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爲假國論

(무위 가국론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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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국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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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는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자연스레 말도 논조있고, 격조있게 하진 못하는 편입니다. 만약 본인이 긴 글을 읽지 못하거나, 이런 잡글에 허비하실 시간이 아까우신 분들께선 이 긴 글을 읽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년 간 몸 담와왔던 카국이 자발적으로 퇴보하고 무너져가는걸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것은 사실입니다. 다수의 이들이 이에 대해 격히 공감하고 있고 심각성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곧 증명된다고 생각합니다. 카카오톡 가상국가계의 자발적 붕괴라는 거대하게 피구체화된 관념속에서 가국계가 가국계 스스로를 닦아세우는것은 마땅히 경계해야할 대상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분별이성비판 참고 바랍니다.

| 서론 : 이 글을 작성하는 이유

ㅡ 카카오톡 가상국가의 자연적 회복과 공동체적 도달을 위한 소고 ㅡ

나는 지금 카카오톡 가상국가계(이하 '카국계')가 병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카국계는 한때 분명히, 역동적으로 살아 있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진짜 소통을 했으며, 정치라는 이름의 놀이를 통해 현실에서 얻기 어려운 창조의 감각을 맛보았다. 지금의 병폐는 그 생명력이 서서히 소진된 결과이지, 카국계가 처음부터 잘못 설계된 것의 필연적 귀결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카국계가 회복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지금까지 제시된 처방들이 병을 고치기는커녕 다른 방식으로 병을 키워왔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지금껏 카국계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려 한 이론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많은 이들이 이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진지하게 사유하고 글을 썼다. 그 노력들 중 상당수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담고 있으며, 나 또한 그것들로부터 적지 않은 지적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론들의 공통된 한계는, 카국계를 고치겠다는 의지가 지나쳐 또 다른 강제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는 데 있다. 통제로써 자유를 지키겠다는 역설, 배척으로써 공동체를 살리겠다는 모순 ㅡ 나는 그 지점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를 먼저 고백해야겠다. 나 또한 과거에 사람을 분별하고 등급을 나누는 행위를 한 적이 있다. "저 사람은 수준이 낮다", "저 사람은 카국을 이해하지 못한다", "저 사람과는 대화할 가치가 없다", 이런 판단들을 나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그것이 얼마나 저열한 행동이었는지를 나는 지금 성찰한다. 분별은 때로 필요한 인식론적 도구이지만, 그것이 사람을 향할 때, 특히 공동체 안에서 타인을 서열화하고 배제하는 데 쓰일 때, 그것은 더이상 지식이 아니라 폭력이다. 이 글은 그런 성찰 위에서 쓰인다.

내가 이 글에서 참고하는 사상적 자원 중 하나는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의 철학이다. 그러나 나는 도가의 입장을 그대로 카국계에 이식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가는 하나의 참조점의 시발이지, 이 글이 종속되는 교조가 아니다. 나는 도가의 무위(無爲) 개념에서 강제와 인위를 내려놓는 태도를, 포용의 논리에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빌려올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상이냐가 아니라, 그 사상이 지금 카국계의 현실에 얼마나 유효한 통찰을 제공하느냐이다.

| 제1장 : 현재 카국계의 위기 中 진단

신규 유저에 대한 배제와 공동체의 자기 폐쇄

카국계의 첫 번째 이자 가장 근본적인 위기는 신규 유저들을 대하는 기존 구성원들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새로운 이가 문을 두드릴 때, 카국계는 그 문을 열어주기보다 문 앞에 자격 심사관을 세우는 쪽을 선택해왔다. 가상국가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정치적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혹은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신규 유저들은 조롱과 닦아세움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이를 폐문증(閉門症)이라 정의하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한 냉담함이 아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존재론적 자기부정이다. 공동체는 본래 이질적인 것들의 접촉으로부터 활력을 얻는다. 동질성만으로 구성된 집단은 내부에서 빠르게 경직되고,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서서히 고사한다. 신규 유저가 서툴고 낯선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카국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이 아직 이 공간에 충분히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의 자연스러운 반영일 뿐이다.

기존 구성원들이 이 사실을 인내와 관용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즉각적인 배제로 반응할 때, 카국계는 스스로 신선한 피를 차단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고립화다. 기존 유저들끼리만 남아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공간 ㅡ 그것은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닌, 고립무원 속의 동굴과도 같다. 즉, 폐굴자족(閉窟自足)이다.

패권 전쟁의 구조적 폐해

친인류와 반인류 간의 대립은 현대의 카국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소모적인 갈등 구조 중 하나다. 나는 친인류 진영에 속해 있으며, 그 정당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대립이 카국계 전반의 신규 유입을 구조적으로 차단하고, 새로 온 이들로 하여금 입장과 동시에 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방식으로 고착될 때, 그것은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파괴의 문제가 된다.

전쟁은 언제나 양측 모두를 소진시킨다. 패권을 둘러싼 항구적 대립은 참여자들의 에너지를 창조가 아닌 소모 쪽으로 흡수하고, 이 갈등 구조를 관찰하는 신규 유저들에게는 진입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카국계라는 공간에 처음 발을 들인 사람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편가르기의 압력이라면, 그 공간은 환대가 아닌 적대로 가득한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 머물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덧붙여, 반인류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모든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혐오하고 척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옳지 않다. 그 중에는 논리를 갖춘 이들이 있고, 대화가 가능한 이들이 있으며, 맥락을 이해하면 전향할 수 있는 이들도 있다. 증오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적대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 컨텐츠의 쇠퇴와 참여 의지의 소멸

현세대에 들어서면서, 카국의 핵심 컨텐츠였던 정치가 쇠락하고 있다. 이 현상의 원인을 단순히 인구 감소에서만 찾는 것은 불충분하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 참여의 자발성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정치는 본래 유희였다. 가상의 국가를 세우고, 외교를 맺고, 의회를 열고, 선거를 치르는 행위들은 현실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권력과 결정의 감각을 모의하는 창조적 놀이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놀이는 의무가 되었고, 형식이 되었으며, 급기야 부담이 되었다.

억지로 세워진 의회, 아무도 읽지 않는 헌법, 형식만 남은 선거 ㅡ 이것들은 정치의 외피는 갖추었으되 정치의 내면적 생동감을 잃은 공허한 절차들이다. 더 많은 규정을 만들고 더 정교한 제도를 설계한다고 해서 정치가 살아나지 않는다. 정치가 살아나려면 그것이 다시 자유로운 놀이가 되어야 하고, 자유로운 놀이가 되려면 참여자들이 스스로의 흥미와 의지에 따라 개입할 수 있는 여백이 있어야 한다.

자발성은 강제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명제처럼 들리지만, 지난 5년간 카국계의 역사에서 이 명제는 끊임없이 무시되어왔다. 강제적 참여, 의무적 충성, 규정에 의한 활동, 이것들은 정치 컨텐츠를 공각화(空殼化)하고 경직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 그것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만들지 못했다.

컨텐츠의 다양화와 가국 정체성의 문제

모의전, 역극, 외부 게임 연동 등 카국의 외연을 넓히는 다양한 컨텐츠들이 등장하면서, 일부에서는 이를 가상국가 본래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로 규정하는 시각이 있다. 나는 이 시각이 정체성에 대한 지나치게 경직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컨텐츠들이 무분별하게 확산되면서 가상국가라는 공간이 그 고유한 성격을 잃고 일반적인 소통방과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전락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할 문제다.

핵심은 컨텐츠의 종류가 아니라 그 기능이다. 어떤 컨텐츠가 구성원들 사이의 소통을 촉진하고,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을 강화하며, 가상국가라는 공간만이 줄 수 있는 특유의 경험을 풍부하게 한다면, 그것은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컨텐츠가 가상국가라는 맥락을 완전히 대체하고 구성원들이 가국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잊게 만든다면, 그것은 다양화에서 형해화로 퇴적된다. 두 방향의 위험을 동시에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 제2장 : 무엇이 문제의 근원인가 中 분별 의식의 병폐

앞서 서술한 네 가지 위기의 공통된 뿌리를 나는 분별 의식의 병폐에서 찾는다. 분별이란 원래 인식의 도구다.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며,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는 능력, 그것 자체는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출 수밖에 없는 인식론적 역량이다.

그러나 이 분별이 사람을 향할 때, 특히 그것이 특정 공동체 안에서 타인을 서열화하고 배제하는 데 동원될 때, 분별은 인식의 도구에서 폭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저 사람은 카국을 모른다", "저 사람은 수준이 낮다",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다" ㅡ 이런 판단들이 누군가를 가르치고 이끌려는 태도가 아니라 배제하고 무시하려는 태도로 귀결될 때, 공동체는 안에서부터 부패하기 시작한다.

나는 앞서 이 사실을 스스로에 대해 성찰했다고 밝혔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분별에 의한 배제가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나 스스로 몸소 실천했다는 솔직한 인정이다. 그 경험이 이 장에서 말하고자하는 내용의 출발점이다.

도가의 언어를 빌리자면, 이것은 분별지(分別智)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병폐다. 분별지는 현상의 표면을 날카롭게 가르는 데는 유능하지만, 그 표면 아래에서 만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카국계 안에서 고인물와 초보를 나누고, 친인류와 반인류를 나누고, 구가국과 신가국을 나누는 시선. 그 시선들로 이루어진 관념이 각각이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태도로 이어지는 순간 그 근거는 정당성을 잃는다.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모든 행위를 용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는 제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행위를 제지하는 것과, 그 행위를 한 사람 자체를 가치 없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는 공동체를 보호하는 행위이고, 후자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 제3장 : 나아가야 할 방향 中 포용과 자연스러운 활성화

포용의 원리

카국계가 회복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포용의 원리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도덕 명제가 아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태도의 문제다.

새로 온 사람이 서툴다면, 서툰 채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이 카국의 문법을 모른다면, 그것은 그들이 아직 배우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아직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조롱이 아니라 시간이다. 물은 항상 높은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공동체는 자신보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향해 흘러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의 본성이다.

반인류에 속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를 동질한 적으로 규정하고 무차별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다. 그들 중에는 대화가 가능한 이들이 있고, 설득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적대를 유지하되 증오를 내려놓는 것, 이것이 성숙한 태도다. 적을 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적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은 양립 가능하다.

운영의 자유방임과 그 한계

카국 운영에 있어 자유방임은 중요한 원칙이다. 운영자가 지나치게 세밀한 규정으로 구성원들의 활동을 통제하려 할수록, 공동체의 자생적 에너지는 억압된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고 느낄 때 더 창의적으로 참여하고, 더 오래 머무른다. 운영자의 역할은 구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여백정"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자유방임이 무원칙한 방임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소통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 그러니까 테러, 신상 유포, 타인에 대한 지속적인 괴롭힘에 대해서는 명확한 제지가 필요하다. 자유방임의 원칙은 소통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그 소통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위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작동해야 한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자유다.

정치 컨텐츠의 자연스러운 회복

정치 컨텐츠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제도가 아니라, 더 단순하고 진입하기 쉬운 구조다.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 복잡한 절차와 방대한 규정에 가로막혀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정치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소규모의 즉흥적 정치 행위도 의미 있는 참여로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정치 컨텐츠 회복의 출발점이다.

또한! 정치 컨텐츠의 회복은 결코 운영자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정치에 흥미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개입할 때에야 정치는 살아 있는 컨텐츠가 된다. 운영자의 역할은 그 자발적 참여를 억압하지 않는 것, 그리고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두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 제4장 : 개인과 운영자가 갖추어야 할 소양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이 갖추어야 할 것

카국계의 회복은 구조나 제도의 문제이기 이전에 각 개인의 내면적 태도의 문제다. 어떤 훌륭한 운영 원칙도, 개인들이 그것을 내면화하지 않으면 공허한 형식에 그친다. 그렇다면 카국계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 무서열시(無序列視). 그러니까 타인을 서열화하지 않는 시선이다. 이것은 카국 경력의 많고 적음, 정치적 입장의 같고 다름, 혹은 단순히 나이의 위아래를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단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그가 카국에 얼마나 정통한가와 무관하게, 이 공간에 소통을 위해 들어온 하나의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둘째, "지과겸"과 "판단유보"의 태도를 수양하여 자신의 판단으로 하여금 절대화하지 않는 겸손함이다. 카국에 오래 있었다는 것이 항상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방식이 유일하게 올바른 방식이라는 확신은,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고 싶은 이들의 의지를 억압한다. 자신과 다른 방식을 용납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셋째, 선이해(先理解)의 함양을 통한 분별을 내려놓는 연습이다. 이것은 모든 판단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 판단이 타인을 향한 배제와 경멸로 귀결되기 전에 한 번 더 멈추고, 저 사람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를 먼저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이해가 항상 동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해 없는 판단은 폭력에 가깝다.

운영자가 갖추어야 할 것

운영자는 카국이라는 공동체의 방향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운영자에게 요구되는 소양은 개인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요구된다. '그것은 "권력의 정형화" 라는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다."

첫째, 운영자는 자신의 공간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방장이 방을 개설했다는 사실이 그 공간의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성원들이 그 공간에 들어오는 순간, 그 공간은 그들 모두의 공간이 된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운영자와 그렇지 않은 운영자 사이에는, 같은 제도를 운영하더라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둘째, 운영자는 자신이 강제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스스로 제한해야 한다. 구성원들의 소통 방식, 정치 참여 형태, 컨텐츠 선호 등은 운영자가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운영자의 역할은 이 다양한 욕구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셋째, 운영자는 공동체 안에서 소외되는 이들에게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목소리 큰 기존 구성원들의 요구보다, 조용히 있다가 떠나는 이들이 왜 떠나는지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공동체를 오래 유지하는 힘은 기존 구성원들의 만족이 아니라, 새로 온 이들이 이 공간에서 자리를 찾을 수 있는가에서 온다.

| 제5장 : 이상적 경지와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

이상적 경지란 무엇인가

내가 이 글을 통해 그리고자 하는 이상적인 카국계의 모습은, 특별히 화려하거나 정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단순한 것이다.

누군가 새로 들어왔을 때 환대받는 공간.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 모의전을 하고 싶은 사람도, 역극을 즐기고 싶은 사람도, 순수하게 대화만 하고 싶은 사람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친인류든 반인류든, 고인물이든 초보든, 그 사람이 이 공간에서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존중받는 공간.

이것이 이상적인 카국이다. 혹자는 이를 보고 유토피아라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카국계가 본래 지향했던 본질적인 것,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것의 모습이다.

이 경지를 도가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억지로 이루어진 질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공동체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自然) ㅡ "스스로 그러함"의 상태, "구성원들이 어떤 강제도 없이 스스로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참여하고 소통하며 유대를 만들어가는 상태". 그것이 내가 그리는 이상이다.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은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카국계가 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멈추는 데서 시작된다.

첫째, 새로 온 사람에게 조롱 대신 여백을 주는 것을 시작하라. 그들이 서툰 것은 시간이 해결한다. 필요하다면 부드럽게 안내하되, 그 안내가 가르침이 아니라 환대의 방식으로 전달되도록 의식하라. 처음 들어온 사람이 이 공간에서 첫 소통을 긍정적으로 경험하는 것. 그것이 카국계 유입 문제의 가장 실질적인 해법이다.

둘째, 적대의 구조를 유지하되 증오를 목적으로 삼지 말라. 친인류로서 반인류에 맞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카국계 전체를 패권 전쟁의 장으로 만들어 신규 유저들의 진입을 막는 구조가 되고 있다면, 그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대화가 가능한 이들에게는 배척보다 설득을, 그것이 불가능한 이들에게는 증오가 아닌 제지를.

셋째, 운영자들은 규정을 줄이고 여백을 늘려라. 공동체의 활력은 규정이 정교해질수록 커지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참여하고 싶다고 느끼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운영자의 핵심 과제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제보다, 무엇을 해도 된다는 자유가 훨씬 강력한 동력이다.

넷째, 스스로의 분별 의식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라. 이것은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가, 그 시선이 이 사람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주기적으로 물어라. 이 물음이 습관이 될 때, 공동체의 분위기는 위로부터의 제도 개혁 없이도 서서히 달라진다.

| 결론 : 덜어내는 것이 곧 회복(回復)이다

손지위복(損之爲復), 덜어내는 것이 곧 회복(回復)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어떤 새로운 제도나 정교한 통제 체계를 제안하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덜어낼 것을 제안했다. 귀박위도(歸樸爲道)의 태도를 통해 강제를 덜어내고, 배제를 덜어내고, 증오를 덜어내고, 분별에 의한 서열화를 덜어내라. 그리고 그 자리에 환대와 여백과 자발적 소통이 들어설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라.

카국계의 위기는 무언가가 부족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이 쌓여서 생겨난 것이다. 너무 많은 규정, 너무 많은 적대, 너무 많은 배제, 너무 많은 분별. 회복은 더 많은 것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쌓여 있는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방식으로 온다.

공동체는 강제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성원들이 이 공간에 있고 싶다고 느낄 때 유지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 있고 싶어지는 것은, 그 공간이 자신을 환대하고 존중한다고 느낄 때다. 그 단순한 진실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카국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知常容,容乃公,公乃王,王乃天,天乃道,道乃久。
항상함을 알면 포용할 수 있고, 포용하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왕 같아지고, 왕 같아지면 하늘 같아지고, 하늘 같아지면 도에 이르고, 도에 이르면 오래간다"
도덕경 中 통행본 8장

카국계가 오래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포용을 배워야 한다. 모든 통제와 배제의 논리가 결국 카국계를 더 빨리 소진시켜 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다 결국 바다에 이른다.

평가 내지 비판

내용
성명
가국외 마크계나 소통계까지 친인,반인 갈등 분쟁이 생기다보니 가국 자체를 안좋게 보는 시선도 많이 늘어난거 같긴 하네요. 친인,반인이 뭐 떄문에 싸우는지도 잘 모르고 그냥 일방적으로 '친인류는 테러집단이다','반인류는 모자란 애들이 모인것이다' 이런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거 같아요. 비가국계에서 싸우는거 자체가 가국계 인식을 떨어뜨리고 카국에 병드는것을 가속화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해보자면 모전계까지는 이해 하겠는데 다른 소통방에서는 가국이 영향력 넓히려는 시도를 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소통하러왔을뿐인데 친인류,반인류,가국사정 알아줄 필요는 없잖아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비가국계에서 친인/반인 갈등이 번지는 현상은 사실 제가 분별이성비판에서 지적한 분별이성의 오용이 공동체 밖으로까지 확장된 사례라고 볼 수 있겠네요. "친인류는 테러집단", "반인류는 모자란 애들" 같은 식의 인식이 퍼지는 것, 이게 바로 분별이성이 맥락과 정황을 무시하고 단순 낙인을 찍는 전형적인 패턴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국 내부에서도 문제였던 것이 외부로 수출되고 있는 셈인 것이죠. 특히 귀측께서 짚어주신 소통방에서의 갈등 확산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기된 사상에서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방임에도 한계가 있고 그 한계는 "소통 자체를 훼손하지 않는 것" 인데, 비가국계 소통방에서 가국 분쟁을 끌고 오는 행위는 그 공간의 소통 자체를 훼손하는 거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가국 사정에 동의할 이유도, 알아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것도 결국 가국 내부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아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근본적으로는 가국 내부에서 먼저 분별이성의 절대화를 내려놓는 것이 선행되어야, 외부 유출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시각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Jacobi
마크계,모전계 익명유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