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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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AC UNIVERSE.png
헤르메스 세계관 국가
Nation of Ερμής(Hermes)

올리비안 왕국UVN, 헤르메스 연합 가입국이자 UVN, 헤르메스 연합 이사국이며, MCAC에서 타가상국가와 다르게 반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가상국가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카페나 카카오톡(링크는 아래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당 문서는 현재 공사중입니다!



개요

< 올리비안 왕국 >
O reino de Olivian

The Kingdom of Olivian

오이 왕국.jpg
국기
올리비안 왕국 신국장.png
국장
국호올 리 비 안 왕 국
O reino de Olivian
상징국가올리비안에 자유와 평화를!
국화라일락
국조홍부리황새
표어조국을 지키는 기쁨
자연환경면적(영토)60,653km²
인문환경인구7,988,881명
인구밀도132명/km²
공용 언어포르투갈어, 영어
정치국체입헌군주제
정부형태의원내각제
국왕알리마 조나단
총리조이 가나스
경제GDP$189,815(백만)
1인당 GDP$25,190
GDP(PPP)$0000
1인당 GDP(PPP)$0000
공식 화폐올리비안 달러(OVD)
단위
법정연호서기/하파시-조나단
시간대UTC -2


언어별 명칭
공식명칭올리비안 하파시 조나단 왕국
영어The Kingdom of Olivian
오이리어Olavas si Olivyhan
포루투갈어O Reino de Olivian
스페인어Reino de Olivian
프랑스어Le royaume d'Olivien
독일어Das Oliviänerreich
태국어อาณาจักรออริเบียน อาณาจักร
아랍어مملكة أوليفيان
일본어オリビア王国
중국어奥利维亚王国
한국어올리비안 왕국


제목 없는 디자인 (6).jpg
옛날에 사용한 국장
올리비안 왕국 국장2.png
일부 행정부서에서 사용하는 국장
올리비안 왕국 국장3.png
일부 행정부서에서 사용하는 국장2




국가소개 및 상징

  •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운영국가이므로 다음 링크를 통해 입국이 가능합니다.
올리비안 왕국 The Kingdom of Olivian / O reino de Olivian 은 서아프리카로부터 대서양 쪽으로 700여km 떨어진 오이리제도(가상의 섬)와 서아프리카 기니비사우에 위치해있으며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에 가까우나 그 외 모든 면에서 유럽과 가까우므로 특이하게 유럽국가로 분류되는 국가다.


  • 현재 입헌군주제를 바탕으로 국무총리를 선출하는 의원내각제를 시행중이다. 본래 왕가는 없었으나 왕정과 제국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면서 당시 1대 총리인 '엘니치 하파시'가 1대 국왕으로 즉위했고 150여년간 하파시 왕조가 형성되었다.

국기오이리(Oiri) Bandeira(국기)라는 명을, 국장올리바르(Olivhar)라는 명을 붙였다.

현재 알리마 조나단 9대 국왕)이 1년째 집권하고 있으며 총리 조이 가나스 (36대 총리)가 1년째 집권하고 있다.
[시작 설정시간 : 2010년 1월(월1턴제) - 5월 23일 기준]
[현재 설정시간 : 2020년 1월(현재진행제/빠른 시간진행(1년=1개월)) - 1월 1일 기준]



국가(國歌)

국가내용
1절

희망의 대지를 찾아
자유와 평화를 찾아
드넓은 대양 한가운데
우리의 깃발을 꽃았도다

독립을 향한 열망과
평화를 위한 쟁투로
아름다운 이 대지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도다

올리비안 대왕국 만세!
올리비안 대왕전하 만세!

2절

침략자들을 무찔러
우리의 자유를 쟁취하자
드넓은 대양 한가운데
우리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선조들의 훌륭한 지혜와
강인한 우리들의 힘으로
아름다운 이 대지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도다

올리비안 대왕국 만세!
올리비안 대왕전하 만세!



헌법(憲法)

올리비안 왕국 헌법

헌법의 초문 : 대왕전하시여, 오이리 족의 선구자이자 올리비안 왕국의 수호자이자 아틀란티스의 후예자이시여. 태양이 뜨지 않을 날까지 왕국의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헌법의 역사 : 왕국의 헌법은 오이리 공화국이 선포됨과 동시에 제정되었으나 입헌군주제가 도입되면서 갑작스럽게 개정되어 필요에 의해 여러 차례 개정을 다시 한 번 거쳤다. 현재 헌법은 12차 개정 헌법이다.

  • 1862년, 오이리 공화국 선포와 함께 헌법이 제정되었다
  • 1868년, 오이리 입헌군주국 형성으로 헌법이 1차 개정되었다.
  • 1873년, 헌법이 2차 개정되었다. 내용이 아주 사소하게 변경되었다.
  • 1901년, 헌법이 3차 개정되었다. 포르투갈과의 우정을 과시하는 조항을 추가했다.
  • 1912년, 군사쿠테타로 전제군주제로 정부가 변화하였을때 헌법이 4차 개정되었다. 이때 국왕의 권한이 매우 강화되었다.
  • 1913년, 헌법이 5차 개정되었다. 국왕의 권한이 더욱 강화되었고 4차 개정으로 의해 유명무실한 의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 1916년, 헌법이 6차 개정되었다. 파타나샤 국왕 암살 이후 시민들의 요구로 민주의회가 부활했다. 그러나 전제군주제에서 다시 입헌군주제로 부활하면서 군주의 권력제한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 1921년, 민주의회가 군주의 권력을 약화하기 위해 헌법 개정을 시도했지만 총리의 제동으로 내분이 발생하면서 실패했다.
  • 1940년, 헌법이 7차 개정되었다. 마리아 여성총리의 헌법개정제안에 동의하여 민주의회가 군주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이 행정부 수반으로 인정되었다.
  • 1968년, 헌법이 8차 개정되었다. 국왕과 의회가 대등하게 권력을 나누어가졌고 이 일로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가 여러 국가들에게 소개되었다.
  • 1984년, 헌법이 9차 개정되었다. 올리비안 기니비사우 연방의 출범으로 이에 관한 조항이 추가되었으며 12장 문화가 미국문화의 유입 등을 이유로 완전히 새로 개정되었다. 또한 내용이 일부 새롭게 추가되었다.
  • 1992년, 헌법개정시도가 있었지만 국왕과 총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표결에서 실패했다.
  • 2010년, 헌법이 10차 개정되었다.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는 문구가 일부 추가되었으며 총리의 권한이 왕의 권한에 비해 조금 더 강력해졌다. 일각에서는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의 존속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2015년, 헌법이 11차 개정되었다. 남대서양전쟁으로 기니비사우가 멸망하고, 올리비안 왕국에 합병되었다. 이에 민주의회가 재구성된 이후에 헌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 2019년, 헌법이 12차 개정되었다. 너무 복잡한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를 결국 폐지하고 영국 등의 국가처럼 입헌군주제를 보통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개헌안이 국왕과 총리에 의해 승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갈피를 제대로 못 찾고 있는 상태다.
  • 2020년, 헌법이 13차 개정되었다. 국왕의 행정권이 일부 복권되는 민주의회의 안건이 상정, 통과되면서 일각에서는 차라리 전제군주제,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로 회귀하라 등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한편 지역구의 '구'가 지방의 '주'로 행정명이 변경되는 등의 사소한 것들이 개정되기도 했다.




국가 위치 및 지역도

다음은 올리비안 왕국의 위치와 간략지역도이다.

세계지도상 위치.jpg
세계지도상 위치
올리비안 왕국 위치.jpg
올리비안 왕국의 위치
올리비안 기니비사우 연방 위치.jpg
합병 이후 올리비안 왕국의 위치
주 (Province)
몰레바 (Moleva)사살라 (Sasalla)오이리 (Oiri)레스타 올바나 (Leste Olvana)
비사우 (Bissau)바파타 (Bafata)칸숑구 (Canchungo)카타우 (Catio)
올리비안 왕국 전도.jpg
올리비안 왕국(오이리 제도)전도(판타지풍)


[ 2 도 시 6 주 간 단 소 개 ]

  • 몰레바 : 몰레바특별자치도와 모뷔뭰토시 그리고 스텔리아시를 통틀어 '몰레바 주'라고 한다. 몰레바 주는 인구가 238만명으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주이다. 몰레바섬은 수도의 인구가 포화되어 스텔리아 신도시 건설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인도였다. 최근에는 인프라가 어느 정도 구축되었고 관광지구가 조성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 사살라 : 사살라주는 자연환경이 뛰어나지만 또한 인프라 시설도 다른 주에 비해 잘 되어있어 사람이 여유롭게 살기에 적합한 주다. 사살라주에는 부자가 많이 살고 있다. 사살주에는 약 202만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꾸준히 인구가 유입되고 있는 추세다.
  • 오이리 : 수도 오이리 시는 수도로 지정되어있어 어떤 주에 편입이 되지 않는다. 인구는 191만명이며 수도 포화가 심각하여 최근 스텔리아 신도시 개발계획이 발표되어 시행되기도 했으나 기니비사우 합병 이후로 주춤하던 인구 성장세가 다시끔 오르고 있다. 오이리 시가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인구는 170만명이 조금 넘기 때문에 수도 포화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 레스타 올바나 : 레스타는 포르투갈어로 동쪽이라는 뜻이며 그라나 군 남쪽에 올바나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동쪽 올바나'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인구는 70만명이 조금 넘으며 하빌리다드 군에 인구가 집중되어있다. 올바나 제도는 지형이 험난하여 인구가 통틀어 6.5만명이 안된다. 따라서 올바나 제도를 전부 포함하여 그라나 군이 형성되었다.
  • 비사우 : 비사우기니비사우 공화국의 원래 수도였으며 합병 후 특별도시로 지정되었다. 110만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는 자치입법부(비사우 특별시의회)가 따로 들어서있다.
  • 바파타 : 바파타는 기니비사우의 동쪽에 위치한 주로 국립공원이 지역의 50%를 차지하며 자연환경이 뛰어나다.
  • 칸숑구 : 칸숑구는 기니비사우의 북서쪽에 위치한 주로 인구가 2번째로 적은 지역이고, 치안이 가장 좋지 못한 곳이다. 최근 이 지역을 개발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있다.
  • 카타우 : 카타우는 기니비사우의 남쪽에 위치한 주로 인구가 가장 적은 지역이지만, 비사우와 가깝고 좋은 해안지역으로 그라나군과 함께 올리비안 왕국의 관광특구로 개발될 가능성이 높으며 인구의 유입도 많이 이루어질 곳으로 보인다.



행정구역

아래는 자세한 행정구역도이다.

수도 (Capital city)
오이리 (Oiri)
시 (City)
스텔리아 (Stellia)모뷔뭰토 (Movimiento)벤타나 (Ventana)비사우(Bissau)
메레니치 (Merenichi)
군 (County)
하빌리다드 (Habilidad)사살라 (Sasalla)그라나 (Grana)
바파타 (Bafata)칸숑구 (Canchungo)카타우 (Catio)가부 (Gabu)
파림 (Farim)비소랑 (Bissora)카셰우 (Cacheu)키냐멜 (Quinamel)
오이리 섬 전도.png
오이리 섬 전도(채색)
기니비사우 전역 전도.png
기니비사우 지역 전도(채색)

북쪽의 몰레바 주

- 몰레바 주의 몰레바 섬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발견되었지만 사실 스텔리아 신도시 건설전까지 역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몰레바섬에 사는 인구가 없다고 나온다. 즉 몰레바섬은 무인도였다는 것이다. 몰레바 주의 주청사가 위치한 모뷔뭰토 시의 드가드 1동과 2동 그리고 3동이 동시에 개발이 완료되었으며, 드가드 국제공항의 확장으로 인구가 빠르게 유입되면서 잠재적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적극적인 투자로 드가드 산업단지에 이어 켈레마 산업단지가 완공되었다. 스텔리아 신도시는 수도와 비슷한 체계적 인프라 구축을 통해 건설이 진행중이며

포르투갈 문화가 적고 도리어 영국의 문화가 아직 남아있어 전쟁 승리 이후 한동안 차별받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의회 1대 총리였던 샤드리아 총리의 고향 지역구이기도 하다.

모뷔뭰토 국가산업단지.jpg
모뷔뭰토 국가산업단지
Stellia city.png
스텔리아 신도시



몰레바 주 소속 행정구역


  • 모뷔뭰토시: 몰레바 주청사 소재지이다. 인구는 71만명이며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국가 산업단지가 대규모로 조성된 곳이다.
  • 몰레바자치도(島): 모뷔뭰토 군(당시) 소속이었지만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니기 때문에 관광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 특별자치도로 선정되었다. 관광지로써 유명하며, 동쪽에는 대규모 해군기지가 위치한다.
  • 스텔리아 시: 스텔라연방공화국의 영토에 해당하는 구역이었으며, 오이리 시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였으나 공화국이 올리비안 왕국에 흡수되면서 인구가 분산, 제 2 도시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인구는 154만명이며, 올리비안 왕국에서 2번째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지만 스텔리아 항구와 스텔리아 공항까지 모두 폐쇄되면서 인구가 서서히 줄고 있는 추세다.



서쪽의 사살라 주

- 사살라 주의 사람들은 친포르투갈 성향이 강하다. 포르투갈 사람들을 좋아하며 미국의 문화도 강하게 유입되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지역이다. 유동인구가 높은 지역이면서 수도 다음으로 가장 발전된 지역이다. 사살라 주청사가 위치한 사살라 군은 벤타나 시와 메레니치 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많아 시 승격에 실패했지만 오이리 제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며 여러 강이 흘러 훌륭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편 벤타나 시에는 포르투갈군이 건설했던 요새가 있으며 이는 대표적인 오이리 제도의 유적지이다. 영국군의 보수 이후로 최소한의 보수만으로 보존하고 있으며 요새 안에 시청이 있는 희안한 도시구조이다. 메레니치 시는 메레니치 수로 시장으로 유명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살라 군 사살라 마을.jpg
사살라군 센트리사살라동
벤타나 요새.jpg
벤타나시 바스티오동 벤타나요새
메레니치 군 알리오 마을.jpg
메레니치군 알리오동 알리오지구



몰레바 주 소속 행정구역


  • 사살라 군: 사살라 주청사 소재지이다. 인구는 35만명이며, 사살라 주에서 인구가 가장 적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당시 사살라 주의 중심에 있었으며 예나 지금이나 접근성이 좋아 주청사가 계속해서 사살라 군에 남아있다. 자연환경이 뛰어나 많은 관광관련 시설들이 들어서있다.
  • 벤타나 시: 수도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서벤타나와 동벤타나로 분할한후 수도에 동벤타나(Lesta Ventana)가 편입될 위기에 있었으나 벤타나 시의 인구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인구는 112만명이며, 올리비안 왕국의 3대 도시이다. 수도의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 메레니치 시: 인구는 54만명이며, 사살라 주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행정구역이지만 인구가 의외로 적은 편이다. 메레니치 공항과 메레니치 항 등 여러 인프라가 건설되어 있고 산업지구와 관광지구가 동시에 크게 조성되어있어, 사살라 주에서 발전 잠재력이 가장 큰 곳으로 꼽힌다.



동쪽의 레스타올바나 주

- 레스타 올바나 는 인구가 가장 적으며 덜 발전된 지역이다. 지형이 험난한 것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최근 그라나 관광특구가 개발되고 있지만서도 결국 공항과 연결되는 도로를 제외하면 접근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사람이 많이 살 수 없다. 아프리카 대륙과 가까워 오이리 족 문화가 많이 남아있으며 포르투갈 문화와 미국 문화가 유입되면서 서로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다.

레스타 올바나 제도.jpg
레스타 올바나 제도



레스타 올바나 주 소속 행정구역


  • 하빌리다드 군: 레스타 올바나 주청사 소재지이다. 인구는 35만명이며, 군사기지가 있어 발전한 도시이다. 평원이 펼쳐져 있지만 도시가 많이 형성되지 못했다. 올리비안 왕국의 유일 군사도시이다.
  • 그라나 군: 인구는 38만명이며, 그라나 관광타운이 국책으로 건설되면서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지역이다.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지만 험난한 지형과 넓게 이루어진 자연보호구역으로 도시가 크게 형성되지는 않고 있다.
  • 레스타 올바나 제도: 옛날부터 유명한 역사도시, 올바나의 소재지이다. 포르투갈에 의해 넓게 상업도시로 형성되었지만, 수도인 오이리 시가 크게 발전하면서 올바나는 잊혀지게 되었다. 올바나의 동쪽으로 넓게 펴졌기 때문에 Lesta(동쪽) Olvana라는 이름이 붙었다.



올리비안의 중심, 오이리 시

- 오이리 시는 당연히 올리비안 왕국의 중심이자 수도로 정부청사, 금융기관 등 국가의 중요시설들이 위치한 곳이다. 인구는 190만명이 넘지만 수용할 수 있는 최대인구가 175만명이 조금 넘어 인구포화가 심각한 지역이다. 미국 문화가 강한 지역이며 포르투갈 문화와 영국 문화도 약간 남아있다. 산업단지가 오이리 시 북쪽과 서북쪽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 스텔리아 시로 산업단지의 이전을 장려하여 인구를 분산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있다.

한편 오이리 시는 2회의 확장을 통해 지금의 영역에 이르게 되었으며 인구의 지속적인 유입으로 여러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추세지만 여전히 올리비안 왕국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이며 꾸준한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오이리 시 전경.jpg
오이리 시 전경
오이리 시 거리.jpg
오이리 시 아랑남로


한편 실제 BE서버에서는 오이리시가 아직 공사중이며 개발계획도가 7차례에 거쳐 수정되었다.
도시개발의원회에서 국왕과 총리의 승인 아래 모든 도시의 개발계획을 도맡고 있다.

도시개발계획2.jpg
MCAC 도시개발계획도1
도시개발계획3.jpg
MCAC 도시개발계획도2



동쪽의 신도시, 비사우 시

- 비사우 시는 기니비사우의 옛 수도이자 올리비안 왕국의 오이리시와 함께 특별도시로 지정된 유일한 도시이다. 인구는 100만명이 넘으며, 특별도시로 지정됨에 따라 성장 잠재력이 가장 큰 도시이다. 포루투갈 문화가 가장 도드라지는 지역이고, 많은 기업들이 투자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CentraBissau.jpg
비사우 시 전경
  • 그 외는 수록하지 않음



경제

경제력 순위 (25위권)
1위The United States of America
2위Japan
3위Republic of Germany
4위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ian ~
5위Republic of China
6위Republic of France
7위The Kingdom of Korea (대한왕국)
8위Republic of India
9위People's Republic of China
10위Republic of Brazil
11위Alava Dones'ke (알루하바 도네츠카 왕국)
12위Republic of Canada
13위Republic of Russia
14위Republic of Catalan(Spain)
15위Republic of Australia
16위The United Kingdom of Benelux
17위Republic of Mexico
18위Republic of Indonesia
19위The Kingdom of Saudi Arabia
20위The Kingdom of Olivian
21위Republic of Turkey
22위The Federation of Sweden
23위Republic of Switzerland
24위Republic of Vietnam
25위Republic of Poland
올리비안 왕국은 포르투갈의 시장경제를 그대로 받아들여 자본주의를 채택했다.

올리비안 왕국은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유럽 사이에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중개무역 및 광업으로 큰 돈을 벌어들였으나 광맥이 고갈되려하고 선박의 발전으로 중개무역 규모가 축소되자 중화학공업, 조선업, 관광업 등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대규모의 국가투자를 통해 경제부활을 꿈꾸려한다.

1947년에 경제선진국 대열에 진입하여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쇠퇴기를 거쳐 지금은 경제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국가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은 왠만한 국가에 비해 지지 않아 아직까지 잘 사는 나라로 인식된다. 유럽, 아메리카와 친밀하고 경제체계가 비슷하여 경제적으로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19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안 왕국은 G20에서 제작년(2018년)부터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의 압박이 상당히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경제부진으로 현재 20위에 머물고 있으며 뒤에서 터키가 바짝 쫓고 있다.


  • 1799년, 남대서양 연안 국가들 중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 1828년, 은광석과 금광석이 채굴되기 시작했다.
  • 1910년, 광업과 중개무역에 국가적으로 대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 1922년, 미국의 투자가 지속되면서 금광석 등의 자원채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 1923년, 자원의 수출과 일자리의 급증으로 인해 경제가 급격히 성장했다.
  • 1926년, 1인당 GDP가 5천 달러를 넘어섰다.
  • 1928년, 1인당 GDP가 8천 달러를 넘어섰다. 중개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1929년, 중개무역 수입량이 누적 100억불에 도달했다.
  • 1931년, 조선업 육성에 국가투자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 1935년,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어섰다. 중개무역 수입량이 누적 500억불에 도달했다.
  • 1936년, 금속공예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올리비안 왕국산 귀금속이 명품으로 분류되었다.
  • 1938년, 건설업과 조선업이 크게 성장했다.
  • 1940년, 마리아 총리의 지시로 처음으로 국가주도 군수산업이 발전을 시작했다.
  • 1941년, 마리아 총리의 지시로 국가주도 중공업과 화학공업이 발전을 시작했다.
  • 1944년, 1인당 GDP가 1만 5천 달러를 넘어섰다.
  • 1958년, 경제대개혁이 시작되었다.
  • 1963년,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넘어섰다. 인구가 적어 전체 GDP가 높진 않았지만 1인당만 비교했을때 세계 경제강국 대열이었다.
  • 1966년, 건설 붐이 일어났다. 기업개수가 10만개를 넘어섰고 40명 중 1명이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1972년, 엘바스 총리의 경제개혁이 성공적이었으며 세계 30위권 경제강국으로 발전한다.
  • 1973년,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경제적 성장을 인정받았다.
  • 1974년, 이때 올리비안 달러(OVD)가 역대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 1989년, 올리비안 왕국의 경제를 책임졌던 중개무역량이 크게 감소하고 경제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 1984년, 올리비안 기니비사우 연방이 출범했고 반짝 성장이 이뤄졌지만 다시 쇠퇴했다.
  • 1992년, 경제부활을 위해 다양한 법안이 발의되었고 2차 산업집중투자계획이 정부 주도로 수립되었다.
  • 1998년, 산업단지가 여러 곳 건설되었고 관광업 투자가 활성화되었다. 많은 기업이 투자를 시작했다.
  • 2000년, 1인당 GDP가 2만 5천 달러를 넘어섰다. 3만 달러 문턱에서 급감했다가 반등한 수치였다.
  • 2002년, 세계 20위권 경제강국대열에 진입했다. 왕국은 이로써 침체됬던 경제 부활에 성공했다.
  • 2003년, 경제면에서 브라질을 앞질렀다. 조선업과 군수산업은 없어서는 안 될 산업으로 부상했다.
  • 2008년, 글로벌경제위기가 왔지만 왕국은 쉽게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채무는 증가했다.
  • 2010년, 중개무역 수입량이 누적 100만억불에 도달했다. 그러나 중개무역량은 급감했다.
  • 2015년, 남대서양전쟁으로 경제가 붕괴되었다. 전체 GDP의 30%가 감소할 정도로 국가에 큰 타격이 있었다.
  • 2019년, 경제가 붕괴 위기에 놓였지만,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16위까지 올라갔던 왕국의 경제적 지위는 추락했다.



국방

국방력 순위 (20위권)
1위The United States of America
2위Republic of Russia
3위Republic of India
4위Republic of China
5위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ian ~
6위The Kingdom of Korea (대한제국)
7위Republic of Germany
8위People's Republic of China
9위Japan
10위Republic of France
11위Alava Donets'ke (알루하바 도네츠카 왕국)
12위Republic of Turkey
13위Republic of Italy
14위Republic of Brazil
15위Republic of Egypt
16위The Kingdom of Olivian
17위Republic of Israel
18위Republic of Indonesia
19위Republic of Vietnam
20위Republic of Manchu-Mongolia

국방력은 남대서양 연안국들 중 2번째로 강력(브라질 다음)하다. 인구가 적고 국방력에 크게 투자하지 않아 군사력이 높은 국가는 아니지만 적군의 상륙 저지 및 미사일 요격체계 구축에 지난 30년간 총 92조를 쏟아부었기 때문에 적국의 침략을 쉽게 방어할 수 있도록 국방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미국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조금 받고 있다.

모병제를 채택했지만 모든 올리비안 왕국의 남성은 6주간 기초군사훈련을 학교에서 따로 수료해야한다.



국방(상세)

군 인 수총 군인수92,190명
육군57,880명
해군27,290명
공군7,020명
육군전력전차수320대
장갑차424대
야포340문
다연장/방사포60문
지대지유도무기20기
<육군전력(상세)>
  • 전차 : M1, K2 등 3세대 전차가 잇따라 도입중이지만 아직 소수에 불과하며 퇴역을 앞두고 있는 전차만 200여대이다. 관계개선을 위한 도입한 미국의 M-60, 독일의 레오파르트 2가 소량 운용중이다. 국산개발전차인 OV1이 곧 40대 도입을 앞두고 있으며 이는 2.5세대 전차 성능이다.
  • 장갑차: 러시아가 판매한 BTR-80을 상당수 운용중이며 최근에는 국산개발한 I-09를 생산, 배치중이다.
  • 야포 : 초기에는 미군이 쓰다 퇴역한 것을 가져다 썼지만 최근에는 K9 자주포를 도입했고 미제 M77 견인포도 사용하고 있다.
  • 다연장/방사포 : 러시아제를 상당히 많이 사용하며 RM-70이 주력운용중이다. 국산 방사포 개발이 착수된지 3년이 지났지만 예산난으로 많이 늦어지고 있다.
  • 지대지유도무기 : DH제대전차 미사일 '아누스'와 '판처파우스트 3'을 운용하고 있다.
해군전력전투함42척
소해정6척
상륙함220척
잠수함8척
<해군전력(상세)>
  • 전투함 : 오래전에 자주국방개혁의 발생으로 국산개발한 전투함(오이리급)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퇴역해 단 2척만 운용중이며 신형 3000톤급 전투함 사살라급이 배치되었으며 호위함은 사살라급 개발로 인한 예산난으로 해외도입하여 노르웨이의 프리드요프 난센급이 도입, 운용되고 있다.
  • 소해정 : 국산개발한 모뷔뭰토급 소해정이 운용중에 있다. 소해정은 6척 모두 해안경비대 전력으로 이용되고 있다.
  • 상륙함 : 미국에서 퇴역한 상륙함이 올리비안 왕국으로 인도되었으며 지금은 12척밖에 남아있지 않다. 샌 안토니오급 다운버전과 일본의 오오스미급 개량버전을 수입해 운용한다. 최근 상륙함이 국산개발화중에 있다.
  • 잠수함 : 독일제 212급 잠수함을 옛 독립군 장교였던 아일리아 그라프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아일리아급이란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잠수함이 최근 대량도입계획에 있다.
공군전력전투기108대
전략폭격기4대
감시통제기27대
공중기동기18대
헬기292대
<공군전력(상세)>
  • 전투기 : 초기에는 F-4, F-5 전투기를 사용하였으나 절반 정도 퇴역하여 현재는 40여대만 남았고 최근 F-16C 전투기가 60대 도입되었다. 거의 대부분 미국의 전투기만 이용되며 DH-2A 4기가 최근 도입되었다.
  • 전략폭격기 : 미라주IV 4대가 운용중이다.
  • 감시통제기 : E737이 4대 최근 도입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기종으로 E-3과 브라질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브라질에서 개발한 R-99가 합쳐서 23대가 있다. 최근 E-3 1대가 고장이 잦아 조기퇴역되었다.
  • 공중기동기 " C-130 18대가 운용중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공중기동긱 도입중에 있다.
  • 헬기 : UH-60 기종이 상당히 많이 운용되고 있으며 AH-64와 DH-98가 이따라 운용중에 있다. DH-98은 올리비안 왕국과 인연이 깊은 대표군수기업인 DH 그룹에서 개발한 공격헬기이다.



근위대전력총 근위대 병력1800명
<근위대전력(상세)>



문화

올리비안 왕국은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올리비안 왕국의 원주민이던 오이리 족의 문화는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포르투갈과 영국의 영향을 400년간 받아왔기 때문에 오이리 족의 문화는 포르투갈과 영국의 문화에 동화되었다. 근대에 미국으로부터 미국의 문화가 가장 유입되어 미국의 문화 또한 올리비안 시민들에게 익숙하다. 특히 수도 오이리시는 미국의 문화가 포르투갈과 영국의 문화보다도 가장 많이 유행하여 미국의 도시와 모습이 꼭 닮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에는 포르투갈의 흔적이 가장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올리비안 왕국/문화 참고)

벤타나 문화거리.jpg
벤타나시 문화의 거리
하빌리다드 문화광장.jpg
하빌리다드 문화광장



언어

포르투갈어 영어 오이리어 기타 언어
84% 78% 6% 3%
순포르투갈어 사용자 순영어 사용자 동시언어 사용자
13% 7% 71%

포르투갈 국기.jpg

올리비안 왕국은 포르투갈어와 영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포르투갈어와 영어가 공용어로 지정됨으로써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두 가지의 언어를 동시에 교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언어 사용자가 총 인구이 70%가 겨우 넘기 때문에 모든 기관 및 기업들은 포르투갈어와 영어를 반드시 병기해야 한다.

종교

가톨릭교 개신교 무교 기타종교
78% 14% 3% 5%

올리비안 왕국의 국교는 로마 가톨릭교이다.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아 종교 로마 카톨릭교가 유입되었고 지금까지 로마 카톨릭교를 믿는 인구의 비율은 가장 많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개신교가 유입되어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최근 늘고 있으며 특이하게 이슬람교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교통

올리비안 왕국은 인프라가 상당히 발전한 국가이다.

고속도로

올리비안 왕국은 고속도로가 곳곳에 분포한다.
고속도로는 수도를 중심으로 퍼지도록 건설되었으며 총 12개의 고속국도가 있다.

1. 오이리 - 스텔리아 고속국도: 수도와 제 2의 도시격인 스텔리아시를 서로 연결하는 주요도로이다. 처음에는 4차선으로 건설되었지만 세월을 거듭하면서 8차선으로 확장되었다.

오이리-스텔리아 고속국도.jpg
오이리-스텔리아 고속국도

2. 술 오이리 고속국도: 그라나 군의 남쪽지역을 시작으로 수도의 정치/행정중심지와 벤타나 시를 경유한 후 메레니치 군의 헤빌스 마을까지 연결되는 고속국도이다. 교통량이 가장 많은 도로이며, 상습적으로 막히는 도로이다.

술 오이리 고속국도.jpg
술 오이리 고속국도

3. 사살라 남북 고속국도: 모뷔뭰토 시의 북서쪽지역을 시작으로 사살라 구 해안선을 따라 술 오이리 고속국도(메레니치 군의 헤빌스 마을 지점)와 연결되는 고속국도이다.

4. 사살라 순환 고속국도: 모뷔뭰토 시와 오이리 시, 스텔리아 시와 벤타나 시, 메레니치 군을 연결하는 순환고속국도이다. 남북 고속국도에 비해 전체교통량은 적으나 벤타나 시 부근에서 많이 막힌다.

5. 그라나 동서 고속국도: 그라나 군을 관통하여 하빌리다드 군, 메레니치 군을 거쳐 사살라 군 남쪽지점인 술 사살라 JC까지 연결된다. 우회해서 오이리 제도를 동서로 관통하기 때문에 길이가 가장 긴 고속국도이다.

그라나 동서 고속국도.jpg
그라나 동서 고속국도

6. 아랑 고속화도로: 아랑 수로 남쪽을 따라 연결되는 도로이고, 원래는 고속국도가 아니었지만 고속화도로로 선정되면서 수로를 좁히면서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고속국도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이를테면 올림픽대로와 같은 개념이다.

아랑 고속화도로.jpg
아랑 고속화도로

7. 오이리-벤타나 고속국도: 오이리 시와 벤타나 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이다. 왕복 6차선 도로이며 고속국도 길이가 39.8km이지만 입출구가 5개뿐이다.

  • 기타 고속도로는 생략한다.



도로망

올리비안 왕국의 도로 총 길이는 98,543km이다. (고속국도포함)
수도에 있는 도로 길이는 28,198km이며 비율은 27%이다.



공항

올리비안 왕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25년마다 1개의 공항이 들어설 정도로 공항의 중요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국가 중 하나다.
대표적으로 2개의 공항이 있는데, 이는 상세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1. 오이리국제공항

오이리국제공항
Oiri International Airport
오이리국제공항.jpg
공항코드
IATAORN
ICAOGROA
주소
제1여객터미널
오이리시 레스타오이리동 공항로 1
제2여객터미널
오이리시 레스타오이리동 공항로 4
개항
1968년 2월 1일
활주로
제1활주로11L/3300m
제2활주로11CL/3300m
제3활주로11CR/2800m
제4활주로11R/2800m
운영기관
오이리공항공사

2. 드가드국제공항

드가드국제공항
Dgard International Airport
드가드국제공항.jpg
공항코드
IATADGN
ICAOGROB
주소
여객터미널
모뷔뭰토시 드가드동 광장대로 330
개항
1941년 5월 5일
재개항
2001년 5월 1일
활주로
제1활주로28L/2800m
제2활주로28R/2800m
운영기관
드가드공항공사

3. 벤타나국제공항

벤타나국제공항
Ventana International Airport
(사진 준비중)
공항코드
IATAVTN
ICAOGROJ
주소
여객터미널
벤타나시 메리나동 벤타나외순환로 512-1
개항
2018년 6월 16일
활주로
제1활주로14L/3000m
제2활주로14R/2600m
운영기관
벤타나공항공사

4. 스텔라국제공항

스텔라국제공항
Stellar International Airport
Stellar International Airport.png
공항코드
IATASTN(OSN)
ICAOGROL
주소
여객터미널
오이리시 일베노동 공항고속국도 24
개항
2019년 11월 6일
활주로
제1활주로29L/2850m
제2활주로29R/2850m
운영기관
Sholdings.png 스텔라홀딩스 스텔라공항공사

5. 올바나 비행장: 활주로 1개, 터미널 1개의 교육비행장이다.

6. 메레니치 공항: 활주로 1개, 터미널 1개의 메레니치 군과 벤타나 시의 시민들의 운송을 담당하는 공항이지만, 이용률이 그간 많이 저조했다. 그러나 이용률이 증가함에 따라 현 공항을 폐쇄하고 최근 의회에서 벤타나 공항으로 새로 건설하고자 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7. 스텔리아 공항: 활주로 1개, 터미널 없음 [폐쇄됨]

8. 사살라 공항: 활주로 2개. 터미널 1개의 공항인데 여객운송률이 크게 낮아지면서 군기지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 외 5개의 공항 또는 임시활주로가 있다.

항구

올리비안 왕국은 해상국가로써 항구가 굉장히 많다.
그러나 최근 쓸데없이 항구가 많아 항구정리계획이 진행중에 있다.

1. 드가드 국제여객항: 올리비안 왕국의 오이리 제도의 중심여객항이다.

2. 드가드 국제화물항: 올리비안 왕국의 오이리 제도의 중심화물항이다.

3. 오이리 페리터미널: 드가드 여객항, 공항도(島) 페리터미널 등을 연결하는 수도의 해상교통요충지이다.

4. 공항도 국제페리터미널: 공항이 위치한 섬을 공항도라고 하는데 간척사업으로 그라나 반도가 연결되었다. 그라나 군에 위치해있어 접근성이 떨어져보이지만 오이리국제공항과 가장 가까워 현재 많은 이용객이 사용하고 있는 추세다. 최근 비사우가 발전하면서 비사우와 오이리 제도를 연결하는 경유지로도 사용된다.

5. 메레니치 국제항: 확장공사를 최근에 끝마쳤으며 드가드 국제여객항보다 크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역할이 서로 제대로 분담되지 않아 항로가 많지 않다.

6. 하빌리다드 항: 수도에 마땅히 큰 항구가 없어 국제선 운행이 가능토록 설계되었지만 메레니치 항에 밀려 폐쇄될 위기에 놓였다. 레스타 올바나 제도를 연결하는 유일 항구이다.

7. 레스타 올바나 제도 항만(6곳): 레스타 올바나 제도에는 총 6개의 항이 있다.

8. 메리조지아 아일랜드 항: 몰레바 섬의 이전 이름은 메리-조지아 아일랜드이다. 영국의 지질학자인 '메리 론슨'과 영국의 동물학자인 '조지아 멜리나'가 발견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인데 오이리 사람들은 이 섬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명인 몰레바 섬으로 이름이 다시 수정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기리기 위해 항구 이름은 메리조지아 항으로 개명되었던 것이다. 몰레바 섬의 유일항구이다.

9. 그라나 항: 공항도 국제페리터미널은 작은 배만 접안할 수 있었는데 대형 선박도 접안할 수 있도록 그라나 항이 건설되었다. 이용률은 그러나 드가드 국제항에 밀려 저조한 상태이다.

10. 스텔리아 항 [폐쇄됨]

11. 벤타나 포르투갈 항 [폐쇄됨]

광역철도

올리비안 왕국은 광역철도가 딱 하나다.
본래 4개의 노선이 계획되어있었지만, 마리아 총리가 단 한 개 뿐인 올리비안 광역철도를 확장하면서 계획이 보류되었고, 엘바나 아나타브 총리가 지하철도 건설계획을 수립하면서 광역철도는 단 한개만 남게 되었다.

  • 올리비안 광역철도 : 1919년, 영국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올리비안 왕국의 수도인 오이리시와 당시 영국민의 도시였던 스텔리아시 그리고 영국민이 많이 살던 사살라 군을 통과하는 길이 84km의 작은 철도였지만 이는 1943년, 마리아 총리에 의해 확장공사를 이루었고 메레니치 군벤타나 시를 연달아 통과하는 최종 총 길이 145km의 철도로 연장되었다. 또한 왕복 2선이었던 철도가 왕복 6선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올리비안 광역철도.png

이후 다시 공사를 거치면서 시속 240km 이상의 프랑스 기술의 고속기차가 달릴 수 있게 되어 오이리 제도내에서 1일 생활권이 마침내 가능해졌다.

지하철도

올리비안 왕국은 다른 국가와 같이 지하철도 건설계획을 수립해둔 상황이었다.
본래 8개의 노선이 계획되어있었지만, 장기적 경제불황이 닥치자 5개의 노선만 완공되었다. 6호선은 현재 1구간만 완공된 상태다.

올리비안 종합노선.png

1) 1호선, 2호선, 3호선, 그리고 4호선

  • 올리비안 왕국의 첫 지하철도 4개노선 건설계획이 완성되자마자 착공을 시작하여 1989년 4개 노선이 모두 완공되었다. 착공 20년만인데, 공사가 12년이나 지연되었다. 공사가 지연된 이유는 지형과 자금부족 그리고 기술부족이었다.

2) 5호선

  • 올리비안 왕국의 지하철도 8개노선 건설계획에 따라 완공되지 않은 4개의 노선이 순차적으로 착공을 시작했다. 1991년 착공하여, 1999년 완공되었다. 지하철도 5호선은 규모가 다른 노선보다 크고 착공중에 이미 공항 리모델링사업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예산집행이 늦어졌기 때문에 공사가 지연되었다.

3) 6호선

  • 올리비안 왕국의 지하철도 8개노선 건설계획에 따라 완공되지 않은 4개의 노선이 순차적으로 착공을 시작했다. 2018년에 착공하여, 2019년 1구간이 완공되었다. 지상선으로 건설되어 공사기간이 1년 6개월로 길지도 않았고, 착공전에 이미 일대가 정리되고 정부에서 예산이 빠르게 집행되었는데 스텔리아 경전철을 대신하는 새로운 노선사업이었기 때문에 공사는 신속히 이루어졌다.
+ 논란 : 올리비안 정부가 지상선을 무리하여 빠르게 공사하면서 노선이 지나가는 벤타나 유적지대를 철저히 무시했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역사학계는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4) 7호선

  • 올리비안 왕국의 '지하철도 8개노선 건설계획'에 따라 완공되지 않은 4개의 노선이 순차적으로 착공을 시작했다. 2022년 착공예정이다.

5) 스텔리아 경전철

  • 스텔리아시 서부를 통과하는 지상경전철로, 구도심지에 사람이 많이 거주했을 적에 이용률이 매우 많아 확장을 고려했을 정도였으나, 신도심지가 동부에 형성되면서 이용률이 1/3로 급감하여 결국 폐선, 철거되었다. 비록 시가지가 있으나 건물의 높이가 모두 낮고 지대가 높아 신도심지의 높은 마천루들이 한 눈에 보이고 바로 서쪽으로는 환경적으로 매력이 뛰어난 사살라 화산 국립공원이 있어 경전철이 있던 자리에 관광용 레일바이크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건설 중인 인프라

(업로드 예정입니다)

전력/수도

아래의 표는 올리비안 왕국의 전력발전비율이다.

화력발전 수력발전 태양광/풍력/폐기물발전 원자력발전
82.1% 1.9% 9.3% 6.7%
프랑스 기술 원전.jpg
헤빌스 원자력발전소의 모델이 된 프랑스 원전


올리비안 왕국은 최근 프랑스의 기술 지원을 받아 헤빌스 친환경발전산업단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 산업단지 내에는 원전 4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외 폐기물발전소와 대규모 풍력발전소를 건설할 예정이다. 최근 올리비안 왕국은 미나미르 조유 총리시절 이후로 친환경 발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발전계획을 수립했으며, 석유 석탄 발전소 전체의 50% 이상이 곧 가동을 멈출 계획이다.

원자력발전소가 완공되었으나 잦은 지진의 발생으로 지반이 침하되면서 원전 1호기가 4도 가량 기울어지는 대형참사가 발생했다. 정부는 1호기를 폐로하기로 했다.

한편 수도 부분은 상수도시설이 굉장히 오래되어, 교체시기에 있으나 전쟁에 따른 예산부족으로 보수만 간간히 하고 있는 실태다. 최근 민주의회에서 상수도문제에 관한 긴급예산이 편성되었다. 또한 하수도시설과 관련해 개선의 필요를 느껴 국토부와 환경부는 편성된 예산 일부를 긴급투입한 상태다.

스포츠

●서기 465년 동로마 제국 문서●

스스로를 오이리쉬라 소개하는 그들은 신기한 것을 한다. 마치 그리스의 올림푸스를 연상케 하는 보트 경기가 그것이다. 4명의 사람들이 조를 짜 레이스를 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오이리쉬는 신기한 향신료를 가지고 있고 이름은 아케지라 한다. 그것은 매우 달콤하고 향기롭다. 레이스의 보상으로 화이트파이브동트리와 아케지라는것을 받는다. 화이트파이브동트리는 그냥 나무인것 같지만, 풍요와 건강을 상징한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올리비안 왕국/스포츠 문화 참고)



외교

올리비안 왕국은 최근 외교에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고 있다.

수 교 국
잉글랜드 왕국멕시코 합중국일민방남만양국
베네룩스 연합왕국대한제국베네치아 공화국베트남 민주공화국



왕국여권

아래는 올리비안 왕국에서 발행하는 공식 여권이다.
디자인은 2010년에 개정되었다. (초면-천호역님 도움)

올리비안 왕국 일반여권.png
올리비안 왕국 일반여권
올리비안 왕국 관용여권.png
올리비안 왕국 관용여권
올리비안 왕국 외교관여권.png
올리비안 왕국 외교용여권
올리비안 왕국 국왕여권.png
올리비안 왕국 국왕여권

다음은 여권의 안쪽이다.

여권 첫 면.png
모든 여권의 첫 면
여권 3장.png
국왕전하의 여권(가비오이 조나단, 조나단 8세 국왕)



정부 구성

아래 구성은 최초의 정부 구성이다.

국왕 (King)
가비오이 조나단 (Gabioi Jonathan)
행정부 (Executive)
국무부 (장관: 천호역)국방부 (장관: 하도현)국토부 (장관: 최만두)교통청 (청장: 파랑민)
경제부 (장관: 이길벝)미래과학부 (장관: 펜타)교육부 (장관: 피니오 알뤼치)복지부 (장관: 바티스티 엘도메르)
입법부 (Legislature)
총 리 : 미나미르 조유 (민종)부 총 리 : 멜레나 에느완최고의원위원회장 : 세레나데 엘브라도부위원회장 : 베데네샤 말라위

(법률 관련 자세한 사항은 올리비안 왕국 헌법 참조)
(정부부서 관련 자세한 사항은 카페 참조)

정당 목록

[ 제 43대 총선 (2010년) ]

  • 민주의회 총 의원 수: 150명
정 당 목 록 (Parties)
한오이당 (극우정당)독립당 (보수정당)국민당 (중도정당)경제평화당 (중도진보정당)
대서양당 (진보정당)바른정치당 (극좌정당)

이 후 기록은 올리비안 왕국/정치기록 참고

총선 기록

총 선 기 록
1999년 12월2003년 12월2007년 12월2011년 12월
2015년 1월2015년 7월2019년 8월2020년 2월(조기)
  • 1999년 12월: 독립당 대승
  • 2003년 12월: 경제평화당 대승
  • 2007년 12월: 대서양당 승, 경제평화당 승
  • 2011년 12월: 독립당 승
  • 2015년 1월: 총리 탄핵, 독립당 참패
  • 2015년 2월: 독립당 강제해산, 경제평화당 여당 복귀
  • 2019년 7월: 의회해산령 발동, 경제평화당 해산, 민주당/바른경제당으로 분열
  • 2019년 8월: 개헌안 통과로 200명 정원 재선거 강행 (의원임기는 1회만 3년)



왕위 연표

왕위 연표.PNG

총리 연표

역대 유명한 총리
1대 엘니치 하파시2대 안토나 니치 토바스6대 모르가와 엘레모스
13대 샤드리아 베넨 엘레마더스20대 마리아 덴 에리치와24대 엘베스 아나타브
25대 엘게나스 리베도르28대 세르겐데이 벨 데바나르29대 에나바드 아벨 엘리고
31대 미나미르 조유34대 카를로스 호그와트

엘니치 하파시는 1대 총리이자 1대 국왕이다. 오이리 공화국, 오이리 왕국의 국부이다.
안토나 니치 토파스 2대 총리는 입헌군주제의 갑작스러운 도입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기틀을 완전히 재정립하였다.
모르가와 엘레모스 6대 총리는 가장 장기집권한 총리로 유명하다. 정당의 자유를 침해한 독재적 총리로도 악평받지만 결과적으로 국가의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한 총리로 평가받는다.
샤드리아 베넨 엘레마더스 13대 총리는 민주의회 1대 총리로써 새 시대를 열게 된 총리다.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국가의 경제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개무역, 광업 중심의 경제체계를 형성하여 큰 경제적 이익을 창출해냈다.
마리아 덴 에리치와 20대 총리는 최초의 여성총리이자 역대 두번째로 가장 인기가 많은 총리로 꼽힌다. 여성 총리여서 정치에 능하지 못할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으나 미국 문화의 적극적인 수입으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고 의료법을 제정, 복지제도에 큰 힘을 쏟았다. 결정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일본에 선전포고, 소규모지만 적극적인 참전, 미국에 대한 지원의 모습을 보여 패배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어 경제살리기에도 큰 공을 세웠다.
엘나스 아나타브 24대 총리는 상대적으로 선진국에 비해 부족한 교통인프라의 체계를 현대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완성한 국토개혁총리로 꼽힌다.
엘게나스 리베도르 25대 총리는 뇌물수수혐의로 논란을 겪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의회개혁을 이끌어 오래된 정치체제를 개혁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올리비안 기니비사우 연방을 출범시켜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자주국방개혁안을 의회에 제출, 논의케 하여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세르겐데이 벨 데바나르 28대 총리는 2차 산업 집중 육성을 위해 국가 정부주도 산업개혁을 추진했지만 의회가 반대하자 총리권한으로 날치기 집행을 강행했는데 이로 인해 의회안에서는 물론 밖으로도 지지율이 최악으로 떨어져 재선에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정책은 올바랐고 나중에서야 긍정적으로 재평가되었다.
에나바드 아벨 엘리고 29대 총리는 신도시개발정책, 화이트필드 관광타운 개발정책 등 수도경포화를 막고 2차 산업과 3차 산업을 동시에 육성하여 경제부활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지만 막말논란으로 결국 사퇴한 불운의 총리이기도 하다.
미나미르 조유 31대 총리는 지지율이 저조해서 정치적 공백이 컸던 총리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재선에 성공했으며 산업적으로 큰 발전을 이끌었다. 친환경적인 발전을 특히 꾀했으며 인프라사업에도 힘썼다.
기무드 한스 32대 총리는 독립당 출신 총리인데, 독립당의 국왕탄핵안에 지지하지 않아 독립당과 독립당과 결탁한 사법부에 의해 탄핵당한 불행한 총리이다. 그는 정신적 충격으로 자살했지만 33대 총리 당선 이후 독립당이 브라질이 일으킨 남대서양전쟁에 크게 관여한 사실이 미국과 브라질과의 관계에서 폭로되면서 전 총리는 명예총리상을 수상받았다.
다이아 헤몬드(DH) 33대 총리 또한 독립당 출신이지만, 부총리에서 총리권한대행직을 수행하게 된다. 정부가 아작난 상태였기에 총리직을 따로 뽑지 않고, 지금까지 총리직을 이행하고 있다.

역사

ㅁ 올리비안 왕국

2018년 8월, MCAC에서 '오이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가상국가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재 국명은 '올리비안'으로 개칭되었다.

올리비안 왕국의 역사 (History of Olivian)
고전중세르네상스근대현대
오이리 족오이리 족포르투갈령포르투갈령대영제국령
포루투갈령오이리 공화국오이리 왕국올리비안 왕국올리비안 왕국 (파타나샤정권) 올리비안 왕국 (민주의회) 올리비안 왕국 (민주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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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탄생

지리학자들에 의하면 오이리 제도는 기원전 6000년경에 해저화산의 거대한 폭발로 형성되었다고 보는데 화산이 6회에 걸쳐 폭발하면서 자연적으로 봉우리가 소실되었다. 오이국립공원 지하로 봉우리가 소실된 화산이 묻혀있으며 현재 그 근처로 왕궁과 정부건물이 들어섰다. 마뮤트 화산은 사화산이다. 오이리 제도로 원주민들이 유입된 때는 500년 즈음으로 보인다. 가뭄의 심화로 바다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 중 몇몇이 바다를 건너 오이리 제도로 들어왔다고 인류학자들은 보고 있다.

1502년

AC 1502년, 원주민들이 살던 *오이리 제도에 포르투갈인들이 발을 들이면서 오이리제도는 180도로 달라졌다. 농경사회가 주를 이루던 부족 소국가는 유럽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동시에 연결하는 남대서양 가운데에 위치한 오이리제도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포르투갈군의 군사적 요충지로 발전했고 원주민들과 포르투갈인들은 서로 협력하며 200년간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원주민들은 신문물과 새로운 포르투갈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들은 포르투갈로부터 생필품 및 여러 도서들을 얻는대신 포르투갈군에게 군량을 지급했다.

1711년 ~

그러나 전염병의 발생으로 포르투갈군은 긴급히 본국으로 철수했고 1711년, 전염병이 가고 영국군이 들어오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인과 다르게 영국인은 오이리제도의 원주민들에 적대적이었다. 영국군은 포르투갈군이 건설해놓았던 군사기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강제로 노동시켰고 오이리제도의 이점을 잘 알고 있던 영국은 급기야 원주민들을 기존의 마을에서 해안가로 몰아내 원주민보호라는 명목으로 수용소와 다름없는 곳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많은 영국인들이 섬으로 들어오면서 점차 섬은 쓰레기로 넘쳐났고 해안가에 부족한 식수로 인해 매년 평균 50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사망했다. 이는 2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자체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배워온 군사기술과 문물을 활용하여 오이리 독립군을 조직했다.

이때 포르투갈은 영국이 무단으로 자국의 땅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이 불만을 품고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에 포르투갈은 몰래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을 지원하게 되는데 포르투갈인에 우호적이던 오이리 제도 사람들이 영국군을 성공적으로 몰아낼 경우 포르투갈군을 다시 환영하고 포르투갈에 충성을 다할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714년 5월, 영국군의 일부가 해적소탕을 위해 카르보니아 제도로 출발했을때 당시 독립군의 대장이던 '알 포테데르'는 영국군을 기습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독립군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더군다나 군사기지 안으로 들어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포르투갈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고 포르투갈은 그들에게 몰래 대포와 포탄을 지원했다. 대포 앞에 성벽은 무용지물이었다. 영국군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카르보니아 출격으로 절반정도가 자리에 없는 상태에서 독립군의 강렬한 공격으로 영국군은 항복했다.

(한편 현재의 스텔리아 시 위치에 영국인이 형성한 사우스 조지아 타운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훗날 스텔라연방공화국의 수도로 발전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은 강한 분노를 느끼고 프리깃함 6척을 출격시켰으나 앤 여왕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작전은 취소되었다. 이후 포르투갈군이 다시 상륙했는데 독립군으로부터 환영받았지만 오히려 일반 오이리 사람들은 포르투갈을 환영하지 않았다. 포르투갈도 영국과 다름없는 유럽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15년, 포르투갈은 결국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군량도 받지 않기로 했다. 대신 포르투갈은 군사기지가 해당하는 땅은 포르투갈땅임을 분명히 했다.

이후로 146년간 오이리 제도는 사실상 유럽과 다른 지역 국가들로부터 포르투갈 땅임을 인정받았다. 독립군은 경비대로 바뀌어 치안을 담당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원주민이 아닌 포르투갈에 속한 오이리 자치시민으로써 살게 된다. 오이리 제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포르투갈풍 주택이 즐비했고 길은 깨끗한 조약돌길로 깔렸으며 2개의 항구가 새로 들어서면서 남대서양 인근 국가들 중에서 가장 발전했다.

1861년

그러던 1861년, 유럽의 정세가 복잡한 가운데 브라질이 독립을 앞두고 미국이 남북전쟁을 시작하면서 오이리 제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포르투갈군의 보호를 받던 오이리 제도의 시민들은 포르투갈이 철수하게 될때 민족의 존속이 위태해질 것을 염려하여 당시 오이리 민족의 전통을 고수하는 동시에 신문물을 꾸준히 받아들이면서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세력 (온건적 근대화파)의 지도자인 '엘니치 하파시'의 주도 아래 오이리 의회 설립을 추진했으며 포르투갈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결성하고자 하는 독립의 열망, 의지가 넘쳐났다. 포르투갈은 1862년, 오이리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4월 14일, 오이리 의회가 개원, 헌법이 동시에 제정, 의회가 '엘니치 하파시'를 1대 총리로 선출하면서 오이리 공화국이 선포된다.

1868년

그러나 1868년, 왕정파가 힘을 받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합병 제국을 선포,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등 제국주의가 만연하자 자국내에서 우리도 세계적으로 지위를 높이기 위해 유럽과 같이 왕정을 선포해야 하지 않느냐하는 의견이 등장했고 의회에 입헌군주제안을 상정, 통과되면서 오이리공화국에 1대 국왕이 등장하는데 총리가 국왕으로 즉위, 새로운 총리가 재선출되어 왕과 총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지금으로 보면 영국과 일본 등과 같은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한다. 당시 국왕은 행정부 수반, 총리는 입법부 수반으로써 서로 견제하면서 통치하는 형태였다.

사우스조지아 혁명(1872년)

오이리 공화국이 입헌군주국 체제로 다시 변화하면서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은 이에 매우 불만적이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화이트필드(Whitefield)는 공화정을 추구했는데 영국의 군주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이리 왕국의 새로운 왕을 섬길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를 매우 불쾌했기 때문이다. 시장은 즉각 반대하고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1872년 3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사우스조지아 혁명'이라고 한다.

당시 미국은 사우스조지아를 지원했고 영국도 사우스조지아를 지원하기에 이르면서 오이리 왕국은 재빨리 사우스조지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브라질이 이를 계기로 군사를 상륙시킬까봐 두려워했고 사우스조지아에 영국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약간의 이질감이 작용했기도 했다. 사우스조지아 사람들은 6일만에 끝난 혁명에 당혹하기도 했지만 오이리 왕국의 독립승인아래 정부를 부랴부랴 꾸리고 1872년 6월, 스텔라공화국을 선포한다. 이때 벤타나 시민의 일부와 북메레니치 구가 스텔라공화국에 참여하면서 스텔라연방공화국이 결성되었다.

1901년

이후 1901년, 미국과 브라질, 영국이 다시끔 오이리 제도의 전략적, 교통적 요충지로써의 이점을 알아보고 군사적 동원을 통해 자국으로 무력으로라도 편입시키기 위한 준비를 각자 가하고 있던 와중 3대 국왕 '코스타 하파시'는 포르투갈과의 왕실결혼을 발표한다. 200년간 우정을 서로 쌓아온 포르투갈과동맹을 굳건히 하여 외세를 견제하고자 하는 것에 따른것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공화정파 세력의 반란 등으로 국내정세가 혼란스러웠고 포르투갈은 왕실결혼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1910년 10월, 그러나 포르투갈에 혁명의 발생으로 입헌군주제가 폐지, 민주공화제가 들어섰고 포르투갈 왕실은 동맹국이었던 오이리로 피신한다. 하파시 왕조는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족을 받아들였고 그들을 극진히 우대했다. 코스타 국왕은 국호를 '올리비안'으로 개칭하고 포르투갈 왕족과 하파시 왕족을 서로 합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미국, 영국 등은 이를 주목했다.

1912년

1912년 2월, 코스타 국왕이 병사하고 4대에 즉위한 '파타나샤 하파시'는 강력한 국가를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시민들에게 호소했으며 '강력한 왕실, 왕실 보좌 의회'을 국가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당연 의회는 이것을 헌법에 위반하며 의회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그런데 당시 군부는 왕실의 편을 들었다. 상대적으로 권력이 없던 군부가 외세의 힘으로 침략자들을 몰아내려는 의회세력을 달갑지 않아했기 때문이다. 군부는 왕실과 함께 쿠테타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9.15 군사쿠테타'가 발생한다. 의회는 해산되었고 절대군주제로 정부가 변화하였다. 군부는 단숨에 국왕 바로 아래의 절대권력세력으로 성장했다. 미국, 영국 등의 강국들은 이에 반발했다. 그리고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훼손, 의회, 헌법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규정하고 미국은 올리비안 왕국을 압박해나갔고 영국은 영유권을 주장하며 무력도발을 강행한다.

1913년

1913년 1월, 영국의 아이언 듀크급 전함 2척이 오이리만에 등장했다. 올리비안군은 해안포로 경고발포했으나 오히려 영국 전함은 오이리만을 폭격해 9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오이리만 사건'이 발생한다. 영국의 올리비안 왕국 폭격에 파타나샤 국왕은 영국에 강력히 항의했고 국제사회에 영국의 부당함을 알렸으나 묵살당했다. 이후 영국은 포르투갈 정부와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리 제도는 영국령임을 골자로 하는 강제편입안을 의회에 통과시켰고 군사를 동원하여 오이리 제도를 침략한다.

올리비안-영국 전쟁(1913년)

영국은 오이리 제도의 전략적, 교통적 이점을 알고 아프리카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더더욱 오이리 제도를 갈구했다. 당시 영국의 총리인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는 오이리 제도에 대해 "영국의 전성기를 10년 앞당길 땅"으로 표현하고 의회에 오이리 제도의 무력편입을 강력히 설득했다. 결국 의회는 올리비안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올리비안 왕국은 당시 군부를 적극 지원하고 있었고 무기를 최대로 적재해두고 있었다. 외세의 침략은 1901년부터 코스피 국왕과 의회로부터 예고되었다. 이를 대비하고 있던 것은 당연했다. 영국은 오이리만을 군함을 통해 사전조사했고 오이리만을 통해 상륙하고자 했다. 영국은 1913년 11월, 8000여명의 군사들과 군함 4척을 끌고 올리비안 왕국에 선전포고한다. 영국군은 성공적으로 오이리만에 상륙했다. 군함은 왕국을 포위했고 올리비안 왕국이 스스로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파타나샤 국왕은 영국군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강렬하게 저항했다. 영국군은 드가드시와 수도인 오이리시를 점령했으나 게릴라전투의 발생으로 수많은 영국군이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했으며 식량지대를 점령하지 못해 본국으로부터 식량지원이 올때까지 군사들이 굶는 처지에 놓여 8천명의 군사들중 5천여명이 전투를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영국군은 수도를 무력으로 7개월 이상 점령, 식민지화하는 계획을 세워 실제 실행에 옮겼으나 본국과 너무 멀고 해적의 잦은 출몰로 지원로가 매번 끊기는 일이 발생했고 결정적으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국제정세가 혼란스럽자 결국 무승부로 하는 평화협정을 채결, 영국군은 철수했다. 1914년 8월 18일이었다. 파타나샤 국왕은 이를 승리로 규정하며 자축했으나 수도가 영국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고 항구 1개가 완전히 파괴되는 등 경제적 손실이 만만치 않았으며 이로써 국왕의 지지율은 30%까지 떨어졌다.

1915년

미국은 올리비안 왕국이 영국군을 물론 승자없는 전쟁으로 결론났지만 몰아내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미국은 오이리 제도를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건덕지가 전혀 없었지만 하와이 제도 등처럼 흡수편입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의 철수에 미국은 무력편입계획을 철폐하고 동맹을 통해 미국군을 주둔,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지역의 영향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친화정책을 수립했다. 말이 친화정책이지 사실상 동맹관계를 악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리비안 왕국은 이번 일로 외세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미국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1915년인데 영국군이 철수한 후 겨우 1년이 넘었던 때였다. 미국의 동맹제안을 거절하고 파타나샤 국왕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이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남서유럽과 브라질 등 남아메리카 국가들과 친밀하게 지내고자 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더 이상 올리비안을 우호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조그만한 영토에 백만명이 조금 안되는 인구를 가진 올리비안 왕국을 변방의 작은 약소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포르투갈의 경우 특히 포르투갈 왕족을 받아준 올리비안 왕국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민들은 파타나샤 국왕의 외교적 노력이 성과가 없으며 또 다른 전쟁을 야기할 것이라고 우려했고 국왕이 자리에서 자진해서 물러나라며 시위를 전개하기까지 이르렀다.

파타나샤 국왕 암살(1916년)

올리비안 왕국의 운명이 바뀐 해였다. 외교실패,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올리비안 왕국은 총체적 난국 상황이었다. 전후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왕국 사람들은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는 모두 국왕의 탓으로 생각되었다.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국왕의 하야를 요구했고 국왕의 열렬한 지원을 받던 군부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러던 1916년 5월 18일, 나미차시에서 군부의 무력진압으로 40여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절반이 어린이이였다. 이에 분노한 나미차 시민들은 왕궁으로 시위행진했고 이에 여러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국민의 약 10%가 왕궁을 애워싸고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5월 22일, 파타나샤 국왕이 한 시민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시민들은 즉각적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왕의 권한을 낮추는 입헌군주제의 부활을 요구했으며 다음에 즉위한 '알고레이 하파시'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올리비안 왕국은 다시끔 민주의회 재구성에 성공했으며 군부가 이에 반발하며 반기를 들었지만 내외적으로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군인들은 시민들을 무력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 파타나샤 국왕 암살사건 논란
위에서는 한 시민이라고 언급했는데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이는 파타나샤 국왕의 미용사였던 '메리 왓슨(Merry Watson)'(영국인)이었다. 영국이 올리비안 왕국을 흡수하는데 실패하자 국가적 자존심을 크게 훼손당한 영국의 여인이었던 메리 왓슨이 미용가위로 그를 암살하고 왕궁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얘기인데 이는 지어낸 이야기라며 현재까지도 논란이 분분하다. 올바른 역사교육의원회에서 주장하는 암살자는 '그레이드 엘반', 오이리 대학의 평범한 학생이었다. 실제로 그의 노트에서 국왕암살계획이 적혀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를 근거로 이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안 왕국 교육부의 올리비안 역사협회(OHA)는 여전히 암살자를 메리 왓슨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파타나샤 국왕의 암살자가 메리 왓슨으로 규정된 것일까? 이후 즉위한 알고레이 국왕은 암살자가 메리 왓슨이라고 직접 시민들 앞에서 밝혔다. 그런데 올바른 역사교육의원회에서는 알고레이 국왕은 왕족이었지만 파타나샤 국왕을 지지했던 친파타나샤 세력이며 그를 후원했기 때문에 시민이 죽인 것이 아니라 파타나샤 국왕의 미용사로 용의자를 바꿔치기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안위가 걱정됬던 알고레이 국왕이 일반시민이 암살했다고 발표하면 시민들이 봉기하여 왕정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 영국을 교묘하게 국내 정치에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알고레이 국왕의 보좌관이던 '모토나 알리모아'는 그가 그의 백성들을 두려워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다른 근거는 없는 상태고 결국 여태까지 논란으로 남는다.

+ 모토나 알리모아
알고레이 국왕이 올바른 정치를 이끌수 있도록 지도한 여성 보좌관, 알고레이 국왕의 아내의 동생이기도 하여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알고레이 국왕이 민주의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왔고 경제발전계획 수립에도 참여한 보좌관인데 일부에서는 국왕의 정치에 크게 간섭하여 알고레이 국왕이 허수아비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컸고 그녀를 왕실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역사학자들은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녀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보좌관을 52세의 나이에 관두고 54세에 알리모아 보건대학교를 올리비안 왕국에 설립하여 이 보건대학이 훗날 올리비안 국립대학에 합쳐져 올리비안의 보건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마리아 총리때 보건대학이 올리비안 국립대학에 의대로써 편입되었다.

1922년

알고레이 국왕(5대 국왕)과 샤드리아 베넨 엘레마더스 총리(민주의회 1대, 13대 총리)는 1922년 각각 행정부 수반, 입법부 수반을 맡았고 경제발전계획을 수립, 중개무역과 관광경제를 활성화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미국과 동맹관계를 채결하되 미국군의 주둔을 허용했고 군사기지 건설 등 주둔에 필요한 것은 미국이 100% 부담하되 식량 및 식수를 50% 이상 올리비안 왕국에서 지원하기로 하였다. 미국은 전후복구를 위한 경제적 지원도 약속했고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아프리카 해적들이 미군에 의해 소탕되고 주변의 위협이 없자 해외 투자자들도 몰렸다. 특히 올리비안 왕국의 자원탐색에 미국이 투자하여 인광석과 금광석을 발견하여 자원을 수출, 올리비안 사람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1939년

마리아 덴 에리치와, 최초의 여성총리가 탄생했다. 전 총리의 병사로 의회는 새로이 총리를 선출해야했고 당시 경제평화당의 최고의원인 마리아가 여성총리로 최초로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여성총리가 탄생하자마자 9월, 2차 세계대전이 발발, 국제정세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때 올리비안 왕국은 미국과 동맹인 상태였고 물론 미국은 유럽에서 벌어진 2차 세계대전에 군수물자를 수출할뿐 참전 생각은 없었지만 올리비안 왕국은 세계에서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연합군국으로써 참전하는 것을 고려했다. 알고레이 국왕은 이에 부정적이었다. 마리아 총리는 이에 참전을 보류했다. 한편 미국 문화가 주둔하는 미국군을 통해 유입되면서 경제-문화가 서로 대등하게 발전했다. 의료법도 미국의 영향으로 제정되었고 청바지, 콜라 등 미국의 문화가 끊임없이 유입되면서 점차 남유럽 문화와 미국의 문화, 오이리 원주민의 남아있는 문화와 혼합되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1940년

스텔라연방공화국을 최종 흡수통일하면서 영토가 확장되었다. 스텔라 시의 시민들은 이를 매우 환영했다.

1942년

마리아 총리는 1942년 1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일본에 미국과 함께 전쟁에 임할 것을 시사, 선전포고했다. 의회 의원의 63%가 찬성했고 알고레이 국왕이 이를 승인했다. 이로써 올리비안 왕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연합국 계열에 섰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마리아 총리는 국방력강화에 크게 노력했다. 최초로 올리비안형 소형전투함을 설계했고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배치하는 등 국방의 힘을 길렀다. 한편 도박 문화와 마약이 유입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기도 했다.

1945년 ~

1945년 8월, 마리아 총리가 재선에 성공하고 두번째 임기중, 미국에 군량 지원, 프랑스에 1100명 군사파견 등으로 비록 소규모이지만 적극적으로 연합국측으로 참전해 승리하면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각각 배상금을 받아냈다.

1949년, 프랑스와 동맹을 채결했다.

1950년, 캐나다와 동맹을 채결했다.

1951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군이 일부 철수했다.

1952년, UN에 가입했다.

1955년, 인구가 3백5십만명을 돌파했다.

1958년, 금광의 50%가 고갈되었다. 의회는 자원의존도를 낮추고자 경제개혁을 실시했다.

1960년, 영국과 공식으로 화해하고 영국대사관 설치를 허용했다.

1962년,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와 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 남유럽, 미국과 매우 가깝고 인종도 흑인이 아닌 유럽계이므로 유럽국가로 인정받고자 했으나 유럽대륙과 거리가 너무 멀어 유럽연합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63년, 마리아 전 총리가 사망했다.

1964년, 알고레이 국왕이 병사했다. 알고레이 국왕은 자녀가 없어 하파시 왕조는 막을 내렸다. 조나단 왕조가 탄생했으며 조나단 왕가는 살아남은 포르투갈 왕가에서 이어져 내려온다. 에이하바람 조나단 국왕이 즉위했다. (6대 국왕)

1966년, 엘베스 아나타브 총리가 선출되었다.

1967년, 수도를 확장했다. 이로써 영토의 1/3이 수도영역이 되었다.

1968년, 오이리 국제공항이 건설되었다. 드가드 비행장은 폐쇄되었다.

1969년, 지하철 건설을 시작했다. 인구가 4백만명을 돌파했다. 엘베스 총리가 재선에 성공했다.

1972년, 30층 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마천루가 즐비하기 시작했다. 엘베스 총리는 역대 최고의 총리로 꼽힌다. 이때 올리비안 왕국은 세계 30위권 경제대국으로 크게 성장했다.

1974년, 올리비안 왕국의 사기업이자 세계적 기업인 길버트 그룹이 창설되었다.

1981년, 석유매장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1984년

기니비사우 공화국이 총리제를 폐지하고 국민평의회를 구성한 해, 급작스럽게 올리비안 왕국과 기니비사우 공화국은 혈연동맹관계를 선언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두 국가 모두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도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기니비사우에서 오이리제도로 넘어와 부족국가를 구성했던 원주민들이 오이리족이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매우 끈끈했다. 올리비안 왕국과 기니비사우 공화국은 서로 혈연동맹관계임을 선포했고 이듬해 올리비안 기니비사우 연방이 출범했다. 다만 경제적, 문화적으로 올리비안 왕국이 기니비사우에 비해 매우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연방은 올리비안 왕국이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석유매장이 확인되어 해상 유정 건설이 계획되었다.

1985년 ~

1985년, 브라질 군함이 올리비안 왕국의 영해를 무단으로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미국과 올리비안 왕국은 브라질에 항의하고 국제법 위반을 이유로 브라질을 국제헌법재판소에 기소했다. 브라질은 곧바로 사과했지만 브라질이 의도적으로 올리비안 왕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려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올리비안 왕국이 참가, 올림픽에 최초로 참가하게 되었다.

1989년, 지하철이 우여곡절 끝에 완공되었다. 지하철 착공 무려 20년만이다. 인구가 5백만명을 넘어섰다.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왕국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간 자원과 수공품, 중개무역으로 경제를 성장시켰지만 선박의 발달에 따른 중개무역 감소와 자원의 고갈임박 등으로 경제적 쇠퇴가 시작되었다.

1990년, 에이하바람 조나단 국왕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에이하바람 국왕의 아들인 바라나달 국왕이 즉위했다.

1991년, 세르겐데이 벨 데바나르 총리가 선출되었고 경제부활을 약속했다.

1992년, 2차 산업 집중투자계획을 발표했지만 너무 늦은 계획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매우 컸고 의회에서 다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총리권한으로 강행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드가드시와 그라나군에 대규모 산업단지가 착공됬다. 한편 브라질이 2차 도발을 강행했다. 브라질은 이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비난당했으나 도발은 이후에도 2주간 길게 이루어졌다. 이는 자주국방정책을 강화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의회는 이에 부정적이었지만 브라질의 도발 이후로 점차 자주국방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

1993년, 기니비사우 공화국과 합병하자는 의견이 의회에서 나왔고 긍정적으로 검토되었으나 기니비사우 공화국의 대통령이 어처구니 없는 상상이라며 선을 그었다. 이 발언으로 올리비안 기니비사우 연방이 한때 위태로웠다.

1995년, 세르겐데이 총리가 재선에 실패했고 에나바드 아벨 엘리고 총리가 선출되었다. 에나바드 총리는 산업육성은 올리비안 왕국을 부활시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산업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1996년, 오이리 국제공항이 확장되었고 인구가 5백5십만명을 넘어섰다. 아프리카 난민 등이 꾸준히 유입되어온 결과였다. 과인구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커 결국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인구성장률이 급감했다.

1997년, 에나바드 총리가 스텔리아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이는 수도의 포화상태를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

1998년, 제철소 단지, 화학공업단지 등 여러 산업단지들이 차례대로 완공되었고 화이트필드 타운 건설계획이 발표되었다. 관광업 증진을 통해 경제를 살리고자 하는 정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길버트 몰타워, 메가타워 등이 착공되었다. 모뷔뭰토 군이 개발되어 인구가 유입되면서 일찍 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모뷔뭰토 군이 아직 도시를 형성하지 못하였으므로 군으로 남아야 한다고 본다.

1999년, 에나바드 총리가 재선에 성공했으나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에나바드 총리가 막말논란을 겪으면서 야당의 정치적 공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국왕은 허수아비다라는 발언이 결정적이었고 결국 에나바드 총리는 사퇴했다.

2000년, 바라나달 국왕이 병사했다. 가비오이 조나단이 8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MCAC 출범)

2015년, 남대서양전쟁이 발발하였다. 또한 국방부 쿠테타(2015)의 발생으로 국가가 한때 전복될 위기에 처했지만 이후 기니비사우 지역을 얻어 합병했고, 부당히 퇴위되었던 국왕이 다시 복위한다. (자세한 사항은 남대서양전쟁참고)

기업 목록

기업설정은 각 기업을 창설한 각 회원분께서 하였음

길버트 그룹

길버트 그룹은 1974년 창설된 올리비안 왕국의 사기업이자 세계적 기업이다. 중화학공업, 조선업으로 시작하여 점차 관광업, IT산업으로 2차 산업 중심 기업에서 3차 산업, 4차 산업 중심 기업으로 변화했으며 길버트 몰 타워, 길버트 디자인센터 등 여러 국가사업에도 참여한 바 있다.

최근에는 그룹 일가에서 정치가 또한 배출하여 상당히 이슈가 되고 있다.

경영진 목록
<<<길버트 그룹 회장 : 길버트 리길버트 그룹 부회장 : 기르벗 리>>>
길버트쇼핑 사장 : 기르버 리길버트무역 사장 : 기르버르 리길버트전자 사장 : 길버르 리월드와이드항공 사장 : 기르벝 리
길버트중공업 사장 : 길버 리길버트오일 사장 : 길보트 리길버트리테일 사장 : 길봇 리길버트엔터테인먼트 사장 : 기르봇 리
길버트식품 사장 : 기르버르 리

이 외 계열사는 너무 많아 일부만 서술하였다.

ㅁ 역사

중국계 이주노동자 2세 길버트리가 삼촌이 운영하던 구멍가게 길버튼상회에서 부터 시작된다. 길버트리는 가게를 물려받아 사업을 확장하였고, 1974년 올리비안 왕국에서 길버트건설을 설립, 마천루 건설업에 뛰어든다. 그후 여러가지 분야로 사업을 확장시키며 1979년, 올리비안 기업 최초로 해외 진출을 한다.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때 당시 아시아에 많은 투자를 해 피해를 보기도 하였으나 극복하고 성장, 지금의 세계적인 길버트그룹을 이룩하였다.

DH 그룹

DH 그룹은 1981년 올리비안 왕국에 진출을 시작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유망의 기업 중 하나이다. 군수업을 중심으로 기업이 운영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무기들을 수출하고 있다. 올리비안 왕국도 DH 그룹의 무기를 구매, 배치하고 있는 상태이다.

ㅁ 역사 (가상세계관이 약간 가미되었습니다)


대한왕국 참고

1902년 구한말에 고종이 공화파들의 테러로 사망하고 순종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는데 순종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반도 점령을 앞두고 있는 일제에 맞서 러시아와 동맹을 채결하고 뛰어난 외교활동으로 미국의 중재하에 열강들 사이에서 한반도가 완충지대로 인정받게 된다. 일제가 조선반도 점령에 실패해 대륙진출에 차질이 생기자 조선에 전쟁을 선포하려 했으나 러시아와 중국이 일제가 조선반도를 점령할 경우 일제가 두 국가에 동시에 대항할 정도로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조선보호를 선언했고 결국 일제는 조선반도의 점령을 포기한다. 그러나 조선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여러가지 수단을 이용했고 순종은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한상회를 세우고 자신의 둘째 아들인 이현을 회장으로 세운다.

대한상회는 만주를 시작으로 주변국을 상대로 돈을 얻어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한국에 당시 불던 애국주의 열풍으로 한국에서 큰 이익을 얻어 사업 기반을 다진다. 마침 중일전쟁이 벌어지고 일제가 대한산업(대한상회에서 이름을 바꿈)에 조선 내 공장 건설 및 이용을 요구했고 전쟁특수를 누리면서 대한산업은 무기 및 중공업 기술 또한 갖춘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때 조선은 재빨리 친미정책을 펼쳤고 마찬가지로 소련의 후방기지와 중국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며 큰 이익을 창출했다. 이후 국공내전을 겪으며 군사기술을 올린 대한산업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산주의자 군인이였던 김일성을 지원하여 세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왕국(조선의 새 이름)을 침공하여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때 최초로 민간군사기업을 출범시키고 전쟁이후 황폐화된 대한왕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산업지원에 뛰어들면서 21세기에 들어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최상위권에 드는 기업이 되었다.

역대 올리비아 지부장
1981년~1987년 이승하1987년~1996년 권휴진 지부장1996년~2001년 최상헌 지부장현 서광인 지부장



PF 그룹

PF 그룹은 1985년 트럭 한대를 가지고 시작한 작은 운송회사에서 역사가 시작된다. 올리비안 왕국의 사기업이자 세계적인 대표운송기업으로 발전하였다.

ㅁ 역사

1985년 트럭한대를 가지고 시작한 운송 사업이 빠르게 커지면서 7년만인 1992년 세계적인 운송사가 되기 위해 선박을 도입하여 PFShipping 설립과 비슷한 무렵 긴급화물용 헬기로 PF Airways가 설립된다. 항공사업을 확장시키다가 받은 토잉카로 PFGround가 설립되는데 이때가 세계 경제위기의 최고점이었고 자본이 유출되어 회사가 흔들리면서 항공정비업을 폐업결정하고 택배사업을 운송과 바꾸고 허브 운영도 자회사로 전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PFHUB와 PF택배이다. 2000년대, 항공사업에 에어버스사의 기재를 도입하고 건설업을 시작하였으며 2003년에는 영화사업에 뛰어들면서 PFC가 세워지고 2005년, 독특하게 팝콘 사업을 영화관사업과 분리하여 Pop&Fun식품을 설립한다. 비슷한 무렵에 일본의 유니클로사를 모방하여 SPFO를 세운다. 그 후 식품사업과 의류사업에 크게 투자하면서 PF그룹이 PF홀딩스로 바뀌고 운송그룹, 식품그룹, 의류그룹, 그외 사업을 묶은 PF그룹으로 분할되면서 PF건설의 자금력 아래에서 여러 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이로써 현재의 기업 목록이 되고 항공정비업에 PF Aviation Tech로 다시 진출한다.

VIACOM 그룹(천호그룹)

VIACOM 그룹은 역사가 깊은 파라마운트 스튜디오가 올리비안 왕국으로 이전하면서 시작된 올리비안 왕국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올리비안 왕국 주요 사기업이다.

ㅁ 역사

1976년, 당시 스타트렉 더 모션 픽쳐를 제작중이던 파라마운트 픽쳐는 예산 절감을 위해 부지 이용도가 낮은 곳을 모색하던 중에 올리비안 왕국으로 이전,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로 재창립하면서 역사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단순히 영화촬영 회사에 그쳤지만 시간이 지나 1998년에는 정부와 합작으로 공기업인 천호교통공사와 천호역사운영이 출범, 2005년에는 일본의 훼미리마트와 닌텐도사와 합작하여 천호훼미리마트, 올리비안닌텐도를 설립하게 된다.

파라마운트 그룹은 추후 본사 직영으로 전환하여 미국의 바이아콤 그룹 산하로 들어가게 되는데 2007년, 그곳에서 대한왕국의 컬쳐브랜드 CJ와 합작하여 올리비안 왕국내 올리비안 CJ 창립, 투니버스의 개국, 투썸플러스 지점 개설 등이 이루어지게 된다. 현재 왕국내 지사는 그룹 산하의 건설사에 의해 건축된 파라마운트 사 건물에 입주해있다.

(여담으로 파라마운트 사 건물 상공에는 공사 창립 30주년으로 제작된 엔터프라이즈 조형물이 있다)

HL 그룹

HL 그룹은 올리비안 왕국의 대표적인 사기업이다.

ㅁ 역사

  • 1954년, HL그룹 창립자 호텔리마가 HL 올리비안 항공사를 설립하여 비치크래프트 모델 18 1대와 스틴슨 스테이션 웨건 항공기 2대를 미국에서 중고로 들여와 승객, 우편운송 사업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항공산업을 바탕으로 회사가 성장하기 시작한다.
  • 1974년, Cobalt Blue Shipping 을 설립하고 해운업에 진출하였다.
  • 1975년, HL건설을 설립하여 건설업에 진출하였다.
  • 1977년, 영화 배급사이자 게임 유통사 HL Arts를 설립하여 루카스필름과 올리비안 왕국 내에서 스타워즈 테마를 독점계약을 하였다.
  • 1980년, HL 올리비안 항공사를 Cobalt Blue Airlines 로 사명을 변경하고 Cobalt Blue 항공 자회사로 Cobalt Airport 를 설립하였다.
  • 1991년, 항공기 부품제작과 MRO사업을 하는 HL Aviation Industry 가 설립되었다.
  • 1996년, 관광업계에 진출하여 HL Tour를 설립했다. HL 투어의 자회사로 올리비안 시티 투어가 있다.
  • 2006년, 호텔과 면세점을 운영하는 거킨호텔이 설립되었다.



강남 그룹

강남 그룹

오이 그룹

오이 그룹은 NEO 3사 연합이라는 최고 * 최대의 그룹 연합 중 하나인 PTY 그룹의 오이 그룹이다. 오이 그룹 내에서도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지지만 대부분이 모체인 오이 그룹과 강 오이 회장의 지분이 높아, 사실상 하나의 그룹이라 봐도 된다. 올리비안 왕국에 진출한 올리비안 왕국의 사기업이다.

ㅁ 그룹 구조

오이 그룹 내에서의 4촌 관계인 강 오이와 강 진영, 이 준수의 지분 싸움이 있어 오이애니메이션, 더오이블루파크스는 강 진영이 Twich, 오이노앰알은 이 준수가 사실상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지분 구조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룹 중 하나이다.

경영진 목록
<<<오이 그룹 회장 : 강 오이오이 그룹 부회장 : 강 세희>>>
오이 운송 사장 : 강 오이오이 유통 사장 : 강 세희오이 전자 사장 : 김 정빈오이 통신 사장 : 유 준석
오이 오일 사장 : 정 영진오이 화학 사장 : 정 우진오이 중공업 사장 : 최 철호오이 모직 사장 : 이 선계
오이 생명 사장 : 이 준세오이 소프트 사장 : 박 현석오이 캠퍼스 사장 : 강 세희오이 문구 사장 : 강 오이
오이 신소재 사장 : 이 진욱

ㅁ 역사

1885년, 왕족(7촌)이었던 강규용은 조상 대대로 조금씩 조금씩 모으던 땅과 자본을 사용하여 최초로 '누사단 연필'을 창립하였다. 누사단 연필은 연필을 제작하긴 물론이고 나라의 첫 색연필 제작사이기도 하였다.
1901년, 포르투갈에서의 혁명의 여파로 살짝의 혼돈의 시기가 오던 중 가방 제조업체였던 '구시미점'을 인수하고, 사명을 '쿠데벰종합문구'로 변경하였다.
1902년 2월, 사측이 '18색 연필통 세트'를 판매 시작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그 해 3,4월은 회사 창립 이래로 최고의 매출을 거두었다. 자본금이 쌓인 회사는 자신들의 매출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회장이 직접 학교를 방문하여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18색 연필통 세트'를 상으로 지급하여 학생들에게 엄청난 이미지메이킹을 하였고, 결과는 성공하였다.
1904년, 출판사인 '비수창'을 인수함과 동시에 국내 최초의 '문제집'을 출판하였다.
1905년, 쿠데벰종합문구의 기술자가 중력에 의해 액체가 연직방향으로 떨어진다는 원리를 이용하여 휴대용 붓인 '이동붓'을 개발하였고 이 또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불량품이 다소 많이 생겼다.
1906년, 강규용 회장에서 김주환 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가 이루어졌다.
1908년, 지리적 요충지임을 발견한 김주환 회장은 수리 교통을 통한 무역을 생각하였고, 이를 실행시킨다. 이것이 '라피도 운송'이다. 사실 자신 회사의 상품을 대서양 연안 국가들에게 팔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4개국을 제외한 국가에서 쪽박을 치고 만다. 2개국은 각 멕시코, 베네수엘라, 포르투갈, 라이베리아이다. 대부분의 유럽 열강의 판매는 기술력 차이로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판매국은 5개국으로 한정되었다.
1912년,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며 잠시 휴업하였다.
1913년, 영국의 침략 당시 잠시 휴업하였다.
1915년, 친미 정책을 파기해버린 국가 덕분에 멕시코로의 수출길이 멈추었다. 최대 수출국인 멕시코로의 수출길이 막힌 것은 파격이 컸다. 그 해 김주환 회장은 한 우물만 파는 것은 위험하다며 쿠데벰종합문구에서 고무줄, 성냥, 돋보기, 줄자, 장갑, 연습장 등을 판매 시작하였고, 공장을 추가로 지으며 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916년, 국왕이 피살되면서 내수 시장은 어려워졌다.
1917년 '쿠데벰종합문구'와 '라피도 운송'을 각 '오이종합문구'와 '오이운송'으로 사명을 변경하였고, '오이시계'를 출범하였고, 3개사를 '오이 그룹'으로 칭하였다.
1918년, 3년간 지속된 포르투갈지부의 적자로 포르투갈로의 상품 판매를 중단하였다.
1919년, 오이토목공사, 오이제지, 오이제철, 오이건설, 오이금속등을 출범하였다.
1922년, 친미 루트를 타고 중개무역 및 관광경제 중심의 경제개발을 선언하여 오이문구는 맥시코로의 수출을 재개하고 오이운송은 증기여객선 2대를 주문하고 멕시코와 아르헨티나로 가는 노선을 뚫는다.
1925년, 김주환 회장에서 곽화비 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가 진행되었다.
1926년, 곽화비 회장은 미래 산업의 중요성을 말하며 오이제철, 오이은행, 오이경제연구소, 오이생명, 오이화재, 오이유통, 오이식품 등을 출범한다.
1939년, 오이식품에서 파는 빵이 빵집보다 비싸, 오이식품의 빵이 고급화 되어버린다. 또한 오이유통에서의 토마토 소스에 절여진 빵 캔이 미군에게 유통되었다.
1940년, 칠레에 상품 판매를 시작하였다.
1941년, 아시아의 여러 기술자와 경영자와 조우하였다.
1942년, 미국을 도와 일본에게 선전포고하였고, 미군과 오이군에 여러 물자를 대량으로 공급하여 오이제철, 오이금속, 오이유통, 오이식품이 크게 성장하였다.
1945년, 프랑스에 상품 판매를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의 미군 참전으로 물자 보급량이 다소 늘어나 이익이 증가하였다.
1951년 오이군에 전투식량을 보급하도록 선정되어 오이유통이 크게 매출이 증가하였다.
1955년, 오이자동차와 오이중공업, 오이모직, 오이전지 등의 2차산업의 계열사가 출범하였다.
1958년 경제침체로 내수가 불안해지자, 기니비사우 등의 서아프리카, 일본과 남한 등의 동아시아, 핀란드 등의 북유럽에서의 상품 판매를 시작하였다.
1959년, 오이식품에서 대규모 라면 생산 라인을 구축하였다.
1960년, 영국과의 수교가 진행되며 시에라리온과 영국에서의 상품 판매가 시작되었다.
1963년, 우주산업 열광으로 오이에어로스페이스가 출범하였고, NASA의 인공위성 개발에 일부 참가하였다.
1968년 오이리 국제공항이 건설되며 오이항공, 오이여행, 오이리무진, 오이호텔 등이 출범하였다. 또한 회장은 교통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1969년, 지하철 계획이 수립되었고, 지하 공사가 가능한 신용이 높은 기업이 많지 않아, 오이중공업이 터널과 교각 등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74년, 오이유통은 물을 판매하는 KEOLAND를 계열사로 분리시켰고,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비웃었다.
1975년, 곽화비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하여 회장의 딸인 곽수빈 씨가 회장이 되었다.
1976년, 곽수빈 회장이 경영권을 포기하고, 강타온 회장에게의 경영권 승계가 진행된다.
1981년, 석유/화학등의 중공업 회사가 여러 출범한다.
1982년, 전기/전자/금속 등의 회사가 여러 출범한다.
1983년, 인구의 증가로 식수의 수요가 증가하자 첫 식수의 판매가 시작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 대표팀의 수송을 오이항공이 맡게 되었다. 오이-파리-쿠웨이트-서울
1989년, 생명공학 부분에서의 회사가 여러 출범한다.
1990년, 송유관수송 등의 육로수송 부분에서의 회사가 여러 출범한다.
1995년부터 첨단 산업을 이끌어나가는 세계 회사 중 하나이다.
1998년, 대규모 회사의 구조조정이 있었다. 다행히 해고된 사람은 약 1000명에 불구하였다.
1999년, 강타온 회장이 강오이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한다.

두한그룹

두한그룹은 최근에 주요기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올리비안 왕국의 사기업이다.

ㅁ 역사

1950년, 중국 상하이에서 1대 회장 김두한과 부회장 상하이 조가 두한그룹을 창립하였다
1965년, 올리비안 왕국으로 두한그룹이 이전했다
1972년 11월 21일, 김두한 회장이 사망하였다
1980년, 김두한의 친아들 김주택이 2대 회장에 취임했고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스텔라 홀딩스===(삭제준비중)

스텔라홀딩스는 올리비안의 대표 사기업 중 한 곳이며 왕국 국민들로부터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스텔라홀딩스 참고

MCAC 역사

2018년 12월에 마인크래프트 BE 건설서버 단톡방으로 시작하여 1개월간 마인크래프트 BE를 이용한 도시건설을 시작으로 가상국가를 구성하였고 오이왕국이 2019년 1월, 올리비안 왕국이 2019년 5월에 차례대로 조직되었다. MCAC는 ACAC로부터 파생되었다. (ACAC는 공개대상이 아님) 현재 서버는 1.14.0 버전이며 MEGA Air 님이 운영하고 있다. (2019년 5월 15일 기준)

(처음 시작인원 10명) MCAC에는 현재 12명이 회원으로 있다. (2019년 5월 15일 기준)

현재 15명이 회원으로 있다. (2019년 5월 25일 기준)

운영자 잠수중 때때로 컴백

국가설정변화

1) 올리비안 왕국의 원래 국명은 오이왕국과 스텔라연방공화국이다. (두 국가가 하나로 합쳐짐)
2) 2000년부터 설정이 시작됬기 때문에 2000년 이후는 역사를 따로 적어놓지 않았다.
사실 올리비안 왕국의 위치는 기존설정 그대로지만 역사는 정반대였다.
지금 이 역사설정은 2시간만에 즉흥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3) 기존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제였지만 예전에 혁명의 발생으로 공화제로 바뀐 적도 있다.
4) 국장이 초록색에 가까운 이유는 당시 국명인 오이 왕국의 컨셉이 오이가 가득한 왕국이었기 때문에 국장 자체가 오이와 비슷한 형태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5) 오이왕국은 마인크래프트 PE 서버에서 탄생하여 여러가지 설정을 거치며 지금에 이르렀다. 국명은 올리비안 왕국으로 최종결정되었다.
6) 황해 공화국, 오키나와 공화국, 남도연합공화국, 샤르데나 왕국 등 다양한 국가와 이에 맞는 세계관을 거쳤다.
7) 올리비안 왕국의 국기와 국장은 기존 오이 왕국의 국기와 국장을 그대로 썼다. 국기는 PE 서버에서 제작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간단하게 만들었으며 국장은 오이 단면에 왕관을 박은 간단한 문양이다.
- 계속 작성되고 있음 -

사건

1) 올리비안 왕국, 스텔라홀딩스 기업차별논란 (자세한 사항은 올리비안 왕국, 스텔라홀딩스 기업차별논란(종결) 참조)
2) 올리비안 왕국의 독립당 의원, 동료 의원인 대서양당 의원 살해파문
3) 멕시코합중국에 대한 외교적 결례 : 이 문서는 굉장히 민감하므로 읽기에 유의바람(업로드준비중)

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