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서는 뤼베크 왕국의 공식 문서입니다. 문서 반달, 허위사실 기재 등의 편집권 남용을 일체 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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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뤼베크 왕국의 설정상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 실제 카카오톡 가상국가로서의 역사는 뤼베크 왕국/역사 문서 참고.
국왕 제이에 의해 2024년 말엽부터 설정 역사 제작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2025년 7월 8일 공식 설정 역사가 완성되었다.
하위 문서
역사
16세기
한자동맹의 쇠퇴
16세기 중엽, 대항해시대가 열린 이후 무역 중심지가 발트해를 비롯한 유럽 북부에서 지중해, 대서양 등으로 옮겨가며 잉글랜드, 네덜란드 등이 성장함과 동시에, 인근의 브란덴부르크, 덴마크, 스웨덴 등의 국가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린 발트해 인근의 한자동맹이 점점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한자동맹의 맹주였던 뤼베크는 점차 영향력을 상실하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또한 인근 강대국들이 뤼베크를 차지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뤼베크의 상인 동맹들과 귀족층은 점차 군사적 보호자를 필요로 하게 된다.
뤼베크 공국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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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렌스뵉 공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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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렌스뵉 공작령 (1567 – 1574) |
16세기 중반 당시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왕가였던 올덴부르크 가문은 덴마크·노르웨이의 국왕 크리스티안 3세의 사후인 1564년 그의 자손들에게 영지가 분배되면서 다양한 가문으로 분가되었다. 그 중 하나였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 가문은 크리스티안 3세의 삼남인 한스 아프 슬레스비홀스텐쇤더보르[1]가 분할받은 영지를 바탕으로 설립된 가문이었다. 이 때 한스(요한)의 사촌형인 한스 슈벤하임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2]는 올덴부르크 가의 일원이었지만 방계였기에 영지를 분할받지 못하고 사촌동생인 한스 아프의 측근으로 동행하게 된다. 이후 사촌 간의 협상을 통해 한스 슈벤하임은 당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 가문이 하사받은 영토 중 남부, 즉 뤼베크 북부 아렌스뵉(Ahrensbök) 인근의 영지들을 자신의 영지로 두게 되었으며, 이후 1567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 가문과 다시 분가하여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렌스뵉 가문을 설립한다.[3]
왕가의 설정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홀슈타인뤼베크 가문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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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군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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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군정 (1573 – 1574) |
한편 1560년대 후반~1570년대 초반 당시 뤼베크는 한자동맹의 몰락으로 인한 경제적 붕괴를 겪으며 점점 더 무너져 가기 시작했고, 뤼베크 자유시 시의회는 이에 부유층 상인에 대한 고세 부과, 하층민에 대한 강압적 조세를 시도하여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 이에 지역의 유력 상인단 및 군소 귀족들이 한스 슈벤하임과 결탁하여 무장 민병대를 조직, 1572년 겨울에 뤼베크에서 무력 시위를 일으키고 시의회 청사를 점거하여 뤼베크를 장악하게 된다. 이에 1573년 초, 시의회가 공식적으로 해산되고 관련 의원들이 추방당하거나 망명하면서 뤼베크는 권력 공백 상태가 된다. 이후 상인단에 의해 구성된 임시평의회에서 한스 슈벤하임이 뤼베크 치안령(계엄령)을 반포하면서 초법적 통치권을 획득, 신성로마제국 황실에 군정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실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촉발된 종교 갈등을 비롯한 제국 내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이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고, 한스 슈벤하임의 뤼베크 군정을 승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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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자유 한자 공국의 국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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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자유 한자 공국 (1574) |
그렇게 1574년 4월 2일,[4] 차츰 안정을 찾은 뤼베크에 대한 군정이 해제되고, 한스 폰 슈벤하임은 유력 상인 가문에 무역 세습권 등 각종 이권을 제공하고 의회에 참여할 권리를 주는 등 다양한 권리를 주는 대신 자신을 뤼베크의 세습 군주로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할 것을 약속받는 자유헌장에 서명하며 자신이 분할받은 아렌스뵉 인근 영지를 뤼베크 자유시 영역과 합쳐 뤼베크 자유 한자 공국을 선포, 자신은 공국의 초대 공작 한스 1세로 즉위하게 되고, 가문명 또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뤼베크 가문으로 바꾸게 된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종교개혁 및 이로 인한 구교/신교 간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이에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2세는 뤼베크의 혼란을 수습하고 군소 귀족·상인 세력·민간 모두에게 지지도도 높았던 한스 슈벤하임이 뤼베크를 자신의 세습 영지로 전환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이후 한스 1세의 주도로 실리외교 전략을 추진한 뤼베크 공국은 주변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나갔으며, 특히 1588년 상호 동맹 협약을 체결한 스웨덴과 가까워지게 된다.
한편 한자동맹의 몰락을 극복하며 성장하던 뤼베크 공국은 국가 안정화 이후 함께 몰락하던 한자동맹 소속의 도시들의 재정을 흡수하여 재정적 영향력을 키워간다.
17세기
30년 전쟁
종교개혁의 여파로 1618년 독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든 30년 전쟁이 개전하자, 뤼베크 공국은 본래 자유시 지위였던 특수한 상황을 활용하여 전쟁 초반부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한다. 그러나 군사 지출을 증대하여 무장 중립 정책을 추진하고, 덴마크·스웨덴 등 신교 측에 전쟁 물자를 제공·중개무역을 진행하여 전쟁특수로 부를 쌓고 외교관계를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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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자유 한자 공국 (1648) |
이후 1630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신교 측으로 참전하여 북독일로 진군하자 뤼베크 공국은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발표한 복권 칙령(Restitutionsedikt)[5]에 대한 반발에 힘입어 스웨덴과 "뤼베크 주교후령 및 뤼베크 인근 구교 측 영지의 양도 등을 보장받는 대신 스웨덴에게 물자보급 및 금융 지원을 시행하고 전쟁에 참전한다"는 내용의 비밀 협약을 체결한 후 30년 전쟁에 뛰어든다. 이를 통해 30년 전쟁 종결 및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시점에서 승전에 가까운 결과를 낸 뤼베크 공국은 협약대로 각종 영토를 획득하고 부를 쌓아 국력이 크게 오른다.
대홍수
1650년대, 북방전쟁으로 대표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홍수 당시 스웨덴과 러시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하였다. 이에 당시 30년 전쟁의 승전으로 황금기에 있던 스웨덴에 의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서부의 거대한 영토가 점령되었다. 이 시기 뤼베크 공국은 스웨덴에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감행하여 전쟁에 도움을 주었고, 또한 차관·보급품·세수 선납을 제공하며 스웨덴의 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자처하였다. 이를 통해 뤼베크 공국은 스웨덴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한다.
왕국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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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자유 한자 왕국의 국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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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자유 한자 왕국 (1675, 왕국 선포 직후) |
17세기 중후반, 30년 전쟁 이후로 신성로마제국은 크게 쇠퇴하고 있었고, 스카니아 전쟁/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등으로 제국 내외에서는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 틈을 타 1675년 6월 19일,[6] 독일 북부에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하던 스웨덴과 당시 목재·타르 등의 수급을 위해 중요한 항로였던 발트해의 무역 항로 개방, 항만 이용 특권 등 여러 이권을 약속받은 잉글랜드 등의 지지 하에 제4대 뤼베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공식적으로 뤼베크 왕국을 선포하게 된다.
왕국 선포 직후 왕국 승격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스웨덴의 팔츠-츠바이브뤼켄 가문과의 왕실 혼인관계가 수립되어 양국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진다. 또한 이 해 개전한 스카니아 전쟁에서 뤼베크 왕국은 프로이센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스웨덴 측에 해군 및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였고, 이러한 도움을 준 대가로 당시 스웨덴령이었던 비스마르를 얻게 된다.
왕국 선포 과정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를 이용한 프리드리히 2세는 당시부터 발트해 무역 및 금융 중심지로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손꼽을 정도로 부유한 가문이었던 홀슈타인뤼베크 가문의 재력을 활용하여 주변 유력 귀족들과 황실에 적극적인 로비를 펼쳤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는 왕국 선포 당시 자신의 칭호를 "뤼베크의 왕 (König von Lübeck)"이 아닌, "뤼베크에서의 왕공 (Herzog-König in Lübeck)"이라는 애매한 칭호[7]를 쓰면서 대외적으로는 기존 공작과 동일한 지위를 자칭했다.[8]이러한 외공내왕外公內王식 명분과 로비로 인해 황실은 결국 "제국의 질서를 공식적으로 어긴 것은 아니다"식의 논리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이를 묵인한다.
18세기
메클렌부르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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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자유 한자 왕국 (1702, 슈베린 조약 직후) |
17세기 후반부터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은 내분에 시달려 왔다. 수도였던 슈베린보다 규모가 큰, 구 한자동맹 도시였던 로스토크와 주변 군소 귀족들은 사실상 독립 국가처럼 행동하며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정부의 간섭을 원치 않았고, 이에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은 상인 세력이 득세하던 로스토크 및 인근 군소 귀족들의 영지에 대해 강압적 정책을 펼치며 굴복시키려 하였다. 이에 로스토크와 인근 지역은 공동으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에게 이러한 정책의 폐지와 자치권 보장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 이들은 1701년 로스토크 자유시를 선포,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에게서 독립을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이를 시작으로 전통적으로 독립성이 강했던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여러 지역이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에 큰 혼란이 찾아온다. 이때 뤼베크 왕국은 로스토크 측의 지원 요청을 받고 한자동맹 소속 도시였던 로스토크의 보호를 명분으로 전쟁에 참전, 이미 큰 혼란에 빠졌던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을 격파하여 1702년 승리한다. 이후 뤼베크 왕국 및 각 반란군들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간에 체결된 슈베린 조약을 통해 뤼베크 왕국은 반란세력 일부의 영토 및 경제력까지 흡수한 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광대한 서부 영토를 획득한다. 이 과정에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수도 슈베린을 보호령으로 삼기까지 한다.
대북방전쟁
1700년, 대북방전쟁으로 스웨덴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이에 뤼베크 왕실은 스웨덴에 대한 지원을 검토했으나, 메클렌부르크 전쟁으로 더 이상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던 데다 제2대 국왕 알브레히트 4세의 의회 권한 축소로 촉발된 왕당파와 의회파 간 갈등 등으로 내부적 혼란을 겪던지라 결국 중립을 유지한다. 이로 인해 전후 유럽의 대표적인 친스웨덴 국가인 뤼베크 왕국을 견제하고자 했던 루스 차르국과 프로이센 등의 반스웨덴 연합군은 명분을 잃게 됐고, 또한 뤼베크 왕국을 차지할 경우 영국과 네덜란드 등 해양세력의 반발을 초래할 위험을 인지하였다. 결정적으로 1722년, 실제 역사와 달리 대북방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한 영국이 친영국가이기도 한 뤼베크 왕국의 자주권을 "발트해의 자유무역 보장"을 명분으로 보장하여 발트해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며 뤼베크 왕국은 독립을 유지하게 된다.
19세기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기
1789년, 유럽 곳곳의 왕실들에게 큰 충격과 위협을 준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였으나, 뤼베크 왕국의 경우 건국 당시 한스 1세의 자유헌장 서명과 1700년대 초반 영국의 명예혁명을 모방한 개혁을 통해 입헌군주제 체제가 도입되어 있었고, 또한 상업의 자유와 법치주의를 우선하는 체제가 정착해 있었기에 혁명의 여파가 덜했다.
이후 1803년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 신성로마제국을 침공하자 뤼베크 왕국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전통적 동맹국인 스웨덴과 조금씩 협력하는 한편 영국 등 대프랑스 동맹국들과의 무역을 지속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로 프로이센을 붕괴시킨 후 북독일로 진출, 뤼베크 왕국을 압박한다. 뤼베크 왕국은 독일권 전역을 휩쓸고 무너뜨린 프랑스의 이러한 압박에 결국 라인 동맹에 참여하고 프랑스의 항만 이용을 승인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직접적인 병참 지원 요구 등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협조하며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회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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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자유 한자 왕국 (1815, 빈 회의로 결정된 영토) |
이후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승리 후 대프랑스 동맹군이 북독일로 진주하자, 뤼베크 왕국은 라인 동맹을 구성했던 다른 독일어권 영방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즉시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여 프랑스를 공격하는 한편 동맹군에 항만과 주요 시설들을 개방하였다. 이를 통해 뤼베크 왕국은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과 덴마크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주변 군소 영방들의 영토를 떼어받았으며, 또한 독일 연방에 독립 구성원으로 참여함으로서 왕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군사적 중립성을 보장받으며 혼란스러운 시대를 지나 국체를 보전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전쟁에서 비교적 평화를 유지했던 뤼베크 왕국은 19세기 초중반 다시금 발트해에서의 무역 중심지로 기능하며 상업·조선업·금융업 등을 크게 발전시키는 전성기를 맞았으며, 이 시기 프로이센의 베를린-포츠담 철도가 건설된 1838년보다 1년 앞선 1837년 뤼베크-로스토크 철도를 건설하는 등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1848년 혁명
1848년, 2월 혁명으로 프랑스의 7월 왕정이 무너지면서 전 유럽에 혁명과 자유주의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1848년 3월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 발생한 혁명의 여파로 뤼베크 왕국에서도 자유주의자들과 대학생 등에 의한 시위가 발생하였으나, 왕실은 기존 헌법을 개정한 "1848년 헌법"을 발표하여 시민 참정 확대, 무역 자본가의 정치 진출 보장 등으로 사태를 조기에 무마시키고, 왕권 제한과 의회제 유지를 보장하며 1848년을 무사히 넘긴다.
슐레스비히 전쟁
프로이센과 덴마크 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인해 발생한 두 차례의 슐레스비히 전쟁[9]에서 뤼베크 왕국은 무역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덴마크와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모두 명목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으나, 프로이센 측에 비밀리에 항만 제공 및 보급 제공을 감행하고 왕실의 가문명까지 홀슈타인뤼베크 가문으로 변경하는 등의 행보로 프로이센과의 관계를 강화한다. 그 대가로 뤼베크 왕국은 이전부터 덴마크와의 영토분쟁을 겪던 페마른 섬 및 북부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프로이센에게 확실히 보장받게 된다.
보오전쟁
보오전쟁에서 뤼베크 왕국은 이전과 달리 공식적으로 프로이센에 대한 지지를 선포, 같은 한자도시인 함부르크·브레멘 등과 함께 하노버와 같은 북독일 전선에 병력 일부를 파병하기까지 한다. 이에 뤼베크 왕국은 프로이센에게 '이미 우리의 영향권에 있는 국가'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다.
이 전쟁 직후 체결된 조약으로 뤼베크 왕국은 공식적으로 북독일 연방에도 가입하게 된다.
독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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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자유 한자 왕국 (1871, 독일 통일 당시) |
이후 1870년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북독일 연방 의결에 따라 산하의 모든 제후국들과 자유시들이 프랑스에 군대를 파병했고, 뤼베크 왕국 또한 북독일 연방의 일원으로서 이에 동참하였다.
보불전쟁 종전 10일 전인 1871년 1월 18일, 파리 베르사유 궁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다.[10] 이에 뤼베크 왕국 또한 통일 독일 제국 산하의 왕국으로 재편되어 독일 제국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지난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획정되었던 국경에 대한 일부 수정이 이뤄졌다.
한편 이 국경 조정에서 뤼베크 왕국과 메클렌부르크포메른 대공국[11] 간의 영토 교환도 이루어지면서 메클렌부르크 전쟁으로 인해 뤼베크 왕실과 메클렌부르크포메른 대공가 간 남아있던 반목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기도 했다.
제국 정부와의 갈등
뤼베크 왕국은 독일 제국 산하의 5개밖에 없는 왕국들[12] 중 하나이자 그 중 유일하게 북부에 위치한 왕국이었으며, 동시에 유일하게 바다에 접한 항구를 지닌 왕국이자 가장 작은 왕국이기도 했다.[13]
뤼베크 왕국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비스마르크가 1890년 퇴임하고 독일 제국이 황제 빌헬름 2세와 군부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자, '가장 작은 왕국'이자 '유일하게 항구를 지닌 왕국'이라는 특성을 지닌 뤼베크 왕국에 대한 제국 중앙정부의 통제가 심화되었다. 이 시기 뤼베크 왕국의 주요 항만인 뤼베크, 비스마르, 로스토크, 킬[14] 등에 대한 제국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었으며, 또한 철도망과 군사[15]에 대한 통제와 간섭 또한 점점 심해졌다.
이로 인해 뤼베크 왕국 내에서는 점차 제국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뤼베크 왕국은 당연히 독일 제국의 산하 제후국으로서 참전한다.
그러나 영국의 해상 봉쇄와 덴마크의 기뢰 살포[16]로 인해 뤼베크 왕국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무역이 사실상 단절되게 되었고,[17] 여기에 강제적인 파병까지 더해지면서 뤼베크 왕국 내에서는 전쟁 자체에 대한 반감이 심해졌다.
결국 전쟁이 끝도 없는 참호전의 양상으로 이어지던 데다가 '보조 서비스법'[18]이 통과된 1916년을 기점으로 당시 국왕 한스 3세를 비롯해 의회와 정부, 일반 시민들 모두가 '독일 제국의 전쟁 정책이 뤼베크 왕국의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제국 정부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왕실까지 합류해 제국의 전쟁을 비판하게 된 뤼베크 왕국은 이로 인해 왕정 정부였음에도 당시 전쟁에 반대하던 독일 내 좌파 세력에게 큰 반감을 사지 않게 되었다.
킬 군항의 반란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진 1918년 10월 29일, 빌헬름스하펜에서의 수병 반란을 시작으로 11월 3일에는 뤼베크 왕국의 영토에도 일부분 포함되는 킬 항구에서[19] 황립해군의 무모한 명령에 반발한 수병들의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독일령이었던 킬 서부에는 독일 제국군의 진압 부대가 진입하여 시위대를 향해 발포, 7명이 사망하고 29명이 부상을 당하는 최초의 유혈사태가 발생한다.[20]
한편 뤼베크 왕국령 동부 킬에서도 킬 동항에 정박해 있던 독일 황립해군 수병들과 일부 뤼베크 왕립해군 수병들에 의해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었으나, 킬 항에 정박해 있던 뤼베크 왕립해군 제3수뢰전대장 카를 요제프 폰 크뢰펠린(1879~1954) 중령[21] 등의 결정으로 이미 뤼베크 왕립해군의 10.24 명령 불참이 결정된 후였기에 서부 킬만큼 사태가 커지진 않았다. 또한 동부 킬의 뤼베크 왕국 소속 경찰들 또한 빌헬름스하펜 반란 이후 왕국 정부에 의해 하달된 "소요사태 발생 시 질서는 유지하되, 무모하게 진압하려 하거나 시위대를 적대하려 하지 마라"라는 지시에 따라 최소한의 질서 유지 임무만 수행하고 있었다.
이에 시위대 일부가 독일 경찰의 진압을 피해 프로이센-뤼베크 간 국경 역할을 하던 철로를 넘어 뤼베크 왕국령 동부 지역으로 대거 넘어오기 시작했으며, 이에 뤼베크 경찰은 시위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한편 시위 과정에서 명백히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는 국경 출입을 제한하면서도 진압을 위해 국경까지 추격해 온 독일 경찰의 월경을 막고, 부상자들을 의료시설로 이송하는 등의 조치를 행한다.
| D: "월경한 반역자들의 신병을 인도하라. 제국 형법상 범죄자에 대한 송환 의무가 있다." L: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귀하들에게 우리 영토에서의 체포권은 없다." |
| 1918년 11월 3일 당시 독일 측 경찰(D)과 뤼베크 측 경찰(L) 간의 유명한 대화. |
이로 인해 시위대 사이에서는 뤼베크로 가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다. 이에 11월 3일 밤에는 국경인 철로 바로 앞의 뤼베크 왕국 측 주정부 사무소 건물[22] 앞의 공터에서 크뢰펠린 제독과 킬 동항 지역 독일 황립해군 지휘관들 일부가 수병들의 요구를 자체적으로 수용하는 어조의 연설까지 이루어졌다.
이후 독일 측 진압 병력마저도 대다수가 시위에 동참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동·서부 킬 시 전체에 적기와 독일 혁명기에 더해 뤼베크 왕국의 적백쌍장기가 휘날리는 진풍경이 펼쳐졌으며, 다음날인 11월 4일 서부 킬의 시청 건물이 시위대에게 점거되며 수립된 노동자·병사 임시 평의회 내부에서 "뤼베크 왕국의 헌정체제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라는 의견까지 나오게 된다.
킬 협정
한편 킬에서의 반란 소식을 접한 뤼베크 국왕 한스 3세는 11월 4일 트라베부르크 왕궁에서 긴급회의를 소집, 총리 및 의회와의 협의를 통해 평의회 측에 협상을 요청, 이후 11월 6일 뤼베크 왕국 측에서 평의회에 개헌을 먼저 제안하게 되었다. 이에 평의회 내부 강경파들은 '뤼베크 또한 봉건질서의 산물'이라며 이에 반발했으나 독립사회민주당 등 비교적 온건파 세력과 시위대가 이에 찬성하면서 11.6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에 뤼베크 왕실에서는 무려 차기 왕위 계승자인 하인리히 대공(이후 제13대 국왕 하인리히 2세)을 직접 파견하여 킬 협정서에 서명하였고, 그렇게 뤼베크 왕국은 이를 기점으로 사실상 전쟁에서 이탈함과 동시에 독일 제국의 붕괴의 참화를 비껴지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뤼베크 왕국이 독일 제국의 구성국 중 유일하게 군주정을 유지하고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는 온건파 시위대와 국내의 지지였다. 뤼베크 왕국 인근에서 봉기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이들은 타 제후국들의 군주제를 무너뜨린 스파르타쿠스 연맹 등의 과격파가 아닌, 구 사회민주당 계열의 세력이었으며, 이들이 킬 협정에 응한 것 또한 이들이 비교적 온건파였기 때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또한 뤼베크 왕국은 이전부터 한자동맹과 자유시의 역사에서 유래한 독립적이고 자유적인 국가, 즉 독일 본토 놈들과는 다른 곳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 국민들의 단결성과 왕실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다. 이는 뤼베크 왕국 내의 혁명 세력을 위축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그 혁명 세력들도 독일 제국의 타도와 뤼베크의 분리를 외쳤지, 뤼베크 왕정의 타도를 외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제국 붕괴 후
그렇게 1918년 11월 9일, 독일 제국 제8대 수상 막시밀리안 폰 바덴에 의해 빌헬름 2세의 퇴위가 선포되면서 독일 제국이 붕괴되었다. 이에 필리프 샤이데만에 의해 독일 본토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공화정부는 독일 제국의 일부였던 뤼베크 왕국에 대해서도 군주정을 폐지하고 신생 정부에 합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여타 제후국들과 달리 뤼베크 왕국 정부는 영토 내에서 행정력과 통제력을 거의 완전히 유지하고 있었으며, 또한 내부 혁명세력을 포함한 국민들의 지지 하에 국민회의에서는 11월 10일 11.10 선언을 발표하여 뤼베크 왕국의 분리 의지를 확고히 했다.
| 우리 뤼베크 자유 한자 왕국은 독자적인 국가로서 구 독일 제국 정부에 일정한 권한을 위임해 왔다. 이는 조약에 의한 권한 위임에 불과했으며, 이제 조약 당사국 중 한 곳이 사실상 소멸함에 따라 해당 조약에 의거한 본국의 의무 또한 자연히 소멸된다. 이는 독일의 신생 정부로부터의 분리 독립이나 공화정부에 대한 적대가 아니며, 그저 제국 정부의 붕괴에 따른 주권 회복일 뿐이다. |
| 뤼베크 왕국 국민회의장 게오르크 바케니츠 (Georg Wakeniz), 뤼베크 시 국민회의 의사당에서 열린 비상회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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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베크 자유 한자 왕국 (1919, 베르사유 조약으로 결정된 영토) |
전간기
종전 후 1929년, 미국 뉴욕 증시의 폭락 후 전 세계적 대공황이 시작되자 무역 중심 국가였던 뤼베크 왕국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왕국의 해외 자산의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고, 외국 항로 중단으로 뤼베크의 항만 물동량이 급감하는 한편 수출 무역 기반 기업들의 도산도 생기며 실업률이 급증하였다. 이로 인해 파시즘, 공산주의 등 극단주의 세력이 급부상하며 왕국 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하였다.
이에 1930년, 국왕이 임명한 재무장관의 주도로 뤼베크 왕립은행 긴급자금 투입을 통해 시중은행 유동성을 확보하고, 예금 보장법을 제정하여 국민 불안 심리를 완화하였다. 또한 1931년 영국의 파운드화와 통화 연동 조약을 체결하여 외화 신뢰도를 확보하였다. 한편 항만·해운 중심의 국가 경기 부양 정책을 실시, 항만 조선소에 국가 보조금을 투입하여 해운 기업에 선박 개조·수리를 지원하고, 뉴딜 정책과 비슷하게 국가 차원에서 왕립해군 함선 추가 건조[23]와 항만 인프라 건설사업을 추진하여 일자리와 경제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스웨덴·노르웨이와 발트해 공동 화물운송연합 등을 설립하여 해운 재편을 추진하였다. 추가로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와 중립 해상국 연합 협정을 체결하여 체결국 간 통관 간소화, 해운 상호 지원 등을 약속받으며 무역 불안정을 극복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1933~1934년경에 들어 뤼베크 왕국의 경제는 점차 회복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1933년 수권법 통과로 독일에서 나치와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독일과 뤼베크 왕국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뤼베크 왕국은 반나치적 입장을 고수하는 한편, 독일으로부터의 망명자를 수용하고 유대인 보호 및 탈출을 암암리에 지원하며 나치 독일의 강한 압박을 받았다.
이후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개전하고, 1940년 4월 히틀러는 베저위붕 작전의 첫 번째 단계로 뤼베크 왕국을 침공하였다. 독일의 대군에 대항할 능력이 없던 뤼베크 왕국은 항복하거나 정부 주요 인사들을 탈출시켜 스웨덴으로 망명하고자 하였으나, 스웨덴은 친독 정책을 펴며 뤼베크 왕국 망명정부의 수용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뤼베크 왕립해군 전력을 노린 나치 독일의 해군력 증대를 우려한 영국의 전폭적 지원으로 뤼베크 탈출 작전이 시행, 뤼베크 왕립해군 전력 다수와 정부 주요 인사들을 영국 런던으로 이동하여 뤼베크 왕국 망명정부가 수립되었다. 침공 당시 탈출에 성공한 해군 함정 일부를 동원하여 영국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도록 하였으며, 영국의 여타 군사기관과도 긴밀히 협력하였다. 한편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뤼베크 왕국 영토에서의 파르티잔·유대인 탈출 지원 등의 활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후 1945년 5월, 연합군이 북독일을 해방하면서 왕국 주요 인사들이 귀국하였고, 1945년 7월 뤼베크 왕국의 복구를 선언하였다. 전후 1946년, 뤼베크 왕국에는 당시 독일에 수립된 연합군 점령하 독일과는 별개로 뤼베크 임시 연합군정이 수립되었으며, 1947년 독일보다 2년 앞서 연합군정이 철수하며 뤼베크 왕국의 전 영토는 다시 독립국가로 남는다.
냉전기
1950년대에는 미국의 마셜 플랜 자금 일부를 지원받아 전쟁으로 무너진 국토 복구를 개시하였다. 또한 서독과 동독의 분단 경계선에 위치한 전략적 위치를 통해 서방 제1세계 국가들과 가까운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미국, 영국 등과 군사 정보 공유 협정을 체결하는 등 서방 세력의 발트해 세력권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된다. 이에 소련이 반발하며 베를린 봉쇄와 비슷한 시기에 뤼베크 왕국에 대한 봉쇄와 군사적 위협(바르노프 위기 등)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서방세계의 지원과 뤼베크 왕국의 명목상 공식 중립 지위로 인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뤼베크 왕국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며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중 어느 곳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위를 통해 서방 세력의 지원을 받아내고 북유럽 중립국들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한 뤼베크 왕국은 냉전 시기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의 국가와 함께 유럽의 주요 금융 중립지대로 주목을 받았으며,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자본이 동유럽과의 교역 중개지로 뤼베크 왕국의 은행들을 활용하는 등 성공적인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내며 유럽의 부국으로 자리잡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서도 중립 지위를 활용하여 "서방우호·동방수용"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뤼베크식 중립 외교정책[24]을 통해 동유럽과도 개방적 태도를 취하며 중립 정책을 이어나갔다. 또한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정권에 반발한 지식인들이 대거 뤼베크 왕국으로 유입되면서 16세기 설립된 뤼베크 왕국의 국영 최고 교육기관인 뤼베크 왕립대학이 국제적 성장을 이루며 유럽의 상위권 대학으로 자리잡는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탈냉전기
1985년 이후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에 따라 뤼베크 왕국 또한 점진적으로 동방 교역을 확대하였으며, 1989년 독일 통일 당시에는 동독 시민들의 탈출로로도 기능하며 냉전 종식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 독일의 일부 통합파에 의해 뤼베크 왕국 또한 통일 독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1991년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비율로 독립이 유지되고, 독일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독립 지위를 인정받는 동시에 유럽 통합에 적극 찬성하며 EU에 참여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1995년 EU 특별 협약을 통해 "EU 비정회원 특별참여국"의 지위로 EU에 공식 합류, 유럽 단일 시장과 솅겐조약, 유로존에 참여하였다.
21세기
외교적 중재국
21세기에 진입하면서 뤼베크 왕국은 1999년 코소보 위기, 2008년 러시아-조지아 분쟁 등 여러 국제적 분쟁에서 중립 중재 외교에 참여하였고, 또한 발트해 연안 국가 간 여러 협약과 해상 국경 문제 조정에도 참여하였다.
현재
2000년대에 들어서 뤼베크 왕국은 스위스·룩셈부르크를 잇는 유럽의 디지털 금융 허브가 되어 유럽 경제의 중요한 한 축으로 성장하였다. 추가로 혈맹국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식 복지체제의 영향으로 무상 고등교육, 기본의료 보장, 실업·육아 보조금 등의 정책을 도입한 복지 선진국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리히텐슈타인과 함께 현재 남아있는 유이한 신성로마제국의 봉신국이라는 역사적, 문화적 유산과 국민친화적 왕실과 이에 관련된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관광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환경을 통해 현재 뤼베크 왕국은 유럽의 작은 부국이자, 유럽 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한 전형적인 강소국의 표본이 되었다.
역대 군주
뤼베크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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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렌스뵉 공작령 (1567 – 1754)
| 대수 | 왕명 | 재위기간 |
|---|---|---|
| 초대 | 한스 1세 | 1567 – 1574 |
뤼베크 공국 (1574 – 1675)
| 대수 | 왕명 | 재위기간 |
|---|---|---|
| 초대 | 한스 1세 | 1574 – 1603 |
| 제2대 | 프리드리히 1세 | 1603 – 1628 |
| 제3대 | 카를 3세 | 1628 – 1667 |
| 제4대 | 프리드리히 2세 | 1667 – 1675 |
뤼베크 왕국 (1675 – 현재)
| 대수 | 왕명 | 재위기간 |
|---|---|---|
| 초대 | 프리드리히 2세 | 1675 – 1706 |
| 제2대 | 알브레히트 4세 | 1706 – 1719 |
| 제3대 | 카를 4세 | 1719 – 1738 |
| 제4대 | 아우구스트 2세 | 1738 – 1765 |
| 제5대 | 한스 2세 | 1765 – 1786 |
| 제6대 | 알브레히트 5세 | 1786 – 1805 |
| 제7대 | 로렌츠 1세 | 1805 – 1828 |
| 제8대 | 프리드리히 3세 | 1828 – 1855 |
| 제9대 | 아우구스트 3세 | 1855 – 1874 |
| 제10대 | 카를 5세 | 1874 – 1889 |
| 제11대 | 프리드리히 4세 | 1889 – 1894 |
| 제12대 | 한스 3세 | 1894 – 1926 |
| 제13대 | 하인리히 2세 | 1926 – 1932 |
| 제14대 | 프리드리히 5세 | 1932 – 1957 |
| 제15대 | 한스 4세 | 1957 – 1989 |
| 제16대 | 알브레히트 6세 | 1989 – 2024 |
| 제17대 | 로렌츠 2세 | 2024 – 현재 |
각주
- ↑ 실존 인물이다. 독일어 이름은 요한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
- ↑ 국왕 제이가 뤼베크 왕국 건국 당시 처음으로 썼던 이름인 한스 폰 슈벤하임에서 따왔다. 국왕이 된 후 이름은 한스 슈벤하임 폰 홀슈타인뤼베크.
- ↑ 가문 이름이 지명을 늘어놓은 수준으로 쓸데없이 길지만, 이는 실제 유럽 왕실 분가들의 가문 작명 방식에 따른, 즉 고증에 맞는 작명이다.
- ↑ 실제 제이가 카카오톡 가상국가 뤼베크 왕국을 건국한 2024년 4월 2일에서 따온 날짜이다.
- ↑ 실제로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선포된 칙령으로, 아우크스부르크 회의 이후 변동된 모든 교회 재산을 회의 이전의 형태로 되돌리라는 요지의 칙령이었다. 문제는 그 아우크스부르크 회의가 1555년, 즉 칙령 발표 시점으로부터 무려 75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뤼베크를 포함한 개신교 지역의 영주들은 지난 75년간 얻은 재산과 영지를 모두 몰수당할 위험에 처했고, 이에 따른 반발이 거세졌다.
- ↑ 실제 카카오톡 가상국가 뤼베크 공국에서 2024년 6월 19일 뤼베크 왕국 선포가 발생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 ↑ 현실 역사에서 7월 혁명 이후 수립된 프랑스의 오를레앙 왕가에서 쓴 칭호인 '프랑스인의 왕'과 비슷한 논리.
- ↑ 이는 실제 역사에서 왕국을 선포했던 프로이센이 쓴 방법과 비슷하다.
- ↑ 제1차: 1848 - 1852, 제2차: 1864
- ↑ 여담으로 당시 뤼베크 왕국의 국왕으로 재위 중이던 제9대 국왕 아우구스트 3세는 비교적 고령의 나이로 인해 제국 선포 행사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이후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카를 왕세자(카를 5세)가 대신 참석하였다.
- ↑ 실제 역사에서의 명칭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이나, 여기서는 이미 170년 전 수도 슈베린과 최대도시 로스토크를 뤼베크 왕국에 의해 싹 뜯긴 후였기에(...) 명칭 자체가 변경되었다.
- ↑ 프로이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작센 왕국, 뤼베크 왕국
- ↑ 뤼베크 왕국을 제외한 왕국들, 즉 실제 역사에 등장하는 왕국들 중 영토가 가장 작은 작센 왕국의 면적이 14,993㎢로, 약 8,000㎢(추정)이었던 뤼베크 왕국의 당시 영토보다 훨씬 컸다.
- ↑ 위의 1871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에는 킬 피오르드 동안의 킬 시가 뤼베크 왕국 소속이었다. 이로 인해 킬 항만의 대부분이 뤼베크 왕국에 소속되어 있었다.
- ↑ 특히 해군. 애초에 해군을 지닐 수 있는, 바다에 접한 제후국들 중에서는 뤼베크 왕국이 가장 규모가 컸기에 뤼베크 왕립해군은 제국 내에서 독일 제국(프로이센)의 해군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 ↑ 실제 역사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중립국이었던 덴마크는 자신의 앞바다인 스카게라크 해협·카테가트 해협 등에 엄청난 양의 기뢰를 설치하였으며, 이로 인해 북해에서 발트해로 드나드는 통로가 사실상 막히게 되었다. 다만 이는 애초에 북해에 바로 접한 항만을 보유한 데다가 카이저 빌헬름 운하(現 노르트오스트제 운하)로 인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양안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던 독일 측에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 ↑ '방금 언급한 운하를 쓰면 되지 않느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전시체제였던 만큼 운하는 당연히 해군, 특히 독일 황립해군이 우선적으로 사용했다.
- ↑ 실존했던 법으로, 7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독일 남성에게 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더라도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노동 서비스를 강제하는 법이었다.
- ↑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킬 항구의 동안 지역은 뤼베크 왕국령이었으나, 제국 정부와의 협약으로 독일 황립해군과 뤼베크 왕립해군이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이 중 독일령이었던 킬 서부 항만에서 첫 반란이 발생한 것이다.
- ↑ 실제 역사에서도 동일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 ↑ 이후 뤼베크 왕립해군 원수까지 진급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뤼베크 침공 등에서 활약하게 되는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 실제 주소: Adolf-Westphal-Straße 4, 24143 Kiel.
- ↑ 당시 영국은 독일 견제 겸 재무장 감시 역할을 뤼베크 왕국에게 맡기고자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여러 예외사항들을 이용하여 뤼베크 왕립해군의 증대를 지원해 주었다. 또한 뤼베크 왕국도 자국 상선의 보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 ↑ 다만 서방 세력에 더 협조한 만큼 사실상의 친서방 국가로 분류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