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신종의 왕후 왕후 홍씨ㅣ王后 洪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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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205년 3월 16일 | ||||||
| 고려 개경 개성부 홍배선의 사저 | |||||||
| 재위기간 | 고려 양녕공비 | ||||||
| 1231년 6월 11일 ~ 1231년 7월 16일 | |||||||
| 고려 상왕후 | |||||||
| 1231년 7월 16일 ~ 1236년 7월 28일 | |||||||
| 고려 왕태후 | |||||||
| 1236년 7월 28일 ~ 현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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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려 신종의 왕후.
생애
수춘궁 궁인시절
양녕공비 홍씨(襄寧公妃 洪氏)는 단양홍씨 출신으로, 사숙태후를 배출한 명문의 후예이다. 아버지인 대장군 홍배선은 사숙태후의 조카손자에 해당하였으며, 홍씨 또한 태후의 혈맥을 이은 후손으로 여겨졌다.
본래 대장군 홍배선의 딸이었으나, 1210년 사저에서 발생한 화재로 부모를 모두 여의었다. 이후 숙부인 문하시랑평장사 홍배용의 양녀로 입적되어 길러졌으며, 다섯 살의 나이로 입궐하여 궁인으로 봉직하였다.
비록 궁인으로 성장하였으나, 그 친정인 단양홍씨는 사숙태후를 배출한 유서 깊은 명문가였고, 양부 홍배용 또한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조정의 중신이었으므로 그 위세가 조정 안팎에 널리 떨쳐졌다.
조정의 정보망
양녕공비 홍씨는 정식으로 책봉된 이후에도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윗전 몰래 궁인의 직을 유지하였다. 이는 왕자비의 신분으로는 행동에 제약이 많았으나, 궁인으로서는 궐 안팎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춘궁에서 대전 지밀로 옮겨진 뒤에는 편전에서 성상을 가까이 모시는 일이 잦아졌다. 이에 따라 조정의 크고 작은 논의와 국정의 향방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 수 있었으며, 홍씨는 이를 이용하여 궁중의 소식을 친정에 전하였다.
단양홍씨 가문은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조정의 흐름을 미리 헤아릴 수 있었고, 그 권세 또한 날로 커져 갔다. 홍씨가 왕자비의 신분을 숨긴 채 궁인의 삶을 이어간 까닭도 여기에 있었으니, 왕족의 신분으로서는 누릴 수 없는 자유와 정보가 궁인의 자리에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양녕공비의 행적을 수상히 여기던 상궁 곽씨가 마침내 만령전에 이를 아뢰었다. 왕후 김씨는 처음에는 믿지 아니하였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직접 편전을 찾았다.
과연 그곳에는 왕자비의 신분을 숨긴 채 궁인 차림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양녕공비 홍씨가 있었다.
왕후가 크게 노하여 감찰궁인들을 시켜 홍씨를 궁궐의 외진 전각으로 끌어오게 하였다. 홍씨가 바닥에 엎드리자 왕후는 한참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홍가. 당나라 무측천 때의 궁녀 상관완아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홍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있다 답하자 왕후는 말을 이었다.
"천한 신분으로 궁에 들어왔으나 뛰어난 재주로 황제의 총애를 얻어 조서를 직접 작성하였고, 마침내 조정을 좌우할 권세를 손에 넣었지. 궁중의 기밀은 사가로 흘러들어 갔고, 권세를 탐하는 자들이 그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그 끝은 어떠하였는가. 권세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결말은 비참하였다."
뒤이어 본궁이 한 말의 의도를 알겠냐 하시며 물으시니 그제야 홍씨는 모든 것을 깨달은 듯 얼굴을 땅에 묻고 오열하였다.
"소녀가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살려주시옵소서."
왕후는 더 이상 꾸짖지 아니하였다.
— 《고려사》〈후비전:왕후 김씨〉
이로써 수년간 이어져 오던 양녕공비의 비밀스러운 정보망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왕자비가 되다.
태손의 심부름을 맡아 자주 낙랑궁을 드나들던 홍씨는 그곳에서 낙랑공의 아들인 양녕공을 자주 마주하였다. 두 사람은 차츰 가까워졌고, 마침내 양녕공의 총애를 받아 수청을 들게 되었다.
만일 상대가 금상이나 태손, 혹은 다른 왕자였다면 후궁으로 책봉되었을 것이나, 양녕공은 종친의 신분이었으므로 홍씨는 후궁이 아닌 정실부인으로 맞이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날은 저고여 피살 사건이 발생한 날이었다. 조정이 국난에 휩싸이면서 이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못하였고, 홍씨 또한 이를 숨긴 채 궁인으로 지내게 되었다.
이후 수년이 흘러 여몽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양녕공과 홍씨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졌다. 내명부와 종친부는 크게 동요하였으나, 당시 조정은 몽골의 침략이라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왕후와 대신들은 더 이상의 문책이 국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겨, 홍씨를 크게 벌하지 않고 양녕공비(襄寧公妃)로 책봉하여 종친부에 올리게 하였다.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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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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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각주
- ↑ 경민태손이 급사하자 입지가 위태로워져 입적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