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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인민공화국 제5대 국가소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 허를러깅 처이발상 ᠬᠣᠷᠯᠤᠠ ᠶᠢᠨ ᠴᠣᠶᠢᠪᠠᠯᠰᠠᠩ Хорлоогийн Чойбалса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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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5년 2월 8일 |
청나라 치하 몽골 허를러깅 두가르 (現 몽골 히를러깅 두가르) | |
사망 | 1952년 1월 26일 (향년 56세)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모스크바) | |
재임기간 | 제5대 국가소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 |
1929년 1월 24일 ~ 1930년 4월 27일 | |
정당 | 몽골 인민혁명당(1920년~1952년) |
종교 | 무종교(무신론) |
개요
몽골 인민공화국의 독재자. 1929년 1월 24일부터 1930년 4월 27일까지 몽골 국가소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이어서 1939년 3월 24일부터 1952년 1월 26일 죽을 때까지 몽골의 내각수상을 지냈다.
20세기 담딘 수흐바타르 등과 함께 몽골 독립을 쟁취하고 이후 공산화를 주도하면서 근대화를 이룬 지도자라는 평가와 집권 기간 전무후무한 티베트 불교 말살 정책과 대량 숙청, 학살을 주도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덕분에 몽골의 스탈린이라고도 불렸는데 실제로 둘은 말년을 제외하면 관계가 돈독했다.
몽골 인명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영어 표기를 직역한 초이발산으로 오역되는 일이 많으며 심지어 한국 이름 비슷한 최발산으로 오역되기도 한다.
생애
복드 칸 사후 1924년 공화국이 된 몽골을 보며 1928년 스탈린과 국방인민위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소련의 동쪽 국경에 위치한 몽골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몽골이 소련의 안보를 보위하기 위해 몽골을 철저히 스탈린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1928년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사절단은 수흐바타르 사후 몽골의 지도자였던 담바도르지를 재교육을 명분으로 모스크바로 압송하고 토지 몰수와 불교 사원의 박해 등을 포함하는 공산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할 지도자로 처이발상을 지목해 11월 28일에 그를 담바도르지의 후계자로 옹립했다. 덕분에 그는 이후 몽골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아직 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군에서 예편한 후 그를 몽골인민혁명당 총비서로 추대하라는 스탈린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당내의 반대 때문에 몽골인민혁명당 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1934년 몽골인민혁명당 서기 잠빈 뤽베를 숙청하는데 성공한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그를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스탈린은 몽골 수상 겸 몽골인민혁명당 서기 펠지딘 겐덴에게 그를 부수상에 임명하라고 지시하였는데 겐덴은 이 지시에 불만을 표시했다가 가차없이 1936년에 해임당해 1937년 11월에 처형당했다. 스탈린은 그를 몽골군 원수로 진급시키고 1936년 2월 26일 몽골 내무상에 임명하였다. 내무상으로 그는 1936~1938년 사이에 대규모 숙청을 자행했는데 이 때문인지 이오시프 스탈린의 추종자로 유명했으며 정치 행보도 비슷해 "몽골의 스탈린"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가 통치하던 중 몽골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37~1939년 행해진 대규모 숙청과 티베트 불교 말살을 들 수 있다.
1936년에 당시까지 몽골의 국교와 같았던 티베트 불교 사원을 없애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거부한 펠치딘 겐덴 인민위원장 일파를 기습 체포하고 모스크바로 압송시키면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1937년 9월 10일을 기점으로 65명의 고위직을 전격 체포한 후 18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렇게 1936년부터 39년까지 대숙청을 벌여 겐덴 전 인민위원장과 아난딘 아므르 전 인민위원장 등 정치인과 불교 신자 및 승려들을 처형했다. 혁명 원로까지 무자비하게 잡아들인 이 대숙청에서 당과 정부의 수뇌부 인사 중 25명이 처형되었으며 군 지휘부 중 187명이, 중앙위원회 위원 51명 중 36명이 처형되었다. 거기에다가 굴라크까지 건설하여 사람을 잡아넣었다. 그야말로 동시대 소련 대숙청의 작은 복제판이였다.
승려는 세 부류로 나눠 지식인층은 총살, 비지식인층은 시베리아 수용소, 젊은이들은 재교화 후 귀가시켰는데 다수를 차지하는 비지식인층은 당장의 교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시베리아 수용소 10~20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혹독한 수용소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이로 인해 총 10만에 달하는 승려들이 입적했다. 대부분의 사원들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 불상과 조형물은 녹여서 소련의 무기 공장으로 보내졌다. 다만 일부 사원은 군사용으로 쓰여서 파괴되지는 않았다. 그는 한 때 불교 신자였으며 그의 이름은 불교에서 내려준 법명이니 참 웃지 못할 일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도 신학생 출신으로 정교회 때려잡는 데 열심이었으니 이 점도 비슷하다. 췌언하자면 스탈린은 사람들 감시하고 가두고 벌 주는 걸 신학교에서 당하면서 배웠다. 차이점이라면 스탈린은 나중에 정교회 탄압을 멈추고 형식적이나마 정교회에 우호적인 정책으로 돌아섰지만 처이발상은 티베트 불교와의 악연을 죽을 때까지 이어나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18,000명의 지식인층 승려가 처형당했으며 몽골 각지에 있던 746개 사원이 파괴되고 그곳의 모든 승려들이 쫓겨났다. 몽골 티베트 불교의 본산격인 간단 사원도 1938년부터 1944년까지 폐쇄되었다고 한다. 수천 명의 반혁명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다수의 부랴트족, 카자흐족들도 ’혁명의 원수’라는 이름으로 처형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죽은 사람의 수는 3만~3만 5천 명[5] 정도로 추산되는데 당시 몽골의 인구가 80~90만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 인구의 4%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몽골인과 튀르크인의 전통 머리 모양인 알타이식 변발이 외몽골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도 처이발상 정권 때의 일이다. 물론 복드 칸국 시절에도 중화민국, 러시아 제국, 소련으로부터 서구화된 문화가 들어옴으로써 외몽골인들이 변발을 자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변발이 자취를 감춘 것은 처이발상의 몽골 문화 탄압에 의한 것이었다. 변발을 계속 유지하려 한 외몽골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변발이 잘렸으며 상술한 부랴트족과 카자흐족도 외몽골의 주류 민족인 할하족으로 위장하여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변발을 자르기도 했다. 외몽골 내 어웡키족의 퉁구스식 변발도 이러한 변발 문화 탄압의 예외가 되지 못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엄청난 숙청 때문에 몽골에서 반소 감정이 지나치게 높아지자 그는 대숙청을 집행한 실무진들이 좌경 오류를 범했다고 이들을 역으로 숙청하고 이것이 1938년 8월부터 1939년 초까지 있었던 자신의 소련 외유 기간 동안 벌어진 일이라 자신은 몰랐다면서 사과했다. 1940년 1월 3일 그는 욤자깅 체뎅발과 함께 다시 소련을 방문하였고 스탈린은 그에게 레닌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는 자신과 수흐바타르의 우상화를 실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화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