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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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제14대 국왕 숙종ㅣ肅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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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054년 9월 8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연덕궁 | |
| 즉위 | 1102년 1월 26일 |
| 고려 서경 평양부 명복궁 정전 | |
| 사망 | 1177년 12월 6일 |
| 고려 개경 개성부 만월대 승평문 계단[1] | |
| 능묘 | 영릉 |
| 재위기간 | 고려 계림공 |
| 1077년 4월 6일 ~ 1102년 1월 26일 | |
| 고려 국왕 | |
| 1102년 1월 26일~1105년 8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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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려 제14대 국왕으로 묘호는 숙종(肅宗) 시호는 명효대왕(明孝大王) 이고 휘는 희(熙),자는 천상(天常)이다.
제 11대 국왕 문종의 2남이다.
조카인 헌종이 건강상의 문제로 이른나이에 상왕으로 물러나고 공효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3일만에 근친혼성 요절하여 후계가 끊기자 왕위에 올랐다.
묘호와 시호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흥수택주 묘지명>엔 '숙묘'(肅廟)라고 나온다.
시호는 '강정문혜명효대왕'(康正文惠明孝大王)이다. 아들 예종이 '명효'를 올렸고, 손자 정목대왕이 '문혜', 차남 인종이 '강정'을 올렸다. 대표시호인 '명효대왕' (明孝大王) 중 효(孝) 자는 '선왕의 대업을 효성스럽게 잘 받들어 이었다'는 뜻으로 받는다. 이는 가장 무난한 시호로 숙종 이후 모든 제왕이 '효' 자 시호를 넣어 받았다. 대표시호 중 '명'(明) 자는 '밝을 명' 자로 시법상으로 괜찮은 시호이다.
생애
문종의 왕자
1054년 9월 8일 고려 개경 개성부 연덕궁에서 인예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선종과 노는걸 좋아했으나 태자에 책봉되어 국자감에서 제왕의 교육을 받느라 바빠지자 만월대 숲속에서 이복남매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노는 순박한 왕자였다고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어 어머니 인예왕후를 극진하 모셨으며 이버지의 후궁들 , 승은궁인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해 궁중예법을 잘 지켰다고 한다.
18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학문을 왕전히 통달하였는데 , 논어를 통해 왕이 말보다 먼저 몸가짐을 바로잡아야 함을 배우고 이후에도 율령과 국제를 익혀 유교로 통치의 원칙을 세우고, 불교로 마음을 다스린 왕자였다.
재위
내치
늦은 나이의 즉위
헌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48세라는 매우 늦은나이에 즉위하였다. 평소에 앓던 중풍(中風)때문에 고생을 많이해 건강에 유독 신경썼는데 이 중풍이 훗날 붕어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상께서 업무를 보다가도 갑자기 편두통이 와 고통스러워 하시고 말이 어눌해지시며 손을 바들바들 떠셨다. — <고려사>
이렇듯 숙종은 건강에 예민해 항시 태의감과 네명의 의녀들을 동반해 이동하곤 했다.
왕자비 단양택주였던 사숙왕후를 왕후로 승격했으며 나이차가 열살이 넘었지만 금슬이 좋아 아들 예종과 인종을 두었다.
근친혼 금지령
숙종은 근친혼을 왕자시절부터 매우 극혐하였는데 , 평소에 앓던 중풍도 근친상간때문에 생긴 지병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 당시 근친상간때문에 생긴 지병이라는 개념이 없어 조카며느리 공효왕후가 낳은 왕자가 3일만에 요절했을때도 신료들이 뱃속 태아시절부터 앓던 병때문에 일찍 요절한것 이라며 왕후의 의녀를 처벌하자 계림공 시절 이를 한탄하고 비난하였는데
먼 사촌지간도 아니고 친남매끼리 동침을 하였는데 그 아이가 건강할리가 있겠느냐. 신료들은 어째 저리 멍청한고..
이 발언을 들은 공효왕후가 분노하여
용손들과 왕위계승을 위한 오래된 전례를 잘나신 계림공께서 아시기나 하시겠습니까?
라며 호통을 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이후 근친혼 금지령을 내려 왕가는 물론이고 귀족들의 족내혼도 막았었다
왕실의 근친혼을 폐지하고 간택제도를 돌입하는 바이며 , 이를 어기고 근친을 하는 왕족은 작위 박탈 , 귀족은 강제이혼 및 관노비화 하도록 규정하노라. — 숙종의 교서
화폐 발행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대로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립하여 화폐인 활구(은병), 해동통보 제조해 유통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삼한통보가 너무 대중화 되어 실패하고 오히려 그보다 값어치 단위가 높아 국가간의 거래에서 자주 쓰이는 활구가 더 좋은 성과를 보였다.
남경 천도론
숙종 재위기에 당시 양주목이였던 남경(南京)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풍수지리 전문가였던 김위제가 비기(秘記)인 《도선기》(道詵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인용하여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했다.
이후 서경천도론을 주장하는 신료들이 과거 역도의 무리 박수경의 거점이였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여 정치적으로 많은 의견충돌이 발생하였으나 어찌저찌 1104년에 남경별궁 축조를 완료하고 직접 행차하였으며 태묘를 남경으로 옮기며 거의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였다.
박정희의 반란
여느때처럼 태묘로 향하던도중 중풍으로 인해 가마 안에서 혼절하자 가마를 돌려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태묘 행렬에 껴있던 병부상서 박정희가 대왕의 힘이 가장 약해진 순간을 포착하자 평소 품고있던 권력욕을 들어내며 숙종을 암살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장군들이 빠르게 가마행렬과 만월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박정희의 난군을 피해 우여곡절 난군 대다수를 죽이고 만월대까지 들어오는데 성공했으나 끈질긴 박정희가 만월대까지 금상의 가마를 쫒아왔다.
그러던 도중 회경문 앞에 도착한 순간 숙종을 기다리던 사숙왕후가 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은장도를 뽑아 박정희를 겨누고 던졌는데 그대로 머리에 꽃혀 말에서 떨어져 죽으며 난은 막았으나 끝내 회경문 계단을 오르던중 가마 안에서 숨지고 말았다.
외치
별무반 편성
한편 재위 말년에 들어 북방의 여진족 완안부와의 전투에서 큰 코 다친다. 여진 정벌의 총지휘관이었던 임간이 공적에 정신 팔려 완안부의 세력권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대패하면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윤관을 기용해 별무반을 양성하며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여진 세력과의 전면전에 철저히 대비했다.
당시 완안부의 힘이 꽤 강해진 탓에 고려의 영향권이 미치는 곳까지 점차 유의미한 위협을 가해왔고, 이에 고려가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해동천하관이 무너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고려는 이전까지 여진 부족들, 일본계 호족들, 탐라국, 우산국 등 주변 약소국이나 세력을 번국으로 여기며, 고유의 외왕내제로 대표되는 체제 안에 편입시켰는데 그 질서를 완안부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레 거슬러 버린 것이다.
붕어와 유조
짐(朕)은 덕이 없지만 대업(大業)을 이어 수호하니 만사(萬事)를 통치했다. 그러니 하루도 편안히 있지 않고 몸을 숙여 정치를 펼치니 밤을 샌지가 10여 재(載)이다. 생각하건대 중외(中外)의 사람과 같이 인수지역(仁壽之域)을 모험했으나 오랜 질병에 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천명(天命)은 알기 힘들다. 짧게 살든 길게 살든 그저 하늘에 맡길 뿐이다. 허나 방기(邦基)는 지중(至重)하니, 전하는 말을 잊을 수 있겠는가? 왕태자(王太子)는 인의(仁義)를 알고 효우(孝友)를 안다. 태어날 때부터 똑똑했고, 따뜻했고, 자애롭고, 온화하니 백성의 소망을 채울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묻히기 전 얼른 군위(君位)를 잇도록 하라. 모든 군국대사(軍國大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맡긴다.
방진주목(方鎭州牧)[2]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오호라(於戲)! 시작과 종말의 시기를 아니 죽는 자는 아무 후회가 없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산 자는 오래 살도록 하라. 이제 고굉대신(股肱大臣)[3]과 백벽(百辟)[4]과 경사(卿士)들은 왕실(王室)을 보좌하고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도록 도와라.
그리한다면 짐은 눈을 감더라도 마음은 족하다. 국내(國內)에 선포하여 짐(朕)의 뜻을 알리도록 하라.
평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자라서는 효성스럽고 공손하며 근면하고 검소하였으며 성격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5경과 자서 및 사서 중에 읽지 않은 것이 없어서, 문종이 그를 사랑하여 일찍부터 말하기를, “나중에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바로 너구나!”라고 하였다. — <고려사> 숙종세가
그분은 때론 온화하시어 부처 못지않으며 또 때론 불구덩이에서 올라온 염라 못지않게 무서우시니 감히 그 누구도 대들지 못하였다. — 천제공
가족관계
아버지는 문종 , 어머니는 인예왕후인데 형제관계는 부계기준 누나 보령공주 , 형 선종 , 남동생 대각국사 , 막내남동생 진한공 , 막내 여동생 선희왕후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