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경제국 제1제국 궁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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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제국 궁내부
大敬帝國 宮內部 / Imperial Affairs Apparatus
설립일 정공 26년, 경원 원년, 1890년 6월 9일
설립 근거 대경제국 제1제국 헌법
전신 대경국 승정원
해산일 의명 26년, 1961년 5월 17일
후신 대경제국 궁내부
직원 수 15,146명
궁내대신 16대 이성진(마지막)
상급기관 대경제국 제1제국 내각
산하기관 시위대, 황립자문원, 내관부

개요

궁내부는 대경제국 제1제국의 황실 사무를 총괄하고 궁무부를 관장하던 기관이었다.

역사

황국제제 이후 궁내정제가 개편되면서 왕실 사무를 통할하던 대경국 승정원이 폐지되고 대신 황실 사무를 총괄할 기관으로 궁내부가 설치됐다. 궁내부가 설치되고 내관부와 별도로 설치됐던 대경제국 제1제국 황립자문원이 궁내부 산하조직으로 편입되면서 궁내부 조직이 대거 확장됐는데 이때부터 궁내부는 궁무부 기관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시종조직으로 확립된다.

순종 치세 후반에 궁내부는 궁무부 대권에 도전하는 추밀원과 갈등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시종조직이 분열되면서 궁내부 계열의 시종파와 동지회파, 추밀원 계열의 명경파와 청경파가 서로 경쟁을 시작한다. 한편 명경파의 후원을 받던 영종이 황위에 오르면서 명경파를 제외한 다른 파벌들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버렸고 추밀원 계열 계파가 명경파로 통일되면서 추밀원 중심의 시종조직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경일전쟁으로 대경제국 제1제국이 아수라장이 되고 피란 과정에서 추밀원 상부조직이 괴멸됨에 따라 그 공백을 자연스레 궁내부 계열 계파인 시종파와 동지회파가 매꾸기 시작한다. 이윽고 혜경으로 황실이 몽진하였을 때, 시종조직은 완연한 궁내부 파벌 중심의 체제로 개편된 상태였다. 이에 의종은 궁내부의 독주를 견제할 차원으로 승정원을 부활시켜 궁무부 기관들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만든다.

이에 따라 궁내부 계파VS승정원 구도의 궁무부 체제가 새롭게 시작된다. 전쟁이 끝나고 뒤를 이어 일어났던 6.25 내전까지 마무리된 직후 궁내부 파벌은 시종파로 통일되고 승정원에서는 기존 감찰권을 놓고 내부 경쟁을 펼치던 좌파와 우파 간 갈등이 봉합되면서 궁내부와 승정원 간 경쟁이 더욱 가열된다. 헌데 박정희의 군사정변으로 제정이 폐지되면서 두 조직 모두 강제 해산당한다. 마지막 궁내대신인 이성진 백작은 복벽 1년 전인 1986년에 사망하고 다른 궁내부의 관료들도 복벽 이전에 모두 스트레스사를 하거나 의문사를 하면서 제1제국 궁내부를 경험했던 관료는 현재 소수만 존재한다. 이들중 대부분은 지금은 '귀족원로'의 위치에 있다.

구성

궁내부에는 대신관인 궁내대신을 수장으로 하는데 궁내대신은 명목상 대경제국 제1제국 총리대신이 지명한 인물을 황제가 임명하는 구조지만 실질적으로는 대경제국 제1제국 귀족대표회의에서 지명한 인물을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었다.

궁내대신 예하에는 중앙조직을 관할하는 영무원과 산하조직을 관할하는 외무원이 있었는데 영무원의 수장인 영무원장과 외무원의 수장인 외무원장은 모두 칙임관이다. 이들의 임면권은 궁내대신이 가졌었다. 중앙조직[1]은 영무원장이 건의한 인물을 궁내대신이 임명함으로서 구성되었다. 마찬가지로 산하조직[2]은 외원장이 건의한 인물을 궁내대신이 임명함으로서 구성되었다.

조직

  • 궁내대신
    • 대신대변인
    • 대신고문원
  • 중앙조직
    • 영무원
      • 2과
        • 정무과
        • 재무과
      • 5사
        • 훈문사
        • 기훈사
        • 시종사
        • 무관사
        • 공무사
      • 5관
        • 총무관
        • 공무관
        • 내무관
        • 좌무관
        • 지청관
  • 산하조직

궁내대신

궁내대신은 궁내부의 수장이자 궁무부 기관들의 실질적인 대표로 명목상 총리대신이 지명한 자를 황제가 임명하는 구조로 서임되지만 대경제국 제1제국 귀족대표회의에서 지명한 인물이 황제의 서임을 받는 것이 실질적인 선출 구조였다. 궁내대신 연봉은 의명 25년, 1960년을 기준으로 하여 달러화로 $11,569로 대략 오늘날의 원화 가치로 환산하자면 1억 1000만원 정도의 연봉이었다. 반면 대경제국 제1제국 추밀원의 수장인 추밀원장의 연봉은 $12,070(오늘날 약 1억 5000만원)으로 궁내대신보다 4000만원을 더 받았다.궁내대신 안습.. 궁내대신은 추밀원장과 함께 시위대의 특별 경호를 받았는데 시위대가 황실 전용 경호대인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3] 이외에 대신공관이 제공됐고 노후 은퇴 연금도 받았다. 다만, 궁내대신은 이러한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 이유가 있는데 궁내대신은 남작과 자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만 서임될 수 있었기에 당시 비교적 재정 상황에 안 좋았던 남작과 자작의 상황을 생각하여 이러한 대우가 있었던 것이다. 비단 궁내대신 뿐만 아니라 남작과 자작만 임명되는 귀족공무원직은 대부분 다른 공무원직보다 대우가 좋았다. 이때문에 공작과 후작을 비롯한 일부 귀족들이 위장전입을 시켜 자녀를 남작이나 자작으로 속여서 귀족공무원에 임명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그리고 다 잡혔다

업무

궁내부의 업무는 오로지 황실 사무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문제는 그 황실 사무가 방대하였기에 겉으로는 궁내부 조직은 다른 내각각부 1개와 같았지만 안을 들여다 봤을 때에는 내각각부의 몇배에 이르는 인원과 기구를 자랑하였다. 당장 인원이 많이 충당되는 관을 5개나 두고 있고 산하조직 시위대와 황립자문원, 내관부 1개가 내각각부 1개에 준하는 크기였으니 말 다한 수준. 이러한 규모 덕분에 궁내부 내부의 업무는 철저한 규율 아래에 분할되어 관장됐다.

당장 업무가 방대한 재정 사무는 1과로 따로 독립된(재무과) 상태였고 정무과의 규모가 실로 거대하여 그냥 따로 산하조직으로 독립되도 상관 없는 크기였다. 비교적 크기가 작은 5사들도 1개 '사'가 1개의 '관'에 맞먹는 규모였고. 5사로는 궁내부 훈계와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훈문사, 궁내부 내부 기율에 관한 제정 및 개정 사무를 맡는 기훈사, 궁내부의 잡과 사무를 관할하는 공무사, 시위대 예비 인원 선발 및 훈련을 주관하는 무관사, 내명부의 지밀을 보조하는 시종사가 있었다. 5관에는 지청관은 궁내부의 지청(支廳)들을 통할하는 업무를 맡는다. 좌무관은 다른 '관'들을 조언하는 업무를 맡고 내무관은 승정원의 궁내부 감찰 사무를 궁내부와 승정원 사이에서 중개하는 곳이었다. 총무관은 총무 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이고 공무관은 이외 기타 등등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산하조에는 외무원 예하에 황실 경호 업무를 맡는 경호기관인 시위대와 황제에 관한 시정자문을 하는 황립자문원, 그리고 대경제국 제1제국 내관을 관장하는 내관부가 있었다.

파벌

과거 궁내부는 시종파와 동지회파라는 두 양대 파벌이 있었는데, 동지회파는 '동지회'라는 사목모임을 주축으로 존재하던 파벌로 동지회라는 강력한 권력 기반과 인연 구조를 중심으로 존재했으며 5관을 중추로 활동했다. 시종파는 5사와 황립자문원을 핵심 권력부로 두고 있던 파벌로서 황제를 옆에서 시종하면서 자연스럽게 황제의 신임을 얻어 만들어지게 된 파벌이었다. 이 양대 파벌은 6.25 내전 종전 이후 시종파로 통합이 되는데 동지회파의 기반이었던 동지회 세력이 6.25 내전 통에 조직원의 대다수가 대경 사회주의 공화국으로부터 사형을 당하거나 전쟁 통에 실종하는 등 조직이 와해되버렸고 그나마 남아 있던 동지회파 원로들도 결국 파벌 운영을 포기하고 시종파에 투항한게 양대 파벌 통합의 결정적인 시발점이었다. 양대 파벌이 합쳐지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였고 동지회파의 중추였던 5관의 공무원이 점차 시종파로 교체되다가 끝내 시종파가 궁내부의 모든 요직과 한직까지 장악하면서 양대 파벌의 집단 지도 체제는 종말을 맞이하고 시종파의 중앙 집권적 지도 체제가 시작됐다. 그러나 궁내부에서의 파벌 정치는 현재, 모습이 좀 다르지만 보수파개혁파 간의 경쟁으로 계승되었다는 일각의 주장도 존재한다.[4]

기타

관련문서

각주

  1. 2과(정무과, 재무과), 5사(훈문사, 기훈사, 시종사, 무관사, 공무사), 5관(총무관, 공무관, 내무관, 좌무관, 지청관)
  2. 대경제국 제1제국 시위대, 대경제국 제1제국 황립자문원, 내관부
  3. 다만 궁내대신은 추밀원장에 비해 더 많은 경호인원이 배정되었다.
  4. 하지만 개혁파는 온전히 황실과 함께 스위스로 넘어가서 스위스에서 공부를 한 유학파 귀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범귀족 파벌이었고 마찬가지로 보수파는 대경민국 시절 복벽파 귀족들이나 귀족 원로들을 중추로 하여 구성된 범귀족 파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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