 종료되었다. 태자에게 계속해서 국정을 맡기는 대신 왕후인 순덕왕후에게 정사를 이임함으로써, 태자가 국정 운영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 역시 차단하였다.
인종의 사례 역시 이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인종은 즉위 당시 이미 50대의 고령이었으며 차남이었던 탓에 본래 왕위 계승 서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목왕이 축출된 이후 예상치 못한 형태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무신정변의 핵심 인물인 박지만을 제거하여 왕권을 회복한 뒤에도 자신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의심하였다.
이에 인종은 당시 여덟 살에 불과했던 왕자 국원공, 훗날의 고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겠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다시 한번 신료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어린 태자에게 국정을 맡기는 모습을 통해 신료들이 누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지를 살피고,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을 가려내려는 의도였다.
이처럼 고려에서 나타난 대리청정은 후대 왕조에서 나타난 것처럼 왕이 생존한 상태에서 후계자인 태자의 정치 경험을 쌓게 하거나 국정 운영을 미리 맡기는 제도적 장치와는 성격이 달랐다. 오히려 예종과 인종의 사례에서 보이듯, 국왕이 자신의 권위와 왕위 계승 질서에 대한 불안을 바탕으로 신료들의 충성심과 정치적 동향을 시험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성격이 강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대리청정은 명목상으로는 태자에게 국정을 맡기는 행위였으나, 그 본질은 일반적인 의미의 섭정이나 왕권의 이양이라기보다 국왕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신료들의 충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수렴청정
고려 국왕 수렴청정・임조칭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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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論)한다. 전(傳)에서 이르길 “국모(國母)가 발(發)을 내리고 청(聽)에 나아감은 유주(幼主)를 보익(輔翼)하여 사직(社稷)을 진무(鎭撫)코자 함이니 ••• — 《고려사》 〈후비전:공예왕후〉
수렴청정(垂簾聽政)은 ' 발을 내리고 정치를 듣는다. '는 뜻으로 임금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을 때,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이를 도와 정사를 돌보던 것을 의미한다. 황태후가 신하를 접견할 때 그 앞에 발을 늘인 데서 유래한다.
고려에서 이루어진 섭정은 크게 대리청정, 수렴청정, 임조칭제, 섭정공 임명의 네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수렴청정은 국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직접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 국왕의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웃어른이 국왕을 보좌하며 국정을 대신 처리하는 제도였다. 즉, 어린 국왕의 미숙한 정치 경험을 보완하고 왕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보조 장치였다.
따라서 수렴청정은 기본적으로 국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국왕이 성장하여 직접 정사를 처리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섭정의 필요성이 사라지므로, 수렴청정 역시 거두어지고 국왕에게 정권이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임조칭제
임조칭제(臨朝稱制)는 중국에서 유래한 정치 형태로, 어린 군주를 단순히 보좌하는 것을 넘어 태후가 직접 조정에 나아가 국정을 처리하고 자신의 명의로 명령을 내리는 형태의 섭정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진나라에서 그 사례가 나타났으며, 진 소왕 때의 미태후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후 한나라 등에서도 황태후가 임조하여 정사를 처리하는 사례가 이어졌으며, 진시황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인 조희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고려에서는 성종 사후 목종이 즉위한 이후 천추태후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임조칭제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목종은 어린 시절부터 궁궐 밖 사가에서 성장하여 왕으로서 필요한 교육과 경험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국정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문제는 목종이 이미 성년의 나이에 이르렀다는 점이었다. 어린 국왕을 보좌한다는 성격의 수렴청정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추태후의 정치적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별도의 형식이 필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임조칭제가 고려의 정치적 현실에 맞게 활용되면서 하나의 독특한 정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수렴청정과 임조칭제의 가장 큰 차이는 국왕과 섭정자의 정치적 관계에 있다. 수렴청정이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보조하고 보호하는 성격이 강하다면, 임조칭제는 국왕이 이미 성년이 된 경우에도 태후가 직접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임조칭제는 단순히 어린 왕을 보좌하는 제도가 아니라, 국왕의 왕권과 태후의 정치적 권한이 병존하거나, 경우에 따라 태후가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주도하는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수렴청정보다 훨씬 강한 정치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국왕의 나이나 성년 여부와 관계없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지속될 수 있었다.
수렴청정과 임조칭제의 차이
결국 두 제도의 차이는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수렴청정은 어린 국왕을 위한 ‘보좌’에 가깝고, 임조칭제는 태후가 직접 조정에 나아가 행사하는 ‘정치 권한’에 가깝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고려에서는 국왕이 성년이 된 이후에도 태후가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을 경우, 수렴청정이 아닌 임조칭제라는 형식을 통해 이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여담
고종은 너무 어린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탓에 조정 회의에 출석할때면 유모의 품에 안겨서 대리청정을 수행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