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경제국 문화

개요

대경제국문화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역사

개괄

식문화

대경제국의 식문화
요리
경식요리
(敬食料理)
경정식
(敬定食)
관련 대표 문헌
정의행식조리서
(正義行食調理書)
(제1제국 시기)
참사의경의궤
(參事意涇儀軌)
(대경국 시기)
정운식정의지서
(情云食正意知書)
(조선·고려 시기)
경운공내실고식의집
(卿暈公內室古食意集)
(고려·삼국시대)

대경제국의 식문화의 시초는 고씨조선 시기 맥적을 비롯한 마맥지[1], 채저(* 캔 나물(採, 채)과 돼지고기(猪, 저)를 함께 먹는 오늘날의 삼겹살 정식이라 보면 된다. 다만 돼지고기 중에서 어느 부위를 썻는지 기록이 없다.] 등의 음식들이 생겨난다. 또한 음식을 대접하는 특별한 공간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허나 다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전쟁이 끝임없이 일어나자 요리 기술들이 많이 쇠퇴한 듯 보인다.[2]
삼국시대에 백제는 해안을 많이 접하는 나라라서 해산물 요리가 발달했고 고구려는 조선의 요리 방식을 그대로 흡수하면서 육식을 했다.[3] 신라는 산지가 많아서 산나물 요리를 비롯한 채식 요리가 발달했다. 이후 백제와 신라간 나제동맹 체결 이후 신라의 채식요리 기술이 백제에 전파되고 백제의 해산물요리 기술이 신라로 전파되면서[4] 한강 이남 지역은 주로 해산물과 채식 요리를 먹었고 고구려가 망하고 복권된 조선 지역은 전통요리인 육식 요리를 해먹었다. 시대가 지나고 불교국가 고려가 창건돼 대혼 시대를 통일한 때인 1000년대 이후로는 불교가 사실상 국교로 받들어지면서 조선 지역도 육식을 자제하고 채식을 수용함에 따라 유목민들이 살던 유제 지방송원 지방을 제외하면 강북과 강남을 가리지 않고 채식이 경식요리을 장악한다. 허나 고려말 조선 지역에 대한 고려의 통제가 약해지고[5] 대경국이 건국되자 다시금 육식 요리가 번성한다. 대경국 시절 경식요리는 세대를 거치며 발전하였고 대경국이 전성기를 맞은 16세기 중후반에 음식을 배달하는 서비스업종이 생기는가 하면 채식과 육식 전문식당이 생기고 여러 조리서들이 시중에 보급되면서 요리 관련 서비스업이 번성한다.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로는 전쟁에 관련된 파급 효과[6]로 새로운 경식요리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대경국의 중흥기인 정정중흥 때, 반가의 음식 문화가 시중에게도 전파되면서 경식요리가 상당한 도약을 이룬다. 전쟁을 지나고 대경민국 시대에 서민 음식 문화가 발달하는 반면, 제정이 폐지되면서 궁중음식과 반가음식이 쇠퇴하기도 했다.[7] 이후 현대에 들어서서 본격적이게 양식과 경식의 접목이 이루어지는 등 글로벌적인 경식요리의 도약이 기대되는 중이다.
대경국 초중반의 전통밥상의 구성은 밥, 국, 김치, 장류를 기본으로 추가되는 찬 수에 따라 3첩, 5첩, 7첩, 9첩, 12첩, --첩으로 분리했다. 3첩은 서민(평민)의 밥상이었고 5첩은 중산층의 밥상, 7첩과 9첩은 반가(양반집안)의 밥상 구조였다. 하지만 대경국 후반에 접어들어 신분층간 통합이 이루어짐에 따라[8] 보통 3첩과 5첩이 평민의 밥상이 되고 7첩 정도가 귀족의 밥상 구조로 변모한다.
식재료 중 우유, 버터, 치즈 등 유제품의 비중은 아주 적다. 허나 고려조선 후기 위씨왕조, 대경국 초기에는 어느 정도 쓰였다는 기록은 있다. 그러나 대경국 중기에는 그 맥이 끊겼고 현대 양식과 접목한 신(新)경식을 제외하면 거의 타락죽 밖에 없다.
요리(料理)라는 말이 보급된 것은 대경제국 제1제국 시절로 원의(源意)는 '보살핌', '돌봄', '손질함', '가르침' 등을 의미했지만은 지금은 식품을 잘 처리하는 일, 또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보통 일본의 한자어가 들어와서 그런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옛날에는 '음식'이라는 말이 대중화되었고 현재는 음식과 요리가 혼용되어 쓰인다.

건축·토목

대경제국 건축의 시작은 여타 다른 나라들과 비슷한 전철을 밟았기로 구석기 시대에는 막집[9]을 지음으로서 첫 건축 활동을 했다 볼 수 있다.[10] 이후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며, 대경제국에는 사량문화와 경사문화가 보급되면서 신석기 시대가 열렸다. 사량문화권(요동)에서는 주로 신석기형 움집[11]을 지은 반면, 경사문화권에서는 목재를 이용한 독특한 방식의시대를 앞선 움집을 건축했다. 이때쯤에는 비단 거주형 건물말고도 여러 용도의 건물들에 대한 건축도 시작되면서 단순 건축은 주(住)에 국한된 것이 아닌 어느 구조물을 건설하는 용도로 범위가 확산됐다. 경사문화권 중에서는 고상식 구조물을 건설한 지역도 있는데 주로 최남단의 비가 많이 내리고 습기가 많은 지역으로, 이를 피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선사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에 접어들자, 강남과 강북에 기와가 보급되면서 기와를 건축물 지붕에 이용하는 방식이 사용된다. 이외에 삼국시대 개막 후 고구려·백제·신라에선 각지에 알맞는 건축 방식을 발달시키는 한편,[12] 공통적으로 목조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이 때의 토목 기술로 제방을 건설하고 여러 지형들을 개간하기 위해 지형을 변경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삼국이 신라로 통일된 이후의 건축은 신라의 연속으로, 이 시기 유물들로 추정해볼 때에 호화스러운 건축물들을 많이 건설했고[13]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후 신라에서는 이 시기가 불교가 가장 번영을 맞이했던 시기이기에 사찰에 대한 건축 기술들도 많이 개발된다. 조선에서는 각 제후국의 특징을 풍기는 축조 기술들이 존재했으며. 옛 고구려의 건축 기술을 모방하기도 했다.[14]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세워지자 고려는 옛 고구려의 건축 기술을 가져와 쓰기도 했지만 이 시절에는 송나라의 건축 기술을 전수받아 송나라의 건축 기술이 고려의 건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고, 귀족가문의 건축물에는 붉은 색의 주칠과 검은색의 흑칠과 같은 단청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특수한 기와를 장식해 사용하였다. 허나 대경국으로 넘어오면서 대경국은 애가 사상에 입각한 실용주의 정책들과는 이러한 사치적인 건축 기술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그 명맥이 사실상 끊기게 된다.[15] 대경국 시기에는 불교도 천대받아서 사찰에 대한 건축 기술의 진보도 중단되었고 단청은 오직 궁궐 건물과 같은 최상류층(왕족)의 건축물에만 사용되게 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로는 승애억불 정책에서 억불(抑佛) 정책이 약화됨에 따라 다시 사찰에 대한 건축이 늘어나고 정정중흥이 왔을 때에는 단처을 이용한 건축물이 우후죽순 세워졌다. 대경국 말기에는 서양식 건축 기술들이 도입되면서 각지에 양식 구조물들이 늘어났고, 제1제국 시기와 대경민국 시절을 거치면서 양식 건축물을 비롯한 새로운 건축자재[16]들의 사용이 급격히 늘어난다. 제2제정 복벽 이후로는 전통 건축물인 경옥이나 사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는 양식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으며, 양식 건축과 경식 건축의 접목을 추구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경식 건축말고도 옆나라인 일본의 일본 건축이나 중국의 중식 건출들과도 접목을 해보자는 학파 또한 존재한다.

문화예술

전통문화

출판

만화

미술

대경제국 미술(美術)의 시작은 고대 강남반도의 '회화'[17]에서 시작됐다. 조선 최초의 화가라 불리우는 왕이가 회화를 그렸고 민원사 고룡만인위상화를 그린 걸로 유명하다. 이후 고분 벽화와 같은 왕족들의 무덤에다가 벽화(壁畵)를 새겨 넣었고 근초고왕(백제)이나 흘해이사금(사로국->신라), 문자명왕(고구려) 등의 삼국의 군주들이 문학을 후원하는 한편 미술에 대한 후원을 가하면서 삼국시대 회화를 총체로 한 미술이 상당한 도약을 이룬다. 고구려가 망하고 이어 백제도 망하면서 신라의 천하가 도래했을때, 수묵화가 도입되고 평화가 이어지면서 문학, 특히 미술에 대한 발전이 상당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불교가 본격적으로 번성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한 불화(佛畵) 부문의 미술도 급격히 발달한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신라의 통일신라 시절 국보 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변상도(變相圖) 불화가 있다. 신라보다 더 불교에 공을 들인 고려 시기에는 불화 미술이 전성기를 맞는다. 고려 시대에는 수묵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고려 시대에 상공업의 발전과 광업이 발달하는 한편 사치품 제조업도 번영을 맞이했기에 금이나 고급 안료들을 쓴 그림들이 나온다. 금을 쓴 대표적인 고려시대 불화로는 보물 926호의 수월관음도가 존재한다. 고려와 함께 강북에 존재했던 조선은 고려처럼 불교를 숭상하기는 했지만 수묵화와 회화같은 다른 문학들도 왕실이 적극적으로 후원했기에 다원(多元)적인 미술문화가 존재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회화 화가인 인묵회궐유배음화와 수묵화 화가이자 왕족인 위부의 보물 제2059호의 원수정원도라는 수묵화가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조선과 고려가 망하고 대경국이 들어선 이후에는 미술에 대한 직업직이 성문화되어 '직업 화원(畵員)'이 생기는 한편, 불화 미술이 많이 쇠퇴하는 대신 애가와 함께 건국 사상으로 받들어진 유교의 질서를 반영한 '문인화'와 '수묵화'가 번성하였고 민간에서 민화(民畵) 미술도 발달했다.[18] 근대에 들어서 서양 미술이 들어옴에 따라 경식미술에 큰 격변이 생긴다. 이후 물감을 이용한 유화미술이 들어오고 서양식 미술가들이 대경제국에 미술전문학교들으 세움에 따라 서양식 미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이후 격변기를 치룬 다음 세워진 대경민국 시절에 서양미술과 경식미술의 조화를 추구하는 미술학파 계열이 생기는가 하면 고전미술을 추구하는 학파 계열도 출범하는 등 대경제국 미술세계는 많은 분열을 겪는다. 제2제정이 복고된 다음 크게 전통미술을 추구하는 학파와 현대미술을 추구하는 학파간 갈등은 사그라들고 상호간 협력도 재개하며 현재에 이른다.
경식화(敬式畵)라는 용어의 탄생은 대경민국 시기로 '대경민국의 동양화'라는 뜻으로 제정됐다. 현재에는 대경제국을 비롯한 옛 대경민족의 나라들의 동양화들도 포함시켜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 다른 뜻으로 경식미술(敬式美術)이란 표현도 있다.
경식미술의 특징으로는 여백의 미, 다시점, 수묵이 있다. '여백의 미'로는 서양화는 여백까지 모두 채워버리는 반면, 동양화 중에서 경식화는 여백의 미로서 여백을 다 채우지 않고 그 여백에 뭐가 있을지 상상해보며, 그 그림의 원의(源意)를 알아보는게 묘미다.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경식화 포함)는 수묵의 사용이 많다. 중간에 수정이 가능한 유화[19]와 같은 서양화와 달리 먹이 들면 수정이 힘든 동양화는 일필휘지(一筆揮之)[20]로 그려나갔다. 물론 동양화가 무조건 수묵만 쓰는 건 아니고 안료를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서양화가 고정된 초점투시를 한다면 경식화는 여러 다시점을 한 개의 작품에 담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21] 전통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상대방이나 사물을 관찰하고 필요한 부분만을 그림으로서 초점투시보다 자연스럽고 미학적인 구도를 취할 수 있지만 과도하게 남용하면 지저분하고 산만하게 보일 수 있다.
경식화를 그릴 때 주요 준비물은 경지, 벼루, , 석채 등이 있다.

음악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방송

게임

스포츠

대경제국이 처음으로 스포츠 부문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은 1924년으로 파리 올림픽이 열렸던 해다. 이때 제1제국은 마땅한 스포츠에 대한 투자가 전무해서 대표단을 파견할 수 없었고 참관인 자격으로만 경기 관람이 가능했다. 이 시기에 제위(帝位)에 있던 순종 성황제는 올림픽 참여는 둘째 치고 대경제국 내에 전무한 스포츠 산업을 키우기로 결심한다. 우선 이에 대한 전담기관으로 황립스포츠학단이라는 현재의 황립 스포츠 재단의 전신을 만들어 스포츠 산업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한편, 외국의 스포츠 강사들을 초빙하는 등 어느 정도의 투자를 행한다. 허나 대공황이 닥치자 스포츠 산업에 대한 투자가 다시 중단되었고 황실 사재로 간간히 예산 배정이 있었다가 1936년에 열린 베를린 올림픽에 대표단을 보내며,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지만 일본과의 전시 상황이여서 제대로 된 포상도 못받았다가 1945년 난징 선언 후 종전이 되자 손기정 선수는 황립스포츠학단 명예단장으로 올려진다. 제2차 경일전쟁이 끝나고 내전까지 마무리한 이후 1956년 열린 멜버른 올림픽에 대표단을 공식적으로 출전시킨다. 1961년에 제1제정이 폐지되면서 대경제국 대표단이 아닌 대경민국 대표단의 이름으로 1964 도쿄 올림픽에 대표단을 출전시켰다. 올림픽 분야 말고도 대경민국 시절에는 스포츠 산업 각지에 투자와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다방면의 발전이 이뤄진다. 또한 스포츠 관련 기반시설 확충 계획들도 차례차례 시행되며 스포츠 인프라 기반을 많이 확보한다. 제2제정 복고 이후 스포츠 산업 부문에 대한 부처 설립과 황립스포츠학단의 후신인 황립 스포츠 재단의 출범이 있은 후 세분화된 조직 체계를 갖기 시작한 스포츠 산업은 곧이어 열린 1987 청경 올림픽2002년 경-일 월드컵, 이외 아시안게임과 기타 세계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며 그 이름을 세계에 알린다. 현재에는 여러 문제점과 비판, 논란 등의 문제가 재조명되거나 고질적인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주로 엘리트스포츠 분야가 발달되있고 생활체육 면에서 일본보다 떨어지는 현황을 가지고 있다. 국내 스포츠 관계자들과 황립 스포츠 재단의 지원으로 생활체육 개선 노력이 있기에 일단은 기도해보는 편이 좋다.
올림픽 면에서 태권도와 유도, 레슬링, 권투같은 격투기 종목과 무기를 사용하는 펜싱, 양궁, 사격 등의 종목에서 상위권의 실력을 소유하고 있다. 역도에서는 17위이고 승마와 근대 5종, 럭비, 육상 던지기에서는 메달리스트가 거의 없다. 이외 빙상종목에서 성적이 좋다. 구기 종목에서 대경제국은 야구는 2018년 12월 17일에 발표한 WBSC 랭킹 남자에서 3위에 랭크되있고 축구에서의 실적은 2019년 10월 24일 기준 피파 랭킹 남자 39위, 여자는 2019년 9월 27일 기준 피파 랭킹 20위이다. 농구에서 대경제국은 2019년 9월 16일 발표한 FIBA 랭킹 남자에서 30위에 랭크되있으며, 아시아에서는 다섯 번째로 높은 순위다. 배구에서는 2019년 기준 FIVB 랭킹 여자 순위는 9위, 남자는 24위이다. 최근에 등장한 E스포츠에서 대경제국은 E스포츠의 성모라 불려도 될만큼 세계 최우수의 성적을 가지고 있다.[22]

종교

성문화

예절

비판

규제 및 탄압의 민낯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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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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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제국
大敬帝國
Empire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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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요약 설명하자면 말(馬, 마)의 고기와 보리(麥, 맥)을 섞어 먹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래는 말고기는 데치지 않고 사용하다가 제화(製火) 기술이 발달하면서 말고기를 삶아 썼다.
  2. 당장 구워먹던 마맥지를 다시 생으로 먹기도 하고(제화 기술을 요리에 쓴다는 상식이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육분(肉分)이라는 여러 고기들을 나눠 함께 먹는 정식요리가 갑자기 모든 고기를 섞어서 쓰는(조화가 안됐다) 기이한 곳으로 변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3. 허나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육식을 자제하기도 했다.
  4. 이 시기 신라도뒤통수를 통해 해안가를 어느 정도 확보한 시기여서 해산물요리 기술 수용이 가능했다. 물론 이전에도 남해안과 접한 부분이 있었지만은.
  5. 특히 몽골의 침공으로 고려를 넘어 조선도 본토에 대한 행정력을 상실함에 따라 백성들이 뭘 먹는지 상관 할 수가 없었다.
  6. 강남 지역의 재건과 동시에 구휼에 들어가면서 비축했던 식량이 한 순간에 동이 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이때문에 쌀의 대체재인 감자, 고구마, 보리 등이 주목받는다.
  7. 하지만 궁중에서 일하던 대령숙수와 수라간 궁녀들이 민간으로 나오면서 실직자가 되자 어쩔 수없이 배웠던 궁중요리 기술을 바탕으로 궁중요리 식당들을 오픈하면서 반가음식들만 접목했던 민간에도 궁중음식이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8. 양민+중인+양반 다수=평민, 양반 소수->귀족으로 재편됐다.
  9. 말그대로 아무렇게나 지은 집.구석기 시대의 주거 형태. 출처
  10. 물론 아무렇게 지었지만
  11. 움을 파고 지은 집. 움막보다 조금 크다.출처
  12. 고구려는 조선을 흡수함으로서 조선의 고급 건축기술들과 조선 고유의 건축 특징들을 습득했고 백제는 삼국 중에서는 으뜸의 건축 실력을 가졌다.(주로 목조 건축물에서 두드러졌다.) 신라는 전성기에 가까워진 7세기 초반에 삼국 각지의 건축가들을 등용하고 건축에 대한 후원을 하는 한편, 이후 다른 나라들을 흡수하여 그 나라의 건축 기술들을 버리지 않고 모두 습득함으로서 더 아름답고 완벽한 건축물들을 만들었다.
  13. 심지어 으로 만든 집들도 있었다.(金入宅, 금입택)
  14. 어차비 고구려의 건축 기술은 조선이 그 출처였다.
  15. 유교도 나름 한 몫했다.
  16. 철근, 콘크리트 등.
  17. 여러 가지 선이나 색채로 평면 상에 형상을 그려 내는 조형 미술. 출처
  18. 불화 미술과 결합한혼종 새로운 미술도 생겼었다.
  19. 위에 덧그려 수정이 가능하다.
  20. 한숨에 글씨나 그림을 줄기차게 쓰거나 그림출처
  21. 산수화에서 두드러진다.
  22. 허나 요즘 들어 리그 오브 레전드를 비롯한 일부 게임에서는 그 위상이 많이 손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