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미르 연합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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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미르 연합왕국
Regno Unito di Hanulmir / United Kingdom of Hanulmir

Flag of Hanulmir.png Emblem of Hanulmir.png
국기 국장
당신의 상상을 마음껏 펼치는 국가
Un paese dove puoi immaginare quanto vuoi.
상징
국가 내 조국이여, 나 그대에게 맹세하노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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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2월 9일 칼리아리 조약 체결

1947년 7월 28일 하늘미르 왕국 헌법 제정
2023년 7월 5일 하늘미르 연합왕국 출범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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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칼리아리 특별시
최대도시 칼리아리 특별시
면적 24,090㎢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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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시
Capitale delle
Hanulmir regno
칼리아리 특별시

Regione
오리스타노주 (Oristano)

누오로주 (Nuoro)
카르보니아주 (Carbonia)
사사리주 (Sasari)
올비아주 (Olbia)
메디오캄피다노주 (Medio Campidano)
올리아스트라주 (Oliastra)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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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3,997,862명
민족 구성 샤르데냐인, 기타
인구밀도 165.89
공용어 사르데냐어
지역어 이탈리아어, 불어, 영어 및 기타 소수언어
공용 문자 로마자
종교 국교 국교 없음
분포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등
군대 하늘미르 왕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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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입헌군주정, 의원내각제
국왕 로제테 마르게리타 미르
총리 안유민(제2대) 다함께차차차
의회의장 정하나 새로운미래당
최고재판소장 마리오 루이지 리바
여당 다함께차차차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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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 시장경제, 자본주의
GDP
(명목)
전체 GDP 118,924,400,914 USD
1인당 GDP 29,747 USD
화폐 공식 화폐 하늘미르 달러 (HM$)
ISO 4217 HMD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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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연호 그레고리력
시간대 HST (UTC+1)
통행방향 오른쪽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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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LD
.hm
국가 코드
HM, HMK
First Emblem Hanulmir.png


하늘미르 왕국(영어: Kingdom of Hanulmir, 이탈리아어: Regno di Hanulmir, Regno Hanulmir), 약칭 하늘미르(영어: Hanulmir)는 남유럽에 있는 국가다. 국토는 지중해에 있는 사르데냐와 부속도서로 구성되어 있다. 국토 면적은 24,090 km²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인구는 1,846,798 명이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칼리아리 특별시를 비롯하여 오리스타노 주, 누오로 주, 카르보니아 주, 사사리 주, 올비아 주, 메디오 캄피다노 주, 올리아스트라 주 등이 있다.

서기 2014년 3월 경 구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주의 섬. 그곳에는 내전이 있었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 부패하였고, 경제적으로는 디폴트(default) 채무 불이행상태이었고 국가 파산 직전이었다. 사르데냐주는 망국으로 향하는 이탈리아로 부터 독립을 원하는 지역 세력이 생겼고, 별도의 국가가 되길 원했다. 이탈리아 정부로 부터 독립되길 공식 요청했으나 이탈리아는 이를 묵살 하였다. 사르데냐 독립군은 샤르데냐 주 안의 이탈리아 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이 발발하였다. 샤르데냐 주의 부유한 사업가인 로베르토 알 미르는 샤르데냐 군을 지원하였고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사르데냐 독립군은 사르데냐 땅에서 이탈리아 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고 샤르데냐 지역 원로는 독립의 주역인 로베르토를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국제 사회에서 여러 국가가 사르데냐 주의 신 국가를 인정하였다.

오늘날의 하늘미르 왕국은 입헌군주국이며, 제5왕국 이후 의회에서 선출된 제1집정관과 왕실에서 임명한 제2집정관을 행정수반으로 하여 통치하고 있다. 국왕은 국가원수로서 상징적인 역할만 한다. 하늘미르 왕국은 가상국제연합비상임이사국이었다가, 2018년 3월 3일 사무총장의 비상임이사국 해산 선언으로 현재는 이사국이다. 2019년 1월 유럽연방유럽연합, 가이아 세계관에 가입하였다.

역사

이탈리아 왕국 및 이탈리아 통일

하늘미르 왕국의 시작은 이탈리아 왕국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Vittorio Eman­uele II)은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Camillo Benso di Cavour) 백작이 1852년에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통일 이른바, 리소르지멘토(il risorgimaento)를 시작하였다. 카보우르는 사르데냐 왕국 혼자서는 통일을 추진하기에는 국력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자, 대신에 영국이나 프랑스을 끌어드려 이탈리아 반도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몰아 낼려고 구상하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와 영국을 도와 크림전쟁에 참전하였지만 파리 조약에서 협상과정에서 무시당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성과도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크림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하다가 러시아의 관계는 망가졌고 외교적으로 고립이 되었기 때문이다.

1858년 여름 어느 날 카보우르는 나폴레옹 3세를 방문하며 공동으로 오스트리아를 치기로 합의하며, 프랑스에 다시 한번 제안을 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배했던 롬바르디아 지방과 베네치아 지방을 사르데냐 왕국이 얻는 대신에 프랑스는 사르데냐 왕국으로부터 니스와 사보이를 교환하기로 하며 비밀협정인 플롱비에르 밀약을 체결한다.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롬바르디아 지역의 혁명운동을 부추겨 오스트리아가 군사를 일으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프랑스와 사르데냐 왕국의 비밀협정을 알 일이 없는 오스트리아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1859년 3월 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가 처들어 오지 않자, 프랑스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획을 포기하고 전국 동원령을 선포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 왕국을 얕보고 이를 도발 행위로 간주하며 동원령을 해제, 군대 해산을 요구하며 이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린다. 하지만, 사르데냐 왕국을 이 요청을 묵살하였다. 당시 사르데냐 왕국이 지배하고 있던 피에몬테를 침공하며 오스트리아와 사르데냐 왕국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에마누엘 2세 국왕과 카보우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 플롱비에르 밀약에 따라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하면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쟁이 끝나게 된다. 1859년 6월 4일 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와 사르데냐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에 대승을 거두었고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었다. 같은 달 24일에는 롬바르디아 솔페리노 지역에서솔페리노 전투가 벌어졌고 오스트리아에서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직접 출정했지만 사르데냐 왕국 - 프랑스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평화협상을 시작하는데 이때 당사자인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인 비토리오는 배제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통일 이탈리아 출생으로 프랑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였고 적당한 수준에서 강화를 하며 마무리를 지을려고 했다. 7월 11일 빌라프란카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제외하고 베네토를 사르데냐에 할양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에 대해 불간섭을 약속하였다. 예상보다 적은 소득에 불만인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군사원조를 잃지 않기 위해 동의하였고 이렇게 전쟁은 끝나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는 사르데냐 왕국과의 비밀 협정(플롱비에르 밀약)을 어긴것이 되어 니스와 사보이는 양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 휴전협정은 1859년 11월 10일 취리히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사르데냐 왕국은 격분하였고 카보우르는 수상직에서 사임하였다. 고조된 이탈리아의 통일 기운이 진정되지 않았고 사르데냐 왕국의 군대와 관리들을 중부 이탈리아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를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도 이를 막을 여력은 없었다. 파르마, 모데나, 토스카나에서 잇따라 반란이 발생하였고 포라라등과 연합하여 중앙 이탈리아 연방(United Provinces of Central Italy)을 구성하고 곧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된다.

카보우르는 1860년 1월에 다시 수상직에 취임하였고 중앙 이탈리아 연방을 인정받는 협정(토리노 조약)을 맺게 되는데, 나폴레옹 3세는 합병을 인정하는 대가로 니스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이를 동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르데냐 왕국은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주세페 마리아 가리발디(Giuseppe Maria Garibaldi)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프랑스로부터 할양해준 자신의 고향인 니스를 되찾으려고 하지만, 가리발디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려는 것을 막기위해 시칠리아의 반란을 지원해달라고 설득 하였다.

1860년 5월 가리발디는 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반군 패전병과 합류하여 5월 13일에 정규군을 격파하였다. 5월 14일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름으로 시칠리아 섬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주도인 5월 27일에 팔레르모에 위치한 테르미니 항구를 둘러싼 전투가 벌어졌다. 나폴리 장군이었던 페르디난도 란차(Ferdinando Lanza)는 팔레르모를 포격하였지만, 영국의 해군 제독이 개입하며 휴전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폴리의 왕립군과 군함들은 철수하였고 팔레르모 시는 가리발디에게 항복한다.

이러한 사실이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국가적인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고 양시칠리아 왕국은 충격에 빠졌다. 팔레르모에 이어 시칠리아의 도시인 메시나까지 공격하며 메시나 해협을 건나 이탈리아 본토로 원정을 떠났다. 시칠리아와 가까운 칼라브리아주는 크게 저항 하지 않았고 가리발디의 군대에 바로 항복하며 무혈로 입성하게 된다. 코센차, 에볼리까지 진격하였고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인 프란체스코 2세는 4천명의 군대와 함께 후퇴한다. 볼투르노 강(Volturno)에서 견고한 요새를 만들었다. 1860년 9월 7일 나폴리 시로 입성하였고 볼투르노 격전에서 가에타 요새(성채)를 무너트리며 양시칠리아 왕국을 무너트린다.

이후에 나폴리, 시칠리아, 마르케 움브리아는 국민 투표를 통해서 합병을 선언하였고 1861년 2월 18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토리노에서 첫 번째 이탈리아 의회의 대의원들을 소집하였고 17일에는 이탈리아 왕으로 공표하였다. 통일 이탈리아는 헌법적, 의회적 정부 체제를 취하고 국민 주권적 원칙과 군주적인 전통을 융합시키게 된다. 같은달 27일에는 이미 교황령의 수도인 로마를 통일 이탈리아의 새로운 수도로 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로마에는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군을 로마에 주둔시켜 교황령을 보호 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정부는 로마에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기회는 찾아왔다. 1870년 7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마지막 교황령을 점령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더 이상 교황령을 보호 할 수 없었고 자국인 프랑스의 방어를 위해 로마에서 주둔시킨 군대를 송환해야 했다. 프랑스 내부에서 스당전투에 패배로 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한 후 이탈리아 정부에게 로마를 획득하라고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개 된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은 폰차 디 산 마르티노 백작을 교황 비오 9세에게 보내 이탈리아군이 교황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무혈입성을 허락해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교황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고 이탈리아 정부는 1870년 9월 19일로마를 포위하며 결국 로마는 이탈리아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로써 로마와 라티움은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로 흡수되었고 교황령은 멸망하며 로마내에 바티칸 시로 축소되었다.

1866년 프로이센 왕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독일어: Otto Eduard Leopold Fürst von Bismarck-Schönhausen)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이탈리아 왕국에 동맹을 요청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오스트리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이 전쟁의 승리하면서 베네치아를 이탈리아로 병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왕국 성립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됨에 따라 이탈리아는 사보이 왕가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피에몬테주 피렌체 왕자에서 군림하는 국민 국가가 되었다. 통일 이전부터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첫 수상이 되었고 통일 전쟁에서 공을 세운 주세페 가리발디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의회를 구성하면서 이탈리아의 정치 지형은 좌우로 나뉘게 되엇고 당시 우파는 사르데냐 왕국 출신의 구 정치인, 지주, 로마 카톨릭 지지 세력, 군부 등의 지지를 받는 보수파, 좌파는 자유주의, 급진주의자 그룹이다. 초대 수상인 카밀로 카보우르가 사망하자 내각은 주로 보수파가 집권햇지만 간간히 좌파가 득세하기도 했다.

20세기에는 이탈리아 왕국은 제국주의적 국가가 되었고,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트리폴리를 지배하며 이탈리아령 트리폴리타니아를 세웠고 이탈리아령 리비아를 세워 이 둘을 합병하여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에는 이탈리아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군으로부터 자국 방어하는 것만을 바랬다. 당시 이탈리아 수상이었던 안토니오 사란드라(Antonio Salandra)는 이번 전쟁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이탈리아 북부 티롤과 달마티아를 비롯한 아드레아 해를 넘어 발칸 반도 지역을 병합하고자 했다. 사란드라의 야심은 삼국 협상과 이탈리아 사이에 맺어진 비밀 조약이었던 런던 조약으로 실현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진영에 참전하게 되는 대신에 트렌티노, 남티롤, 트리에스테, 이스트라 반도, 달마티아 북부, 아드리아 해와 접한 도서, 피우메 지역을 양도 받기로하는 약속을 한다.

이탈리아 내의 국민 대다수와 카톨릭, 정치인, 농민, 사업가 등 각계각층이 참전에 반대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랜 정치적 혼란이 있었고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었는데다가 전쟁으로 인한 경제 불안과 높은 세금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사란드라는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1915년 봄에 이탈리아 전쟁에 뛰어들었다. 명분은 이탈리아의 동이 없이 세르비아를 침략했다는 사유이다. 이탈리아는 초기 87만 5천명의 병력으로 참전하였지만 지난 튀르크 전쟁에서 많은 전비를 소모해서 화력면에서 떨어진 전력이었다. 결국에는 전쟁 기간 동안 사망 65만, 부상 95만이라는 막대한 희생이 일어났다.

하지만, 삼국 협상과 함께 승전국이 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동쪽과 북쪽에서 영토를 확장하였고 티롤 백국의 일부, 트리에스테, 이스트라 반도, 자다르 일부를 할양 받았다. 하지만, 애초에 런던 조약에 포함되었던 다른 지역은 병합하지는 못면서 불구의 승리(Vittoria mutilata)라는 한계가 있었다.

파시즘의 등장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이탈리아와 삼국협상 사이에 맺은 비밀 조약인 런던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내부에서는 불구의 승리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이에 민족주의적 선동이 뒤를 따랐고 1919년 3월 23일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파쇼정당을 세웠다.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대던에 참전했던 군인이었고 아반티(Avanti, 전진)이라는 사회당의 기관지 편집장이었다. 하지만 사회당과 결별한 뒤에 이탈리아 투쟁 결사(Il 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를 결성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극심한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은 정치 불안의 원인이 되었고 노동자는 총파업하고 공장과 농농장을 점령하여 노동자 자주 경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농업지역에서는 노업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장 점령이 시도되어 우익 세력과 충돌하기 이르렸다.

사회주의 혁명이 시도되자 우익은 민족주의를 내세워 무솔리니의 파쇼 정당으로 결집하였고 1920년 조바니 졸리티가 수상에 올랐으나 사회주의 세력에 대응하지 못했고 1921년 무솔리는 파쇼정당의 이름을 국가 파시스트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으로 바꾸며 중산층의 지지를 확대하였다. 파시스트가 내각 해산을 압박하자 졸리티 수상은 더이상 내각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조기 총선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파시스트당이 총선에서 과반 획득에 실패하였고 졸리티 총리가 연정구성을 제안했으나 무솔리니는 이를 거부하고 정권을 파시스트 당에 넘기라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파시스트당은 내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고 이른바 검은셔츠단이라고 불리는 국가안보의용민병대(Milizia Volontaria per la Sicurezza Nazionale; MVSN)을 동원하여 로마 진군을 감행하였다. 수상이 공석이었고 당시 국왕이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수상으로 지명하였다. 수상이 된 무솔리니는 자유주의측 인사들과 연합하여 정부를 구성하였고 사회당 지도자인 자코모 마테오티는 파시스트의 부정선거를 비난하다 살해되었다. 1925년 12월 24일 무솔리니는 수상이 왕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의회의 결의를 무시할 수 있는 법률을 통과하였고 자치단체장은 해임되고 지방의회는 해산 되는 동시에 중앙정부에서 포데스타(Podesta)라는 집정관에 의해 통치되었다. 1928년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의회를 폐지하고 자신이 지명하는 400인의 의원들로 구성된 파쇼 대의회로 대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파시즘의 몰락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나 즉각적인 군사 개입을 하지 않았다. 무솔리니와 파쇼정권은 유럽 보다는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의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국왕이 임명한 군사령관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탱크를 비롯한 이탈리아 군의 군비가 충분하지 않다고 하며 참전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까지 말했다. 무솔리니는 바돌리오의 의견을 수용해서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할 때 까지 유럽 전선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1940년 6월 10일 프랑스가 함락되고 무솔리니는 유럽전선에 참전하였다. 이탈리아는 프랑스 사보이, 니스, 코르시카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프랑스의 식민지인 튀니지알제리를 군대에 파견하였고 나치 독일은 6월 22일 프랑스의 육군 원수인 필리프 페텡과 정전 협정을 맺었고 이탈리아가 점령지를 프랑스에게 반환하도록 했다. 파쇼 정권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고 1940년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영국군에게 패퇴하였다. 무솔리니는 발칸 반도를 점령하려고 하였고 그리스와 전쟁을 일으켰다. 전선이 길어지고 독일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략하면서 발칸 전역이 형성 되었다. 1941년 4월 독일이 그리스를 이탈리아는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발칸 반도 각지에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유고슬라비아 저항운동 조직)을 비롯하여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도시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자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1942년 11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지역의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추축국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패퇴하였다. 1943년이 되면서 이탈리아는 모든 전선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1월에는 동부 전선에 파병되어있던 이탈리아 군이 소련의 붉은 군대에 패하였다. 발칸 반동의 점령도 점점 불안정해졌고 1943년 7월에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이후에는 이탈리아는 본토도 방어 할 수 없는 상태에 일으렀다. 당시 이탈리아의 국회격인 파시즘 대평의회는 무솔리니의 탄핵을 의결하였고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피에트로 바도리오(Pietro Badoglio)를 새 수상으로 지명하였다. 바돌리오 수상은 파쇼 정권의 종식을 선언하고 카시빌리 정전협정을 맺고 이탈리아의 항복을 협의하였다. 이탈리아군은 연합군의 산하로 들어가면서 나치 독일과 싸우게 되었지만 발칸 반도에 있었던 주력 이탈리아 군은 독일에 항복하고 계속해서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무솔리니는 구금 상태였지만 독일 공수부대를 이끌고 있던 오토 슈코르체니(Otto Skorzeny)는 그랑사소 습격 작전으로 구출되며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괴뢰정권인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탈리아군 대부분이 여전히 무솔리니의 지휘를 받는 국가공화군(파시스트군)에 편입되어 있었다. 연합군과 국왕을 지지하는 이탈리아 군은 이탈리아 협력군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파르티잔(레시스텐자, 파시스트 저항단체, 이탈리아 독립군)은 독일군과 파시스트 군을 상대로 격렬한 게릴라 전을 수행하였다.

독일은 이탈리아 점령지에서 파시스트 군대와 함께 아르데아티네 학살, 산타나 디 스타체마 학살 같은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1944년 6월 연합군은 로마에서 독일군을 몰아냈고 1945년 4월 27일 무솔리는 스위스 국경까지 도주하다가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었다. 다음날인 28일 파르티잔의 조직인 국민해방위원회는 무솔리니에 대해 사형을 의결하고 즉각 처형하였다. 처형된 시신은 밀라노에 있는 주유소에 다른 15명의 파시스트와 함께 내걸렸다. 최후 전선이 고딕전선이 5월 2일에게 무너지면서 파시스트군이 무너졌다.

바도리오 내각이 9개월 정도 유지되었으나 1944년 6월 9일 반파쇼 정치지도자인 당시 70세의 이바노에 보노미가 수상이 되었지만 한달만에 사임하고 파르티잔의 출신인 페루치오 파리가 수상이 되었다. 1945년 6월까지 내각을 이끌었으나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가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국왕도 1946년 5월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아들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를 하며 물러났다.

이탈리아의 분리 독립, 하늘미르 왕국 건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극심한 사회문제도 일어났고 사회 정치적 분열도 심항 상태였다. 1946년 5월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스스로 퇴위하여 움베르토 2세(Umberto II)가 즉위햇지만 군주제를 유지할 경우 이탈리아는 내전에 처할 위기에 있었다. 1946년 이탈리아 개헌 국민투표에서 54%가 공화정을 지지하면서 이탈리아는 사실상 공화정으로 바뀌는 듯 했다. 하지만, 사르데냐는 39.1%가 공화정에 찬성하였고, 60.9%는 현행대로 군주정을 유지하자는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 사르데냐 내에서는 분위기는 왕정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대다수였다.

6월 2일 이탈리아 공화정을 선포하였고 움베르토 2세가 한 달 가량 재위를 끝으로 폐위되었다. 공화국 선포 이후 제헌의회에서는 엔리코 데 니콜라(Enrico De Nicola)가 첫 대통령을 선출 하였다. 이탈리아의 들어선 새 공화국 정부는 왕족인 사보이 왕가의 모든 남성을 국외 추방을 명령하였다. 움베르토 2세를 비롯하여 사보이 왕가는 이에 저항하였고 사르데냐 왕국의 근원이 되는 사르데냐 주에 피신하였다.

사르데냐인들은 사르데냐 왕국에서부터 이어와 공화정보다는 왕정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사르데냐 주민들은 이탈리아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언어부터 토종 사르데냐어와 다른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생활방식도 본토의 방식과는 다른점이 있었다. 당시의 사르데냐 민족주의자와 왕정 찬성파, 자본가들은 공화정이 된 이탈리아와의 분리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창하였고 많은 사르데냐인들은 이에 공감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흉이었던 무솔리니를 임명한 사보이 왕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기도 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거대한 국채, 엄청난 세금 등 경제가 황폐화된 이탈리아와 함께 갈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이탈리아 분리 독립 찬성론자도 있었지만 이탈리아와 한 몸이 되어야 살 수 있으며, 현재의 분리독립으로는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없다는 주장한 분리 독립 반대론자들이 있었다. 분리 독립 반대론자들은 대부분 공산당 당원이었다. 이런 가운데에서 사르데냐주 주민을 대상으로 1946년 7월 19일 이탈리아 분리독립 찬반 주민 투표에서 찬성 73.5%로 분리 독립에 찬성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왕정을 지지했다.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로서는 이 결과에 납득할 수 었었으며, 이는 헌법을 위반한 주민 투표이며 무효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분리독립론자들은 공산세력을 견제하던 미국과 프랑스, 영국등 서방세력들을 설득하였고 이탈리아에게 서서히 압력을 가했다. 사르데냐 내부에서도 강력하게 이탈리아의 억압 정책에 반발하며, 자체 민병대를 조직하여 사르데냐 주의 도시에 이탈리아 정부 기관과 군 기관을 점령하였고 섬 봉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탈리아인의 사르데냐 섬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사르데냐섬에 있던 이탈리아의 자산들이 전부 넘어가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민병대는 사르데냐내에 있는 이탈리아 군을 몰아내었고 이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은 이를 중재하에 당시 사르데냐를 임시 통치하고 있던 일부 원로들과 이탈리아 정부 관계자와 협상을 한 끝에 1946년 12월 9일 협상안을 도출하였다. 협상 요약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사르데냐 주에 대한 분리 독립은 인정하며, 국체 역시 사르데냐 주민의 뜻에 따라 결정한다.
2. 왕정으로 할 경우 사보이왕가의 자손들이 왕가를 맡는 것은 안되며, 국명은 이탈리아 왕국,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 사르데냐 왕국, 사보이 왕국 등 사보이가를 연상시키는 국명을 정해서는 안된다.
3. 사보이가의 정치 참여를 금지한다.
4. 사보이가는 이탈리아 공화국을 입국을 금지한다.
5. 이탈리아인과 사르데냐인들의 거주, 이동, 교류, 경제 등 다양한 자유를 보장해야 하며 그 권리를 보장하는데 있어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
6. 이탈리아 문화 및 역사, 이탈리어 교육을 의무로 실시해야 한다.
7. 상호 국가간 역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
8. 이탈리아 및 사르데냐가 위치한 영해(티레니아 해) 및 영공을 공유한다.
9. 이탈리아와 사르데냐 기업의 사업 자유를 보장하며, 상호 경제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10. 사르데냐 내에 있는 새로운 국가는 이탈리아의 자산을 보호해야고 이탈리아 자산을 사용할 시에 이탈리아 공화국에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11. 이탈리아의 국민과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체 군대를 파견하고 관리를 파견한다.
12. 연례마다 열리는 이탈리아 연합 훈련에 참여해야 하며, 상호 군사 마찰 및 선전포고를 금지하며 불가침을 원칙으로 한다.
13. 사르데냐 새로운 국가는 이탈리아 공화국을 최혜국으로 인정해야 한다.
14. 조약에 제시된 사항 외에는 내정 간섭을 금지한다.
15. 이탈리아 공화국은 조약에 제시된 사항 외에는 사르데냐 새로운 국가에 대한 내정 간섭을 금지한다.

— 1946년 12월 9일 칼리아리 조약

미국, 프랑스, 영국의 중재아래 성립된 협상 조약으로 이 조약을 칼리아리에서 체결하여 칼리아리 조약이라고 한다. 이날 모든 사람들이 나와 독립을 축하하는 파티를 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칼리아리 조약은 대외상으로는 분리독립이 되었으나 대내상에는 높은 수준의 자치라고 평가된다.

1947년 1월 신 국명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운 국가의 명칭을 결정하였다. 조직위원회는 5명의 원로들이 참석하였다. 사사리-올비아를 다스렸던 마테오 미르(Mateo Mir) 후작을 비롯하여 안젤로 루카(Anjelo Lucca) 대주교, 사르데냐 상공협회(하늘미르 상공회의소 전신)장 레나르도 지오르다노(Renardo Giordarno), 사르데냐 자치 위원장 리카르도 마르치오(Riccardo Marcio), 사르데냐주 법원장 마씨모 지오르지오(Maximino Giorgio) 등이 참석하여 국명을 정했다. 국명은 각 위원들이 새로운 국가에 어울릴 만한 단어를 하나씩 제시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탈리아와의 차별을 두기위해 라틴어에 기반한 사르데냐어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마테오 미르 후작은 nŏvus(새로운), 안젤로 루카 대주교는 universális(보편적인, 만인공통인), 레나르도 지오르다노상공협회장은 honoris(명예), 리카르도 마르치오 사르데냐 자치 위원장은 autŏnomía(자치, 자율, 주체성), 마씨모 지오르지오 법원장은 libértas(자유, 자유시민권, 자주독립)을 제시하였다. 이것을 적절하게 조합한 결과 HANUL 이라는 조합이 나왔으며, 라틴어 계열의 특성상 h는 묵음 처리가 되기 때문에 [아누르-]로 발음 된다. 영어권은 이를 [해널-]로 발음한다. 후에 동양에서는 한국어로 [하늘]이라 발음하기도 한다.

이렇게 신 국명으로 HANUL이 정해졌고 이번에는 누구를 왕좌에 앉히느냐가 정해졌다. 국왕은 국가의 정신의 통합의 구심이며, 국민 총의에 기초한 자여야 하므로 원로들의 합의에 따라 입헌군주제의 특성상 의회의 선출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47년 4월 30일 하늘미르의 제헌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5월 1일에 제헌의회가 구성되었다. 제헌 의회에서는 사보이가가 아닌 하늘미르 왕국에 독립에 기여하고 현재의 회복 및 발전에 물질적, 정신적으로 도움을 준 마테오 미르 후작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의결하였다. 또한 제헌헌법을 제정하였고 7월 28일 제정된 헌법을 최초로 공포하였다. 이것에 제1대 하늘미르 왕국 헌법이다. 마테오 미르 국왕의 가문인 미르(Mir)를 신 국명에 붙여 ´HANULMIR´ 가 되었다.

제1왕국 (2017. 7. 28 ~ 10. 25)

제2왕국

제3왕국

제4왕국

제5왕국

상징

정치

국가형태

하늘미르 왕국은 연방제가 아닌 단일국가로 구성되어있다. 하늘미르 왕국은 국왕이 헌법에 입각한 국가인 입헌군주국이다. 따라서 국왕의 권력은 국민과 헌법으로 부터 나오는데 다만 제1왕국 시기에는 왕령을 통한 국왕의 권력이 제왕적 권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그 권력을 자체 축소 내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제2왕국에는 국민적 여론의 부흥해서 제2차 헌법을 개정을 통해 하늘미르 왕국 국왕과 왕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여 다른 여타 입헌군주국과 동일한 국가가 되었다.

정부형태

제1왕국 정부형태

의원내각제, 왕실 - 내각 이원집정부제
정치적으로는 의원내각제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회와 내각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다. 다만 하늘미르 왕국의 특이점은 왕실 - 내각 이원집정부제 형태이다. 왕실은 외교실과 국방실을 중심으로한 외교 및 국방행정을 담당하며 내각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나머지 행정분야를 맡은 이원집정부제 형태를 띄고 있다.

제2왕국 정부형태

의원내각제, 총리 중심제
제2왕국은 헌법이 개정됨에 따라 국왕이 담당했던 외교 및 국방행정 권한이 내각총리에게 이양되면서 책임총리제를 넘은 총리중심제로 변모하였다. 총리는 모든 행정권한을 가진 행정수반 이며 실질적인 대외 국가 원수의 역할을 한다. 국왕은 상징적인 국가 원수가 된다. 국 내 다수당이 내각(수상과 각료)을 구성하는 정부 형태로 수상이 정치적 실권 행사한다. 의원 내각제에서는 국회와 행정부의 권력 융합이 이루어지므로 엄격한 권력 분립과는 거리가 있으며, 의회는 내각 불신임권을 가지고, 내각도 의회 해산권이 있다. 의원 내각제는 국민의 민주적 요구에 충실한 책임 정치 구현이 가능한 제도이지만, 다수당의 횡포를 저지할 수 없고 군소 정당의 난립 시 정국이 불안해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2018년부터 과도해진 정국 불안에 개헌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단원제,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제
하늘미르 왕국 의회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단원제는 의회가 1개의 합의체로 의회를 구성하는 제도로, 민선의원으로 구성되는 단일 합의체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의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하늘미르 왕국 헌법에 따라 '법안심의', '예결산심의', '각종 조약 비준', '선전포고권', '군대 외국 파견권' 등이 있고 추가적으로 내각과 왕실에 대한 '대정부질의권'도 있다. 의석수는 헌법에 따라 200석 이상이어야 하고, 현재는 200석을 유지하고 있다. (정당의석수) 제2왕국에서 헌법이 개정됨에 따라 400석으로 변경되었다.

하늘미르 왕국 의회는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실시하고 있다. 각 정당에서 제출한 목록에 따라 비례대표를 선출하고 정당 득표율에 비례하여 당선자 수를 결정하는 선거제도를 취하고 있다. 각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비율을 의회 구성에 반영한다.

제3왕국 정부형태

총리 직선제
2018년 5월 7일에 공포한 3차 하늘미르 왕국 헌법 제74조 1항에 따라 이전의 의회 총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한 뒤 의회에서 총리를 선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국민이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로 직접 총리를 선출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말로 수상 직선제라고 한다. 총리 직선제는 총리에게 실질적으로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과 거의 같은 권한을 주는 방식부터 의원 내각제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방식까지 다양한 방식을 포괄할 수 있다. 대통령제에 가까운 총리 직선제를 도입할 경우 내각제가 아니라 사실상 대통령제를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총리는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과 성격이 유사해진다. 이 경우 직선 총리가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과 다른 점은 상징적인 국가 원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점 뿐이다. 직선 총리 위에 별도로 상징적인 기능 및 국가 원수 역할을 수행하는 국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4왕국 정부형태

총리 간선제
2018년 11월 19일에 공포한 4차 하늘미르 왕국 헌법 제75조 1항에 따라 이전의 국민이 직접 총리를 선출하는 총리직선제에서 다시 제2왕국에서 실시되었던 의회에서 총리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총리직선제는 결국 의원내각제의 본질을 흐리고 하늘미르 왕국 정치의 기형적인 구조를 가져왔으으므로, 의회중심의 대의민주주의를 부활해야 한다는 여론이 헌법 개헌시기에 부각되면서 4차헌법 주요 내용이 되었다. 이로써 마지막 직선 총리는 박이현(14대 총리)이, 제3왕국 이후 첫 간선 총리는 블라디미르 강치(15대 총리)가 되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2018년 7월 21일에 공포한 선거법 개정5판 제15조에 따라 이전의 하늘미르 전체가 선거구인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소지에 위치한 선거구에서 의회의원을 선출 할 수 있게 되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주소지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키고, 따라서 부동산 시장이 활성화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주소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가국계 전체의 문제인 부계정을 일부 막을 수도 있지만, 정당들이 한 선거구씩 독점한다면 국민의 투표권이 무의미해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제14대 총리선거까지는 주소지가 구현되어있지 않고 주소지에 따라 투표소를 분배하는 제도가 준비되어있지 않아 기존의 방식을 사용했다. 드디어 제11대 총선에서 선거구를 4개로 배정하고 공천 명단을 선거구별로 제출하는 등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일부 구현하는데 성공했지만, 모든 선거구마다 투표를 할 수 있어 아직까지 완벽하게 구현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의석수는 2018년 11월 19일에 공포한 4차 하늘미르 왕국 헌법 제50조 2항에 따라 이전의 200석 이하에서 100석 이하로 축소되었다.

제5왕국 정부형태

2인 집단지도체제(과두정)
2019년 7월 10일에 공포한 5차 하늘미르 왕국 헌법 74조 2항에 따라 총리가 행정수반이었던 총리중심제에서 제1집정관과 제2집정관이 행정수반이 된다. 대부분의 업무는 두 집정관이 협의하여 결정하나, 일부 업무[1]에서는 결정권을 가진 집정관이 나뉜다. 우선권을 가진 제1집정관은 하원의 간접 선거로 선출되어 양원의 의결로 파면된다. 제2집정관은 왕실에서 임면권을 가진다. 양원과 왕실은 반대되는[2] 집정관의 탄핵 소추가 가능하다. 5차 헌법 제78조에 따라 집정관의 임기는 4개월이고, 제1집정관은 양원, 제2집정관은 국왕의 동의를 얻어 연임할 수 있다. 집정관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5차 헌법 제92조에 따라 두 집정관은 의무적으로 장관 임명권을 협의를 통해 분배해 행정명령으로 공고해야 한다.

양원제
의석수는 2019년 7월 10일에 공포한 5차 하늘미르 왕국 헌법 제50조 2항에 따라 하원은 이전의 100석 이하에서 50석 이하로 축소되었고, 상원은 하원의 절반 이하로 결정되었다. 5차 헌법 이후 처음 실시된 선거인 제1대 양원 총선거에서는 하원 50석, 상원 10석으로 지정되었다.

선거

하늘미르 왕국 양원 의원 총선거

역대 하늘미르 왕국 의회 의원 총선거

하늘미르 왕국 지방자치단체 선거

하늘미르 왕국 집정관 선거

역대 하늘미르 왕국 총리 선거

외교

하늘미르 왕국 외교하늘미르 왕국 외교안보부에서 그 업무를 담당하여 수행하고 있다. 하늘미르 왕국은 과거에 가상국제연합에서 비상임이사국이었으며, 현재는 이사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늘미르 왕국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원수는 국왕이지만, 실질적인 외교 업무는 하늘미르 왕국 헌법에 따른 행정수반인 집정관(제5왕국 이전에는 총리)가 총괄하고 있으며 실무자는 외교안보부이다.

하늘미르 왕국과 수교한 국가는 총 24개국(동맹국 4개국 포함) 이고 하늘미르 왕국이 가입한 국제 단체 및 기구는 가상국제연합, 세계경제협의회, 평화포럼, 유럽연합, 유럽연방, 가상안보회의총 6개 단체 이며, 가입한 세계관은 레티시아 유니버스, 가이아 세계관, UVN 공동세계관으로 총 3개(2019년 12월 29일) 이다.

제3왕국 이후 외교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외교안보부에서 담당한다. 통상적으로 외교안보부 장관은 수교와 단교 절차를 진행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승인권도 국가를 위임해서 보장받고 있다. 다만, 집정관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수교와 단교 절차 승인이 반려되거나 뒤집어질 수도 있다. 타 국가에 비해 수교와 단교 절차가 간단한 편이다.

행정 구역

하늘미르 왕국의 행정구역체제는 특별시(이탈리아어: Capitale delle Hanulmir regno), 주(이탈리아어: Regione), 시(이탈리아어: città), 구(이탈리아어: distretto)로 나뉜다. 특별시는 수도인 칼리아리 특별시이다. 특별행정구역법에 따른 특별행정시(이탈리아어: Regione Speciale)인 뉴 칼리아리 특별행정시는 '주'급의 행정구역이지만 선거구는 획정하지 않는다. 하늘미르 왕국의 행정구역은 1특별시, 1특별행정시, 7주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시 (Capitale delle Hanulmir regno), 주 (Regione), 특별행정시 (Regione Speciale) 주도
칼리아리 특별시 (Cagliari Capitale delle Hanulmir) 칼리아리 (Cargliari)
오리스타노 주 (Oristano Regione) 오리스타노 시 (Oristano città)
누오로 주 (Nuoro Regione) 누오로 시 (Nuono città)
카르보니아 주 (Carbonia Regione) 카르보니아 시 (Carbonia città)
사사리 주 (Sasari Regione) 사사리 시 (Sasari città)
올비아 주 (Olbia Regione) 올비 시 (Olbi città)
메디오 캄피다노 주 (Medio Campidano Regione) 빌라치드로 시 (Villacidro città)
올리아 스트라 주 (Oliastra Regione) 토르톨리 시 (Tortolì città)
뉴 칼리아리 특별행정시 (New Cagliari Regione Speciale) 뉴 칼리아리 (New Cargliari)

자연환경

동쪽에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와 중간에 있는 바다는 티레니아 해로 불린다. 북쪽에는 보니파시오 해협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령 코르시카(코르시카 섬)과 분리되어있다. 티르소, 사마시 등의 강이 흐르고 있지만 대체로 산악 지역이다. 대부분 화강암과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산악지대로 최고봉은 라마르모라산(1,834m)이다.

경제

경제체제

하늘미르왕국의 경제체제는 수정자본주의이다.

화폐

하늘미르왕국의 화폐단위는 하늘미르달러(HMD), 미르(MIR) 이다. 10HMD는 1UND이며, 1HMD는 1,000MIR이다. 환율은 2,600KRW = 1HMD = 2유로와 1UND = 100HMD 이다. 화폐종류는 1, 5, 10, 50, 100, 500 HMD의 지폐와 10, 50, 100 MIR의 동전이다. MIR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국민총생산(GDP)

하늘미르왕국의 국민총생산(GDP)는 49,261,121,241 USD 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29,747 USD 이다.

산업

전형적인 지중해식 기후로 여름에 온도가 높고 건조하기 때문에 해안이나 강유역의 관개 경작지에서 과수가 재배될 뿐, 그 밖의 농산물 재배는 보잘것없고 대체로 염소나 양 등이 방목된다. 수산업이 중요하여 참치 ·바닷가재 ·정어리 등을 잡는다. 칼리아리 부근의 소금 채취, 납 ·주석 ·망간 등의 광업 이외에는 이렇다 할 경제활동이 없는 후진적인 지방이었는데, 1950년대부터 구 이탈리아 정부가 개발정책을 추진하여 티르소강(江) 등에 댐이 건설되고, 또 칼리아리를 중심으로 공업화가 진행되어 정유공장과 석유화학공업단지가 조성되었으며, 식품가공업·섬유가죽제조업이 발달하였다. 주요산업은 광업으로 아연과 납을 비롯하여 갈탄·보크사이트·구리·철 등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누오르 주에는 천혜의 관광자원으로 관광업도 발전하고 있는 추세이다.

인문환경

교통

하늘미르 왕국 교통은 크게 육상교통, 철도교통, 해상교통, 항공교통으로 나눠진다. 교통과 관련한 법 규범은 도로법, 항공법 등의 법률이 있으며 행정규칙도 포함하고 있다. 하늘미르 왕국은 기본적으로 좌측 통행을 우선하고 있으며, 이는 구 이탈리아 시절의 통행 규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제1왕국 로베르토 알 미르 국왕 시절 하늘미르 왕국 왕실은 "과거 관습대로 통행한 좌측 통행을 우측 통행으로 바꿀 경우 교통에 큰 문제가 발생 할 수 있으니, 구 이탈리아 시절의 통행규칙을 그대로 받아들여 좌측 통행 할 것." 이라 왕실 행정명령을 통해 그대로 좌측 통행으로 이어졌다. 국제공항은 칼리아리 엘마스 국제공항,알게로 페르틸리아 국제공항,올비아 코스타 스메랄다 국제공항을 가지고 있으며, 공항은 국제공항을 포함하여 5개의 공항을 가지고 있다. 하늘미르 왕국의 교통 행정은 하늘미르 왕국 국토교통부가 담당한다.

인구

연령대 인구수(명) 인구비율
9세 이하 54,474 3.289%
10대 137,977 8.332%
20대 228,436 14.111%
30대 264,033 15.947%
40대 282,616 17.066%
50대 266,460 16.091%
60대 102,476 9.812%
70대 103,784 6.271%
80대 39,392 2.378%
90대 4,952 0.299%
100세 이상 371 0.022%

하늘미르력 8년, 총리실 인구총조사 결과 인구증가율은 1.57%이며 8년동안 증가한 인구는 190,795명이 증가한 1,846,798명이고 이중 유권자는 1,514,373명이고 인구밀도는 1㎢당 76명이다. 하늘미르 왕국이 국제 사회와 수교가 넓어짐에 따라 대외 인지도가 크게 증가하였고 외교안보부가 이민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취함에 따라 이민이 크게 증가한 요인이 되었다. 단순 이민뿐만 아니라, 하늘미르 왕국은 천연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투자이민쪽으로 증가가 되고 있다. 하늘미르력 1년의 인구는 1,656,003여명이다. 이중 유권자는 1,357,922여명이다. 인구밀도는 1㎢당 68명이다.

언어

사르데냐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여성들
사르데냐어 (표준어) 이탈리아어 카탈루냐어 기타 언어
70% 28% 소수 극소수

인도유럽어족 이탈리아어파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사르데냐어는 하늘미르 왕국[3]에서 쓰이는 로망스어로, 이탈리아 반도와 그 밖의 이주한 자를 포함하여 화자수는 약 25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음운면에서 로망스어 가운데 가장 보수적으로, 발음 면에선 옛 라틴어에 가장 가까운 언어로 여겨지고 있다.

사르데냐어는 많은 방언과 하위 방언을 가지고 있다. 사사리시를 포함해 섬의 북서단에 위치한 "사사리아 방언", 섬의 북동단의 갈루라 지방에 분포하는 "갈루리아 방언", 섬의 남쪽 반을 차지하는 지역에 분포하는 "캄피다니아 방언"이 있다. 사사리아 방원 및 갈루리아 방언에는 본래의 사르데냐어에서는 볼수 없는 특징등이 있는데 사사리아방언은 이탈리아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갈루리아 방언은 갈루라 지방은 근세에 코르시카 섬에 많은 이주민이 건너왔다. 일부 지역에서는 카탈루냐어도 쓰인다.

하늘미르 왕국 건국위원회 하부조직인 '표준 사르데냐어 위원회'에서는 수도인 칼리아리지역과 대다수 사람들이 사용하는 캄파다니아 방언을 위주로 표준 사르데냐어를 제정하였고 건국후 교육문화부에서 최종 인가를 하여 표준어로 인정하였다.

종교

가톨릭교 무교 개신교 이슬람교 기타종교
84% 12% 4% 3% 1%

하늘미르 왕국은 국교가 정해진 바가 없다. 국왕을 포함한 대다수 국민들은 로마 가톨릭교 신자이다. 그 다음은 무교이며, 개신교 신자도 있다. 이민자들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교, 불교 및 기타 종교가 극 소수로 존재한다.

군사

하늘미르 왕국군(영어: Armed Forces of Hanulmir Kingdom, 이탈리아어: Forze armate di Hanulmir regno) 혹은 국왕의 군대(영어: Armed Forces of Hanulmir Kingdom, 이탈리아어: il Forze armate di Hanulmir re)는 하늘미르 왕국의 군대이다. 하늘미르 왕국군의 명목상의 최고 지휘권은 하늘미르 왕국 국왕루이지 마르코 미르에게 있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의 행사는 국왕의 이름으로 총리가 권한을 행사한다. 관리는 하늘미르 왕국 외교안보부가 담당한다. 하늘미르 왕국군은 본국과 해외 영토를 방어하며,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평화를 위해 복무한다. 또한, 하늘미르 왕국의 다양한 미래 국익을 보호하고 국제 평화 유지 활동의 지원을 책임진다.

문화

언론

방송

하늘미르 왕국은 타 가상국가들과 달리 발전되어 있는 방송 사업이 존재한다. 하늘미르 왕국의 방송들은 고품격 방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중요 컨텐츠 중 하나이다. 동시에 하늘미르 언론의 핵심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하늘미르 왕국 모든 방송사는 언론의 한 축으로 하늘미르 언론협회언론 자유화 선언 및 윤리 강령, 하늘미르 왕국 언론방송통신부방송 심의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

하늘미르 왕국의 호출 부호는 과학기술부가 ITU와 협의한 결과 H1으로 시작하는 부호를 배당받았다. 추가적으로 보조 호출 부호로 H와 H0가 있다.

TV 방송의 채널번호는 다음과 같다.

  • 지상파 채널: (VHF - CH 5. ~ CH 12.(=VHF 174~230MHz), UHF - CH 21. ~ CH 69.(=UHF 470~861MHz))
  • 위성방송: (위성 CH 1. ~ CH 400.)

라디오는 현재 FM과 AM 모두 송출이 가능하다. AM의 경우에는 530KHz ~ 1710KHz의 중파 대역과 148.5KHz ~ 283.5KHz의 장파 대역과 수십개의 단파 방송용 밴드를 지정하여 이용하지만 3MHz~30MHz를 쓰는 단파 대역이 존재하며, 송출 가능 주파수 간의 간격은 중파와 장파는 9KHz, 단파는 5KHz이다. FM은 국제표준에 따라 87.5MHz ~108.0MHz를 사용할 수 있다. 송출 가능 주파수 간의 간격은 국제표준에 따라 0.1MHz로 지정한다.

AM 라디오 주파수는 다음과 같다.

  • 단파방송: 3Mhz ~ 30Mhz, 주파수 간격 5Mhz
  • 장파방송: 148.5kHz ~ 283.5kHz, 주파수 간격 9kHz
  • 중파방송: 530kHz ~ 1710kHz, 주파수 간격 9kHz

FM 라디오 주파수는 다음과 같다.

  • FM방송: 87.5Mhz ~ 108.0Mhz, 주파수 간격 0.1Mhz

신문

하늘미르 왕국 신문(영어: Newspaper in the Hanulmir kingdom, 이탈리아어: Giornale delle Hanulmir Regno)은 하늘미르 왕국에서 소식과 사건을 전하는 정기 간행물이다. 하늘미르 왕국 특성상 노인 인구가 많다는 점에서 현재는 종이신문으로 된 형태가 많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인터넷과 전자정부, 스마트 기기의 발달로 종이신문 보다는 인터넷 신문인 뉴미디어의 형태로 대체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하늘미르 왕국 건국이래 최초의 신문은 하늘미르 신문이며, 왕립 신문사 겸 국영 신문사이다. 하늘미르 왕국 모든 신문사는 언론의 한 축으로 하늘미르 언론협회언론 자유화 선언 및 윤리 강령을 준수해야 한다.

교육

스포츠

공휴일

하늘미르 왕국문화교육기록부 '공휴일 및 국경일에 관한 고시'에 의거하여 국가의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하늘미르 왕국은 정교분리 국가이지만 과거 전통과 제1종교가 카톨릭인 만큼 그 전통에 따라 따라 공휴일이 지정되었다. 공휴일에는 정부기관과 관공서, 학교는 의무적으로 쉬지만, 법적으로 강제하지 않는 만큼 민간 기업 또는 단체에는 쉬어야할 의무는 없지만 대게는 이 공휴일의 규칙을 따라서 휴일을 정한다. 공휴일에는 대부분의 시장과 상점가가 쉬는 편이지만, 공휴일에도 여는 상점의 경우에도 일찍 닫는 편이다.

  • 성 에피시오(에피시우스) 축일(국경일) 1월 15일
  • 하늘미르 왕국 국가 축일(국경일) 7월 31일
  • 새해 1월 1일
  • 주현절 1월 6일
  • 부활절 3월 말 ~ 4월 중
  • 노동절 / 성 에피시오 기념 대축제일 5월 1일
  • 성모마리아 승천일 8월 15일
  • 성 사투르니노(사투르니누스) 축일 / 만성절 10월 30일
  •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 12월 8일
  • 크리스마스 12월 25일
  • 박싱 데이 / 성 스테파노 축일 12월 26일

관광

단위

법정 연호

하늘미르 왕국은 이탈리아 시절에는 서력기원을 사용했으나, 2018년 10월부터 하늘미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시간대

하늘미르 왕국은 협정 세계시(UTC, 그리니치 천문대 기준)으로부터 1시간 빠른 시간인 하늘미르 표준시(UTC+1)를 사용하고 있다. 중부 유럽 표준시와 동일하며, HST 기준 3월 마지막 일요일 오전 2시부터 10월 마지막 일요일 오전 2시까지는 서머타임하늘미르 일광 절약 시간대(HSST)를 사용한다.

슬로건 / 모토

당신의 상상을 마음껏 펼치는 국가 또는 당신의 상상을 마음껏 펼치는 가상국가하늘미르 왕국의 모토(motto)이자, 공식 슬로건이다. 초대 하늘미르 왕국 국왕로베르토 알 미르가 주창한 것으로 이 슬로건의 최초 사용은 2017년 8월 28일로 개헌에 대한 국왕의 입장 발표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하늘미르 왕국 소개 문서가 더 빠른 것으로 보이지만, 추후에 소개 문서를 수정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회실험성을 기반으로 관념국가(설정), 시뮬레이터 기반 국가로 만들고 싶은 초대 국왕의 의지를 담고 있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1. 재정분야의 임면은 5차헌법 제92조 3항에 따라 제2집정관에게 고정된다. 중앙은행이 왕실 산하이기 때문.
  2. 양원은 제2집정관의 탄핵 소추를, 왕실은 제1집정관의 탄핵 소추를 진행할 수 있다.
  3. 구, 이탈리아 사르데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