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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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제11대 국왕 문종ㅣ文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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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019년 12월 29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안복궁 | |
| 즉위 | 1046년 6월 24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회경전 | |
| 사망 | 1071년 11월 30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중광전 | |
| 능묘 | 경릉 |
| 재위기간 | 고려 낙랑군 |
| 1022년 7월 5일 ~ 1046년 6월 24일 | |
| 고려 국왕 | |
| 1046년 6월 24일~1071년 11월 3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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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려의 제11대 국왕. 묘호는 문종(文宗), 시호는 인효대왕(仁孝大王).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아버지 현종과 형들인 덕종과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문종 치세 37년 동안 고려는 사회,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여진, 탐라, 일본계 호족들을 아우르던 해동천하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묘호와 시호
태자 선종이 올린 묘호는 '문종'(文宗).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였으니 왕룡사 비문엔 '성조'(聖祖)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호는 명대강정인효대왕(明戴剛正仁孝大王)이며 줄여서 인효대왕이라고도 부른다.
아들 선종이 처음엔 장성인효대왕(章聖仁孝大王)이라고 시호를 정했는데 이후 숙종때 강정인효대왕으로 바뀌고 숙종의 차남이자 고려 17대 국왕 인종이 명대를 추가해 지금의 시호가 완성되었다.
생애
현종의 왕자
1020년 1월 4일 고려 개경 만월대 안복궁에서 현종과 원혜왕후의 왕자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말수가 적어 조신했으며 학문과 무예보다는 서예와 그림을 더 좋아했는데 서예실력이 뛰어난 어머니의 재능이 유전된것으로 보인다.
반면 학문을 제대로 익히지 않아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한탄을 하였는데
낙랑군께서 어미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질 못하시니 허구한날 난만 그리시고 학문을 익히지 못하시여 심히 걱정입니다.
라며 상소를 올렸다.
현종도 평소 이를 걱정하고 있었기에 열다섯이 되던 해 덕종 , 정종과 함께 국자감에서 학문을 공부를 하게 했으며 그 덕에 1037년 형 정종이 재위하던 시절 중서문하성의 내사령으로 봉작되어 조정에서 활약하였다.
재위
내치
1046년 5월, 형 정종이 붕어하자 유조에 따라 고려의 천자가 되었다. 정종이 아들이 넷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우 문종에게 선위한 이유는 태조 신성대왕의 《훈요 10조》 중 제3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내사령(內史令) - 낙랑군 왕서는 짐이 사랑하는 동생으로서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검약한 성품이 이웃 나라까지 알려졌으니 그에게 보위를 전해 밝은 빛을 나타내게 하리라. — 정종의 유조
즉위 이후
문종은 즉위하자마자 문하시중 이자연과 측신인 문하시랑 이채도 , 중서시랑 천제공을 중용하여 국정을 맡겼다.
이후 이복누나 인평왕후를 왕후로 들이고 이자연의 여식 인예왕후를 후궁으로 들여 궁주로 봉작하고 연덕궁을 하사하였다.
1050년에는 이채도의 여식과 황려 호족의 딸 인경현비,인절덕비를 후궁으로 들여 왕통을 번성케 하였다.
1065년대부터는 지방 통제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제도를 정비하였다. 지방 호족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사심관 제도와 향리 제도를 강화하였으며, 각 지방에 파견된 감무(監務)를 통해 중앙의 행정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는 중앙집권 체제를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태묘 악장
| 왕룡사에서 불공을 올리는 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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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이 세운 태묘에 모셔진 역대 제왕들을 칭송하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당신은 문왕(文王)과 맞먹으시니, 총명하시고 차고 넘쳤습니다.민을 인자하게 이끄니, 창고가 꽉 찼고 억 개가 넘었습니다. 포정(布政)을 뛰어나고 넉넉하게 하시니, 신이 그 덕을 밝혔습니다. 경사가 운손(雲孫)에게까지 흐르고 하늘과 함께 끝이 없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밝고 밝은 아조(我祖)여. 무(武)와 함께 문(文)과 함께 공(功)과 은(恩)을 베풀었습니다. 즐거움이 궁정에 있으니, 여러 악기가 연주됩니다. 그리워하는 제 마음을 받아주시고 많은 편안한 도움을 주시옵소서.
이 태묘악장은 예종대에 정비되고 현재까지 사용되고있다. 이후에도 태묘에서 추계대제와 태묘제례를 지내는 등 태묘 행사를 더욱 늘리고 추진하였다.
인평왕후의 자결
1052년 인평왕후가 불임에 걸려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되고 유방암에까지 걸리자 훗날 왕태비가 되어 출궁할것을 두려워해 처소에소 목을 메달아 생을 마감하였다.
이로인해 한동안 모든 국정을 중단하고 우울함에 빠져 방황하였는데 장녀인 보령공주가 이런 문종을 위로해 큰 힘을 얻고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문종은 보령공주 입장으론 어미를 잃은것인데 방황하지 않고 아비를 대하는 효심이 장하다고 여겨 이복누나의 처소였던 천수전을 하사하고 항상 곁에두며 지극히 아꼈다.
또한 인평왕후가 죽고 이자연의 여식이였던 인예왕후를 왕후로 승격했는데 훗날 함께 고려의 문화를 발달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선종의 석고대죄
며느리 원주 해씨(폐)의 유산 후 난폭해진 성격으로 왕실내 분란을 일으키자 아내 인예왕후에게 상황을 맡겨 내명부의 처벌을 내리게 해 후궁품계로 강등시켰는데 , 이후에도 조정에서 폐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해씨가 조정 신료와 싸우다
그래 어디 기어보거라!
라는 발언을 해 결국 폐위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자 아들 선종이 장화전 앞뜰에서 석고대죄를 하며 이를 강력히 반대했는데 11월의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아들을 계속헤서 방치해 석고대죄 3일차에 선종이 혼절하였고 훗날 붕어할때 이를 언급하며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외치
요
강동 6주를 확보한 이후 국경은 안정되었으며, 문종 대에 이르러 요와의 사이에 별다른 군사적 충돌은 없었다. 이는 선왕대의 군사적 성과가 외교적 안정으로 이어진 결과였다. 문종은 형식적으로는 조공을 유지하되, 국력이 충실해진 바에 따라 그 횟수를 점차 줄였으며 사대의 예 또한 실리를 따랐다.[1] 요 또한 고려의 국력을 함부로 얕보지 못하였으므로, 양국은 서로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평화를 지속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의 실질적 자주성은 더욱 공고해졌고, 동북아 정세 속에서 그 위상 또한 크게 드높아졌다.
북송
문종 대에는 북송과의 불교·문화 교류가 크게 활발해졌다. 송의 경전과 제도가 다수 유입되었으며, 송 사신의 고려 방문 또한 잦아져 양국의 학문·예제 교류가 심화되었다.
특히 문종은 송 인종과의 우호를 공고히 하고자 장녀 보령공주를 송 황실에 출가시키는 혼례 외교를 추진하였다. 이는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양국 관계를 한층 격상시키려는 외교적 의도였다.
그러나 송 조정에서 곤녕공 사건이 발생하고, 황태후 자선광헌황후가 시해되는 변고가 일어나자 정세가 급변하였다. 문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헤아려 외교적 위험을 우려하였고, 끝내 혼례 추진을 스스로 거두어들이니, 이는 국익을 우선한 결단이었다.
이로써 고려는 요와의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송과는 문화적 친연을 강화하는 균형 외교를 이루었다.
붕어와 유조
| 붕어 소식을 듣고 천덕전으로 달려온 왕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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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맞이하던 해 심병에 걸렸으나 아직 이룰 계획이 많았기에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결국 1083년 심병이 더더욱 악화되어 몸저눕게 되었고 마지막 유조를 남긴채 붕어하였다.
짐(朕)은 하찮은 몸으로 조업(祖業)을 수호해 왔다. 천명(天命)은 끝이 있으니, 이제 날(予) 돌보지 않아 오랫동안 병에 걸려 결국 대기(大期)를 만났다. 하루라도 만기(萬機)를 비울 수 없다. 오늘부터 군국정사(軍國政事)는 모두 태자 훈(勳)에게 위임하니 보위(寶位)를 전해 받도록 하라. 경 등은 나의 간곡한 말을 몸에 새겨 충효를 다하라. — 문종의 유조
금상 문조 폐하의 붕어(崩御)1071년 11월 31일, 금상께서 천덕전(天德殿)에서 붕어(崩御)하시니, 향년 53세였으며 재위 26년이었다. 근래 노환이 깊어져 여러 신료와 의원들이 극진히 치료하였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다.
붕어하시기 직전, 금상께서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곁을 지키던 내관에게 붓과 종이를 가져오게 하시며 이르시기를,
"짐의 마지막 명을 받아 적거라."
하시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문하시중 이자연에게 마지막 명을 내리노니, 왕후를 보좌하고 나의 아들 태자 훈을 보필하여 부디 무사히 보위에 오르도록 충성을 다하라."
하시니, 말씀을 마치신 뒤 편안히 눈을 감으시고 그대로 붕어하셨다.
궁인들이 급히 각 처소에 이 사실을 알리니, 침전에 들었던 왕족들과 궁궐에 남아 있던 여러 재신들이 다급히 천덕전으로 달려왔으나 이미 천자께서는 붕어하신 뒤였다. 왕후와 여러 후궁, 공주들께서는 침전 안에서 고요히 눈을 감으신 천자를 뵙고 모두 엎드려 통곡하였으며, 여러 왕족과 재신 또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곡성이 궁궐 안팎에 가득하였다.
평가
문종의 유풍(遺風)과 공덕[餘烈]은 그 시기가 지금에서 멀지 않아 때때로 혹은 선생(先生)과 나이 많은 이들의 말을 들으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십니다. ··· 담당 관청의 여러 관원들[所司庶官]은 각기 그 능력을 다하였으며 쓸데없는 관직[冗官]을 줄여 일을 간단하게 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였으므로 창고에는 곡식이 계속해서 쌓이고 집에서는 사람들이 넉넉하게 지급되므로 당시를 태평(太平)이라 일컬으니 이는 우리 왕조의 어진 성군[賢聖之君]이셨습니다. — 인종 공효대왕
신 등은 일찍이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고려(高麗)의 문종(文宗)이 세상을 융성하고 풍부하게 하였으므로, 지수(持守)한 어진 임금으로 일컬어지는 데는 반드시 하는 바에 탁연(卓然)함이 있다 하였는데, 시행한 사적(事蹟)을 보면 고요하게 무위(無爲)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 이태주
당신은 지혜로운 군주셨습니다. 당신은 온화한 군주셨습니다. 당신은 늘 나와 왕실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당신은 다정한 군주셨습니다. 당신은 이 나라의 태평천자 이십니다. — 인예왕후
가족관계
- 제 1왕후 : 인평왕후 - 현종의 딸
- 장녀 : 보령공주
- 제 2왕후 : 인예왕후 - 이자연의 딸
- 제 1비 : 인경현비 - 이채도의 딸
- 차녀 : 선희왕후 - 선종과 혼인
- 제 2비 : 인절덕비 - 민의의 딸
- 사남 : 진한공 왕유 - 선경귀비의 아비
- 제 3비 : 승은궁인 김씨 - 대전 지밀 출신
- 오남 : 금관후 왕의
- 육남 : 변한후 왕음
- 삼녀 : 왕녀 왕씨 - 서린극과 혼인
- 사녀 : 공주 - 조졸
- 제 4비 : 궁인 허씨
- 오녀 : 공주 - 조졸
각주
- ↑ 훗날 요가 2차 여요전쟁을 일으켜 기습침공을 하는 원인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