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국
月本国│Wupan |
국가정보 여행정보 문화 역사 |
주요 정보 수도 │ 도유수도시 면적 │ 384,239km² 인구 │ 1.382억명 (2022년) 내각 총리 │ 아사모토 강치 ﹀ 아사모토 강치 2024년 12월(玲香 6月) ~ × 월본사회당 GDP │ 4.811조 USD (2021년) |
정치 정보 |
관련 문서 |
월본 여행정보
Travel infomation |
국가정보 여행정보 문화 역사 |
전류·전압 │ 220V/ 60㎐ 통 화 │ 환 (圓, 丸, WPN) 환율정보 ∨ 1WPN│₩??원 (고정환율)월본 화폐 표기법 • 100환 • 丸 100 (=₩ ???원) • 100 圓 도메인 │ .wp 시간대 │ UTC +9 국가 번호 │ +83 |
비자 │ 무비자 협정국을 통해 입국하는 경우 별도 심사없이 체류가 가능하다. |
주요 명소 |
월본의 문화
Culture |
국가정보 여행정보 문화 역사 |
월본의 사회 문화 월본은 창작주의를 기반으로 실물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 만큼 다소 경제성장률이 둔화되었지만 세계 최대 IT, 철도 강국이다. 월본의 정치 문화 전후 내각은 우경화와 군부집권으로 불안정한 정국이었고 곳곳에서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다. 군사정권 하 경제계획과 건설 노력에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월본의 기념일 건국기념일(6월5일), 세계교류의날(1월21일) 등이 있다. |
월본의 역사
History | |
국가정보 여행정보 문화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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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본국 (月本, Wupan), 약칭 월본은 동아시아에 있는 국가이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네 개의 본섬과 주변의 작은 부속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는 약 1억 3천만명이며 면적은 384,239㎢이다.
국가 상징
국호
자세한 내용은 월본/국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월본의 국호는 월본어 명칭으로 '우판' 또는 드물게 '우본'이 사용되고 있다. 월본인들은 자신들을 '월본인'(月本人)이라고 호칭하며, 사용하는 언어는 '월본어'(月本語)라고 부른다. 우판은 '달이 떠오르는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국제적인 공식 명칭은 월본(Wupan)으로 사용된다.
국기
청월기 靑月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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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순수한 달의 푸른 기(氣)' 공식명칭인 청월기는 달의 상징으로 흰색 배경에 파란색 원이 그려진 국기를 사용한다. ~유래~ 깃발자체는 그 이전부터 써왔으나 국제상선항행규칙을 정하면서 규격을 하였다. | |
지위 | 공식 국기 |
위키스 파일명 | 파일:월본 국기.png |
국장
수호화문 守護花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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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공식 국장 |
위키스 파일명 | 파일:월본 국장.png |
월본의 상징화(花)인 수호화를 본따 만들어진 국장은 국가공식통용으로 사용되고 황실에서는 각 천황마다 부여되는 고유문장이 사용된다. 국장에 사용된 수호화는 중세 아카사 전설의 문양에 있는 전설 속의 꽃무늬로 비롯되었다. 이 수호화의 뾰족한 잎은 자생(自生)을 상징하며 둥근 잎은 진명(進明)을 의미한다. 수호화문은 보통의 황실 관련 문서나 물품에 그려져있고 황실차량의 경우 천황이 탑승하는 문과 전면부에 장착되어있다. 이외에 국가 문장을 사용하는 곳에는 월본 정부문장이 사용되고 있다.
국가
슬로건
모든 것을 창의롭게
'모든 것을 창의롭게'는 월본국의 공식 슬로건이다. '세상을 그려나가는 즐거움이 모여 창의적인 월본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기업의 창작정신과 세밀한 설정요소들이 혼합되어 다채롭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월본, 모두가 함께 그려 조화를 이루는 월본을 상징한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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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월본/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월본의 역사 月本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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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인간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시기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7만~8만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빌레못굴’ 유적이 있다. 이 빌레못굴 유적에서는 타제석기와 함께 오늘날 남중국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동물의 뼈가 발굴되었다. 이 동물 뼈의 발견은 옛날 월본 제도가 오늘날과 같이 섬으로 되어 있지 않고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연륙설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유제에서 가장 오래된 호선지 선사유적이 있으며, 이외에도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월본은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던 섬이였던 관계로, 중국, 한국, 일본 등의 타 국가들에 비해 발전이나 국가 수립이 늦었으며, 6세기까지도 성곽 시대가 이어져오며 문명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며 소규모 부족들이 서로 다툼을 계속하던 시기가 이어졌다.
남백제의 성립
월본 제도가 동아시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520년 경 왜의 상인단이 월본 제도를 발견한 뒤의 일이였다. 월본의 존재를 보고 받은 왜는 허구라고 여기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월본 제도에 대한 환상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환상과 미지의 섬으로써 여러 신화나 이야기의 배경이 되며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후에도 어부들이나 일부 사람들에 의해 월본 제도가 목격되며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당시 왜는 한반도의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왜 간무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기도 하였으며, 왜는 백제로부터 수많은 기술과 이념, 사상을 전파받았다. 또한 백제인들은 도왜한 뒤 백제가 왜에 선진 문물을 전수함과 동시에 자신의 학문이나 기술 등을 바탕으로 왜의 지배층에 편입되어 들어가기도 하며 왜와 백제가 혈맹의 관계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7세기 초중반부터 이러한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백제 의자왕 즉위 초기에는 백제의 안정이 지속되어 백제와 왜의 관계가 안정적이였지만 즉위 중기부터 백제가 흔들리게 되자 왜도 동시에 위기를 맞이한다. 후에 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으로 인해 백제가 멸망 직전까지 가게 되자, 왜는 백제촌을 지어 백제로부터 오는 백제 출신 주민들의 이주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백제는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백제의 잔존 세력들은 왜에 지내고 있던 백제의 왕족 풍을 왕으로 추대하여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은 약 10일에 200개의 성을 탈환하고, 당나라 군대의 보급을 끊는 힘을 보여주었으나 나당연합군의 화력과 고립으로 인하여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가 결정타가 되어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왜는 당시 국력의 대부분을 투자하여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백강 전투에 동맹으로서 적극적 개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백강 전투가 패전으로 끝난 뒤 백제 부흥 운동 지원은 중단되었다.
다만 왜는 백제계 유민들과 백제 부흥 운동 잔존 세력들에게 도피를 제안하였으며, 월본 제도의 존재를 알리고 그 곳으로의 도피를 제안하며 마지막까지 그들을 지원하였다. 즉, 전설속의 섬 월본 제도를 찾아 거점으로 마련한 뒤 다시 백제를 재건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제안한 것이다. 그것을 들은 백제 부흥 운동 잔존 세력의 수장이던 지수신과 흑치상지는 끝까지 도피하여 저항해 나가기로 결정했고, 왜의 도움을 받아 백제계 유민들과 군사를 이끌고 월본 제도로의 항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왜에서 백제촌을 이루고 살던 백제계 유민들도 합류하게 된다. 지수신은 이 과정에서 "이는 우리 백제 최대의 도전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건 것이다."라는 발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663년 12월 1일, 백제 부흥 운동의 잔존 세력들과 군사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백제계 유민들을 실은 배는 나가사키항을 떠났으며 이들은 환상의 섬 월본 제도를 찾아 나선다. 2월 8일, 약 2개월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월본 제도에 다다르고 그곳에서 백제의 재건을 다짐한다. 따뜻한 편이였던 월본 제도는 그들이 적응하기에 어렵지 않았고, 그들은 성을 건축하고 도시를 이루는데 성공하였으며 재건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었다.
지수신과 흑치상지는 백제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남백제(南百濟)라는 이름을 지어 세력을 구축하였고, 백제 부흥 운동을 통하여 얻은 실전 경험과 우수한 장비로 원주민 세력을 토벌하고 규합하여 689년 본토의 관서와 관주 지역을 통일한 남백제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남백제는 원주민들과 동화를 시도하며 융화정책을 펼치며 원주민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탄압하는 양면정책을 펼치며 원주민들을 융합했다. 그 결과 현재 원주민들은 한국계에 섞여들어갔으며 언어도 한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원주민과 한국계의 차이는 거의 사라져 구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후 남백제는 8세기 후반 경 월본 전국을 통일하게 된다.그 뒤 700년 부여풍이 남백제의 1대 국왕인 풍왕으로 정식으로 즉위하며 남백제 초기 왕조가 수립되었다. 그 뒤 풍왕의 정책으로 농업과 어업이 발전하며 주민들의 생활이나 경제가 개선되기 시작하였으며 남백제는 문명의 발전을 이뤄내기 시작하였다. 백제계가 남백제를 세우자, 고대 수준에 머물던 월본 제도는 급격히 발달하여 문명 수준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남백제는 초기 한반도와는 거리를 두며 바다를 천혜의 요새로 삼으며 침략에 대비해왔다. 그 뒤 오랜 기간동안 일본을 제외한 모든 국가와 교역을 하지 않으며 내치에 집중하며 본토를 통일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다가, 명이 수립되자 명에 조공과 사신을 보내 교류를 맺고 군신관계를 성립해 인정을 받으며 여엇한 동아시아의 주류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한반도에서 고려가 성립되자 다시 국교를 맺기도 하였으며 조선이 세워진 때에도 국교를 이어나가며 한반도와의 화해를 이루어냈다. 그렇게 남백제는 동아시아의 무역 중심지로 도약하기 시작하였으며 국제시장인 벽골촌(碧汨村)이 발전하여 무려 19세기까지 동아시아의 중심 항구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남백제 중기 왕조
1407년 남백제는 7세의 어린 나이였던 현왕이 즉위하며 몇몇 신하들을 중심으로 정치가 일어났고, 남백제의 정치는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그 뒤 현왕의 친척 중 한명이였던 부여시현이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명목으로 정해반정를 일으켜 현왕을 내쫒고 자신이 시현왕으로 국왕에 올라 1410년 중기 부여 왕조가 수립된다. 시현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를 바로 다잡기 위하여 개혁 정책을 실시하며 국가발전을 추진했다. 1413년 네덜란드와 스페인 상인들의 배가 남백제에 상륙하게 되고, 시현왕은 그들과 교류해 서방과의 교역을 시작한다. 또한 청해촌(淸海村)이라는 구역을 만들어 서방 상인들의 거주지를 만들어주었으며 1년에 1번 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결과 남백제는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여 개혁을 이뤄내고 상업의 발전도 이뤄냈다. 명나라, 조선, 일본, 인도네시아까지 사절을 보낸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시현왕의 뒤를 이어 집권한 수빈왕은 1442년부터 1480년까지 집권하며 중앙집권의 확립, 지방 호족의 수도 거주 정책, 불교 장려, 지방 호족의 반란 제압으로 통일 국가 유지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수빈왕이 죽은 뒤에도 한동안 남백제는 번영을 누렸는데, 1500년에는 남백제 연구에 중요한 서적인 《아성가초지》가 편찬되기도 했다.
중기 왕조 시기에는 중국-조선-일본과 서양 세력을 잇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아시아 지역의 해양 허브국가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의 교류도 번성했다. 당시 중계무역으로 뻗어나가는 남백제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천해성 만국진량의 종(1528년)에 적힌 명문이 있다. 1534년 즉위한 성현왕은 개혁적인 성향으로 발전을 이끌었다. 명, 일본같은 이웃국가와의 관계보다 서양과의 관계를 우선하게 하여 다른 보수적 아시아 국가와 차별성을 두었으며 조총과 갈레온 등 포르투갈에게서 신식 군사무기와 과학기술을 수입하여 군사력과 기술력을 발전시켰다. 이후 서방 국가들과 통상우호조약 등을 맺었으며 항구를 개방해 서방인들의 거주지역으로 구라파촌을 만들었다. 유럽에서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어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업과 선박수리업등도 발달했으며 남백제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통편의를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주는 기구도 있었다. 이렇게 중기 왕조는 남백제가 발전을 이룬 중요한 시기이다.
남백제 후기 왕조~근대
이후 18세기 후반, 유럽에선 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이 일어나며 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서방과 가까웠던 남백제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남백제는 이에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자들이 증가하였으며 당시 왕이던 세주왕이 무능했기에 반왕 정서가 지식인 계층에서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움직임을 왕실은 탄압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기폭제가 되어 반왕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결국 1847년 신하들 사이에서도 입헌군주제라도 받아들여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여 일부 신하들이 세주왕을 몰아내고 세주왕의 동생이던 선진왕을 왕으로 옹립하는 병오반정이 일어난다. 선진왕은 새로운 출발을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국가 이름을 월본(月本)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남백제 후기 왕조는 단절되었고, 월본 부여왕조가 새로 출범하였다. 그러나 세주왕을 지지하던 근왕파 신하 및 장수들은 이에 반발하였으며, 세주왕을 지지하던 세력은 주곤으로 가 서조(西趙)를 세웠다. 왕이 두명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중앙 행정력은 약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지방의 영주들도 분리를 선언하여 각자의 국가를 건국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렇게 소보지역을 중심으로 본토(관서, 관주, 소보, 관북)에는 월본왕국이 세워지고 주곤에는 서조 남백제가, 다난, 마전, 북양은 각각의 영주 출신 왕조가 세워졌고 이후 호요왕을 거쳐 군주의 무사들이 분란을 일으켜 전국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월본 부여왕조는 조타치(도유 동쪽)으로 천도한다. 그렇게 월본은 전국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전국시대는 월본 전역이 갈라져 국가끼리 전쟁을 하던 시기였으며, 월본 열도를 다시 통일하려는 월본과 나머지 세력간의 대치가 이어졌다.
이후 1849년 선진왕은 피로로 인하여 병을 얻어 사망하였고, 이어 월본에는 마치왕이 즉위하였다. 동시에 1849년에는 또다른 대형 사건이 벌어지는데, 미국의 함대가 월본이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고 월본에 접근한 것이다. 미국은 개항과 요구사항들을 요구하고 거절하면 월본을 침공할 생각이였지만, 미국의 예상과 달리 월본은 개항과 요구사항을 받아들인다. 당시 원로였던 남정환은 "월본은 어차피 서방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저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면 다른 세력들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다.. 그렇다면 그냥 저들을 받아들이는게 좋다"는 주장을 했고 그 주장은 일리있다고 여겨져 받아들여졌다. 마치왕은 이들과 접촉한 후 개항을 받아들이고 미국의 문물을 수용한다. 신문물을 수용한 뒤 각 세력을 누를 힘을 되찾겠다는 것이였다. 그 결과 미국의 요구사항을 수용하였고 서구문물을 들여오는 결과를 낳게 되어 식민지화를 피했으며, 발전했다는 점에서 이는 "신의 한수"로 평가받는다.
마치왕은 미국과 조약을 맺은 뒤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며 월본을 황제국으로 선포하였고, 월본 열도를 다시 재통일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마치왕은 월본 재통일을 위해서는 국력의 발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개화파 신하들과 함께 무신유신을 선언하며 근대화를 주도하였다. 마치왕은 개화파인 이헌건을 상좌평에 임명하였고, 이헌건을 주도로 한 '친이개혁세력'은 무신유신을 주도하게 되었다. 우선 친이개혁세력은 개혁을 적극 수용하여 유학생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하였다. 돌아온 사절단은 "서양의 문물과 방식을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고 건의하였고, 건의를 수용하여 많은 개혁적 정책을 본받아 실시하였다. 부역제도와 노예계급을 폐지하고 사법 교육제도를 근대화 하는 한편 철도 통신 사업도 추진하였으며 사회의 모든 방면을 개혁하였다. 또한 정치적 근대화를 이루었으며 월본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후진적인 전통복장 대신 서구식 복장의 대중화를 추진하고 권장하였으며 음력을 폐지하여 그레고리력을 도입하였다. 남녀평등권을 제정하였고 왕의 권력을 축소하고 입헌군주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으며 보통선거권을 부여하였고 정당정치가 실현되었다. 무신유신은 약 10년 가까이 실시되었으며, 사회는 발빠르게 변화되었다. 서양식 건물이나 의복이 수용되어 만들어졌고 군사적 개혁도 이뤄졌다. 무기나 장비를 신식으로 교체하고 서양식으로 편제를 바꾸었다. 공장과 조선소도 건립하여 기술적 발전을 도모하였고 서양의 사상이나 철학, 서적 등을 번역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주국으로써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월본의 근대 문학과 예술도 꽃피어났다. 월본 근대 최고의 문학가로 불리는 이선영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이후 발전된 국력을 통하여 월본은 군사를 양성하였으며, 뛰어난 전략가이자 장군이던 도우곤의 활약을 통하여 월본 전역을 다시 재통일하는데 성공한다. 국토를 다시 통일함과 동시에 충분한 개혁을 거치며 근대적 국가로 탈바꿈한 월본은 내치에 신경을 썼다. 이 시기에는 정당 정치가 확립되고 서방 문물이 일상생활에서 자리잡으며 내부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1870~90년대는 서서히 외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시기는 정치적으로 대립이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혈맹인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자"는 친일론자들과 "아직 때가 아니다. 다른 국가들과 접촉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친서론자들이 대립하기 시작했던 시기였으며 친일론자들은 후에 대월본제국으로, 친서론자들은 후에 월본 왕국으로 내려져오며 교전하게 된다. 우선은 친서론자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정국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이들은 적극적인 외교로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야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총리였던 김하성은 적극적인 외교로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은 존속했는데, 그것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1902년, 외교관 김동주를 필두로 한 외교단이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미국 정부와 담판(뉴욕 니퍼스 합의)을 벌여 불평등조약을 평등조약으로 바꿔내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은 서구 열강에게서 월본이 근대적 개혁국가로 인정받은 사건으로도 볼수 있다. 친서론자들의 이러한 활동은 월본의 국제적 입지를 넓히는 결과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보면 이득이였던 정책이였다. 그 이후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은 월본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던 사건이다. 월본은 명목상으로 연합국에 가담하였고 이로 외교적 입지가 상승하였다. 또한 물품과 선박등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기며 급발전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은 월본은 산업도 동시에 발전하였고 1920년대는 축적한 부와 호황기를 동시에 맞아 최고의 경기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민권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도 시작되었다. "20년대 데모크레시"나 도서민들의 인권 증진 운동, 공산당의 창당 등의 사건이 벌어져 민주주의가 발전하였다.
암흑기~제2차 세계대전
1929년, 미국의 대공황 영향으로 경제도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1930년대는 암흑의 시대라 불린다. 또한 이로 인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새로 총리에 취임한 구해민은 새로운 경제 정책을 제시하는데, 월본판 뉴딜 정책이라 불리는 "아성행계획"이다. 구해민이 말한 선언문 중 "월본을 위해서 내가 먼저(我) 살피면서(省) 가겠다(行)"라는 발언에서 따온 이름이였다. 운명계획에 따라 월본 곳곳에는 공공시설이 지어졌으며 경제 구제 정책이 실시된다. 이러한 운명계획은 효과를 어느정도 보게 되었고 1933년을 기점으로 다시 경기가 살아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운명계획도 비판이 많던 정책이였고 장기적으로 시행할수 없던 정책이였으므로 1937년 다시 경기가 악화되고 월본의 경제는 살아날 길이 없어보였다. 더군다나 경기 악화의 영향으로 극단주의가 만연하여 극좌나 극우 세력의 폭동이나 선동도 증가하여 국내 상황도 불안정했다. 또한 일본의 팽창과 중일전쟁으로 인해 외부적으로도 뒤숭숭한 시기가 바로 1930년대였다.
혼란스러웠던 월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더 혼란스러워졌다. 월본은 동맹국이자 친선국이던 일본 제국을 지지하는 세력과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였던 세력으로 나뉘어 내전이 발생하였고, 북부는 민주주의를 지지한 "월본 왕국"이, 남부는 일본 제국을 지지한 파시스트 정권인 "전월본제국"이 들어섰다. 월본 왕국은 명목상으로만 무로, 구리하를 국왕으로 모신, 총리가 사실상 전권을 가진 사실상의 공화국이였고 전월본제국 세력이 무로, 구리하를 모셨다. 세력이 약하던 민주주의 세력은 남부 다난도 등지로 도피하였으며, 이후 월본 왕국의 구해민 총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전군을 동원해 혹시 모를 일본과 전월본제국 등의 침공에 대비하였으며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연합국의 편에 가담하였다. 그 이후 전월본제국은 일본 제국을 지지하며 동남아시아를 침공하고 월본 왕국과의 내전을 전개하였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지지하며 지원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월본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한 1942년까지는 월본 왕국을 밀어붙이는데 성공하였으나, 일본의 몰락이 시작되자 동반으로 쇠퇴하였으며 마침내 미국과 월본 왕국이 공동으로 전개한 미군의 월본 본토 상륙 이후 패배하여 1945년 일본 제국의 멸망과 동시에 소멸되었다. 월본은 비록 파시스트 정권을 몰아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고 국토가 황폐화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 일로 미국과의 우호가 증진되었고 동맹 관계가 구축되었다는 장점도 있었다. 월본 왕국은 무로, 구리하 천황 당시의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추축국에 가담한 대월본제국이라는 파시스트 정권을 몰아냈지만 당시 천년 이상 정신적 지주로 국가의 중심을 유지하던 천황을 몰아내면 국민들의 반발이 심할 것을 우려해 천황제는 존속하고, 대신 국민들의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총리'가 민주주의 통치를 시작하기로 하였고, 구 대월본제국, 월본 왕국, 미국이 1945년 9월 10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서 조약을 맺으며(시드니 조약) 월본의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현대
종전 후에는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함과 함께 미국의 대공산포위망에 합류하였다. 월본은 중국과 인접하였기에 공산화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로 인해 반공주의로 국가 노선을 잡으며 미국과 급격히 가까워졌고 혈맹관계로 발전한다. 일본과는 전쟁 후 새로운 조약을 맺으며 전통적 우방국임을 재확인하였고, 다시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 또한 당시 신생 독립국이던 대한민국을 지지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공주의적 외교 노선을 확정하였다. 그로 인하여 소련, 중국과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도서지역 및 북양도 등지에서는 공산주의 게릴라가 활동하였으며, 이들의 주도로 1948년 후안도에서 정해공란(丁亥共亂)이 발생해 후안도에서 정부군과 공산주의 게릴라가 교전을 치루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월본은 반공주의를 강화하였고 주월미군을 증설하였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월본은 대한민국을 지지하며 국제연합군에 전투병 15,000명과 의료병 5,000명을 파견하며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동시에 월본은 미국의 전진기지와 군수물자 공급지로 활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전쟁특수를 누리게 되어 종전 복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1955년에는 전쟁 피해를 말끔히 씻고 다시 발전의 길로 들어섰다. 또한 일본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중계무역을 통해 상당한 이득을 얻게 된다.
그러나 경제 성장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벌려놓았고, 정치적 분열을 가중시켜 1950년대 월본은 1년을 넘긴 내각이 단 2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정치가 불안하였다. 결국 1963년 2월 13일 강일한 장군이 주도하여, 군부에 의한 쿠데타(임인정변, 발렌타인 쿠데타)가 발생하며 1963년 군부의 군사정권이 시작되었다. 군부는 왕실을 꼭두각시로 내세우며 민주주의 탄압과 국민 감시 등으로 집권을 해나간다. 강일한은 경제발전계획을 통해 월본의 경제와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월남전에 개입하여 월남전에 월본군을 파견하는 조건으로 각종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2차 산업을 다시 부흥시켜 현재의 관서임해공업지대를 만들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육성하기도 하였다. 이후 1969년 강일한이 병사하자 그의 후계자였던 이도완이 최고권력자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도완은 언론검열을 넘어 언론사와 결탁해서 사실상의 선전기관으로 변질시키고 민주화운동을 철저하게 진압함으로서 독재권력을 공고히 했고 그럼으로 수반되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각종 노력을 해왔다. 이도완은 억압정책으로 물가를 안정시키고 각종 규제를 풀어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 하였으며, 그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1978년 도유 아시안 게임을 개최한다.
이렇게 군부는 경제개발과 반공을 내세워 집권을 이어가는데, 1960년대 초부터 추진된 경제성장 계획으로 연평균 8~10%대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게 되며 1963~1974년에는 초고도경제성장을 이뤄내었다. 이를 도유를 흐르는 '원천' 강에서 따와 "원천의 기적"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 이후 오일 쇼크로 경제에 큰 타격을 입고 민주화 운동가인 민태진과 조선관의 활동으로 인한 민주화의 바람이 불게 되며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점차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1970년대 초반부터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1974년에는 당시 명문대학이던 경당대학교에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1974년 9월 1일, 500여명의 학생권 운동가들을 따라 도유 시민들이 합류해 50만명이 운집하게 되는 도유 9월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도유 9월 혁명은 타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월본의 전역으로 번져 국민들이 독재정권의 종식을 촉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부와 이도완는 끝끝내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고, 시위대를 탄압하고 붙잡았지만 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군부의 하야를 외쳤다. 미국과 일본, 다른 아시아와 유럽의 국가들까지 시위대 지지와 군부 퇴위 요구를 공개적으로 천명하자, 결국 10월 9일 이도완은 하야하였다. 군부는 총리 간선제 폐지와 점진적으로 개혁을 한다는 교섭안을 제안했으나 국민들은 교섭안 대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요구하였으며, 시위가 거세지며 전세계가 주목하고 미국까지도 시위대 지지를 선언하며 결국 군부는 하야하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약속하였다.
전자정부사
- 군정 이후 시기
군정 종식 이후 처음으로 이뤄진 선거에서는 정당 주자의 표 분산으로 무소속으로 출마한 나호진이 당선된다. 혼란기를 막 벗어나 정부의 안정화에 노력을 쏟았으며 기업 경제를 부흥하기 위한 여러가지 개방책도 선보였다. 그러나 검찰의 무리한 기업조사와 폐쇄조치로 인해 군정이 다시 열리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나호진 총리는 국민 여론의 압박에 돌연 사퇴를 선언하며 조기 선거가 치뤄지게 된다. 당시로서는 군정의 책임론이 부각되었던 자민당이었으나 자민당 외 세력이 안정적이지 않아 되려 자민당의 지지층이 결집이 큰 변수가 되었다. 두번째 치뤄진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을 확보하며 구창모 정부가 등장하며 큰 변화를 일으킨다. 경제 개발 대책과 확장적 외교성과로 급성장을 이루었다. 월본 국민들은 이 시대[1]를 소류 로망으로 부르며 가장 풍요롭던 시기로 평가하곤 한다. 구창모 총리는 연임에 성공했지만 건강상 문제로 사임한다. 후임으로는 모창민 총리가 집권하는데 마찬가지로 확장 외교를 통해 다양한 플랫폼의 국가와 수교를 맺고 동맹 관계를 넓히는 등 외교 부문에서는 역대 정부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수교만 맺어지고 후속 교류가 없다시피 하고, 경제 부문에서도 '모창민 노믹스'와 기업인 간담회 등 진행은 좋았으나 역시 실행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갈렸다. 모창민 총리는 월본에서의 업적을 가지고 UVN의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월본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후임으로 육성준이 지명된다. 이를 야당에서 구창모-모창민-육성준으로 이어지는 세습 정치를 비판했다. 특히 황실과 독대자리에서 영구집권이나 특정 기업 국영화, 특정 야당을 해산하겠다는 등의 내용이 폭로되어 지지율이 큰폭으로 하락했다. 굳건하던 자민당에게 위기가 불어닥친 셈인데 육성준 총리는 타개책으로 돌연 가상국가를 접는다고 선언, 업무를 중단하는 바람에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기도 한다. 자민당에서는 국정공백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성하를 권한대행에 임명했다. 짧은 기간동안에 일본 공상국가계와 교류를 체결하고 가상국제연합과 일본 가공국가연합(JAINA)와의 정상회담을 하기도 하였다. 자민당의 지속적인 악재속에서 야권에서 떠오르는 정치스타로 민주우가 급부상한다. 자민당의 지지를 이끌어 거국일치내각을 구성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그러나 혁명공산당 내란사건이 발생하며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자민당 탈당파는 월본태보당을 창당하여 중도기반의 제3세력을 구축한다. 하재성과 하은우 총리를 필두로한 새로운 내각은 여러 실험적 시도를 통해서 국정운영의 효율화와 내수 경제 활성화 대책을 꾸렸지만 미흡한 행정력과 실패한 정책으로 인해 정부가 셧다운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황실은 직접 내각에 관여하는 제정복고를 제안했지만 국회에서 불화가 일어나 철회했다. 각개 정계스캔들로 정치인들이 구설수에 올라 은퇴하면서 국회가 개회되지 못하고 정체되는 현상이 발생된다. 특별 대책으로 정계를 완전 개방하여 여러 계층의 정치인들을 수용하고자 했고 긴 시간동안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한다. 정계가 암흑에 갖히면서 내수 경제도 침체되었고 후술할 가상국제연합 탈퇴도 진행하면서 결국 활동 인구가 줄어들어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 여파로 몇년간 대침체기를 맞게된다. 월본에서는 이를 잃어버린 5년이라고 부른다. 정계는 암흑 속을 헤매다 모창민과 라버마르코 등 신흥 세력이 재등장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모창민 총리는 단 하루만에 무언가 결심한 듯 모창민 독트린을 선언하며 사퇴하였고, 모창민 독트린으로 월본은 가상국제연합에서 탈퇴한다.
국련 탈퇴 이후 월본은 연합이라는 구심점 없이 자립하게 된다. 국련 탈퇴 세력이 만든 한국가상커뮤니티에 가맹하기도 했으나 노선이 달라 나중에 가맹을 철회했다. 국련 탈퇴 이후에도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한다. 전영록 총리의 등장으로 안정적인 국정운영과 높은 지지율로 또 다른 '제2의 소류 로망'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편 새롭게 등장한 월본유신회는 체계적인 법치 문화를 보여주며 성문화된 정치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유신회의 돌풍에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무장한 자민당도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급진적 반유신회 세력이 난을 일으키며 스캔들로 이어지기도 한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황실이 과도하게 개입했는데 이를 두고 유신회 세력은 황실에 불편한 입장을 내보인다. 이브위키의 개설과 맞물려 유신회는 월본에서 철수 수순을 밟았고 다시 전영록 내각이 출범하며 안정기를 되찾았다. 정치 다변화를 위해 육성준 전총리가 복권된데 이어 다카기 그네 총리가 집권한 이래로 오랜만에 정치가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창작이 아닌 실존 정당의 현생 이슈를 그대로 담습하고 있어 직결 해산조치한 것에 반발하여 황실 폐지와 국가전복을 기도했다가 월본 정치가 전부 몰락했다. 이 과정에서 최재명 합참은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점거, 해산하고 총리와 정치인들을 가택 연금시켜 논란이 일었다. 헌정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 듯 전자정부 경비사령부에서 진압해 수습했다. 다시 민주적 선거가 개최됨에 따라 마츠다 하루토라 내각이 들어서 안정세를 굳히며 장기 집권하는데 성공했으나 황실과 자민당 세력, 마츠다하루토라 간의 불안정한 기류로 인해 결국 마츠다 총리는 입헌민정회(구 유신회)와 지하에서 결탁하면서 월본 테러를 감행한다. 테러 이후 후미히라 겐페이 총리가 재건과 수습을 하면서 황폐화된 월본의 내수 상황을 타개하고자 가국련과의 정상회담 끝에 가상국제연합에 재가입하였다.
자연환경
기후와 지형
월본은 지각판의 섭입으로 만들어진 열도 지형을 갖고 있다. 대부분 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은 산들이 여럿 있다. 전체적으로 한반도 보다는 따뜻하며, 후안도를 비롯해 동북부 산지는 설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온이 낮다. 후안도는 늦가을부터 봄까지 많은 눈이 내린다. 반면 산칸도는 더운 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다. 중앙 산간지역은 비교적 고원지대라 여름엔 덥고 강수량이 낮지만 산맥을 경계로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 펼쳐져 있다. 남부 해안은 해풍으로 인해 여름에 매우 습하고 더운 날씨가, 겨울에는 온난・건조하다. 주변국보다 태풍의 영향이 많으며 화산과 지진의 위험성도 높은 편이다. 최근에 발생한 2027년 수사 지진은 대표적으로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한 월본의 상황을 보여주는 재해 사례라고 손꼽힌다. 월본 열도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맥으로 이루어진 섬나라이기 때문에 좁은 면적에 비해 다양한 기후 변화가 관측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남북의 차이, 해안과 내해의 차이가 존재한다. 또 다우(多雨)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남부지방에는 연간 4,000mm를 넘는 강수량도 기록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는 6~8월의 장마철이다. 산칸도와 남양군도는 기후적 특성 때문에 태풍의 피해가 자주 일어난다.
지리
행정 구역
자세한 내용은 월본/지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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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본의 지방 |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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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본의 수도는 '도유수도시'이다. 현재의 도유수도시는 19세기에 들어서 월본제국의 천도 이래로 근대화를 거쳐 현대적 도시로 변모하였다. 그 이전의 시기에는 열도의 동쪽 변방으로서 원주민에 의해 군락이 형성되어 오다가 삼주성의 영토확장으로 편입되었고 삼주의 동남부가 삼도군으로 분리되며 무사단이 통치하게 된다. 타마의 동쪽에 있어 '도번'(東藩)라고 불렸다가 다이지유신 이후 '도유'로 개칭되었다.
주요 도시
월본의 주요도시 | |
후안/아사모토 | 고산부・진사시・조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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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주/도후 | 선전부・마카이시・만칸특별행정구・온주시 |
수도권 | 도유수도시・소보하나시・인산시・후에하라시・모리본조시・산전시・미카사시・수안시 |
중부 | 미소노부・중안시・성정시・도고시 |
신와 | 와가사부・타마부・진후시・관몬시 |
서안/다난 | 히바나부・토요하시시・쿠로시・후페이시・토모루시・카사시 |
주곤/남도 | 사이가타부・도쿠수마시・가나타시・다카수마시・다이산시・산칸특별행정구 |
후안도
관본도에 이어 두번째로 큰 섬인 후안도는 월본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대체적으로 원형 모양이기 때문에 그 내륙의 면적이 매우 넓다 라고 할 수 있다. 냉대 기후이므로 겨울에 매우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며 여름에는 장마가 없다. 소수의 원주민의 정착으로 군락이 형성되었고 화산섬 답게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발달해 있다. 중세까지 에조성이 통치하다가 토요하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월본의 영향권에 들었다. 북방으로의 진출로가 되어 월본군의 병참기지가 곳곳에 들어섰고 대미, 대유라시아에 대응하기 좋은 지리적 위치이다.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곳이 격전지가 되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민주화시기에는 군부에 의해 봉쇄되기도 하면서 많은 차별을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정치 성향은 진보세가 강하다. 민주화 이후에는 공업 대신 관광업과 중개무역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산업을 여는 곳이 되었다.
도후 지방
관본도의 동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설양산맥이 줄기로 뻗어있는데 눈이 많이 오는 고지대여서 설상 스포츠가 발달해 있다. 중세시대 정치 중심지였던 신와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기 때문에 지역개발이 지체되었다가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여러 산업 기반이 잘 갖추어져 있다. 산간 지역에는 온천과 계곡 등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서안, 도유 수도권에 비해서 동북지역은 산지가 많고 개발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뒤늦게 발달했다. 따라서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 만칸과 선전부 같은 대도시는 이주민들과 다양한 인종의 정착민들이 생활권을 형성해 있어 대표적인 다문화적 지방이라고 할 수 있다. 동쪽 연안에 붙어 있는 마카이섬은 한동안 원주민에 의해 통치되다가 중세시대에 정복했고 그후로 도시화 되지 않고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시 정권 시기에 외국인 카지노 유치를 위해 국제관광도시를 조성하면서 다양한 문제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산주 지방
관본도 북쪽 어깨에 동해와 접해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중부 지방의 북부 지역과 생활권을 같이하고 있다. 도후 지방과는 히다산맥으로 구분하며 그 줄기가 중남부를 가로지른다. 산악지역의 끝판왕 답게 월본 알프스 등 산악 경관과 스키장, 설산 관광지가 많고 탄광 유적도 주로 분포되어 있다. 이 지역의 최대도시인 온주시와 중부 지방 북부 지역으로는 비교적 사람이 살기 좋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관본도 북부 해안 중에서는 가장 넓은 평야라고 할 수 있다. 산주지방 역시 온주평야를 제외하면 산지가 많고 도시화되지 않아서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항공방위군 사관학교가 위치해 있고 월본항공의 전폭적인 투자로 항공 테마파크와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세계대전 때 이곳이 항공기를 제작하는 군수창으로 개발되어 관련 유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인문 환경
인구
민족
재난 안전
경찰조직・치안
월본의 경찰은 경찰법에 따라 조직된다. 크게 범죄 예방과 치안을 유지하는 '행정경찰'과 범죄 등을 수사하는 '사법경찰'로 구분하며 행정경찰내에는 보안 관련 문제를 담당하는 '공안경찰'과 특별상황에 대비하는 '경비경찰'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월본 경찰은 육상경비대가 전신이다. 전후 국내 치안수요를 대비하여 경비대가 창설되었고 육상과 해상부분, 그리고 소방대로 나뉘어 있다가 각각 독립외청으로 분리되었다. 구로다 암살사건을 계기로 '특별고등경찰'이 창설되었고 반정부인사들을 비롯해서 정당·사회단체·사상·정치범죄를 담당했다. 그러나 정권의 입맛대로 독재와 억압의 수단으로 악용되었기에 특별고등경찰을 해체하여 기동경찰대로 흡수 개편된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폭력단과 사이비 종교단체 및 극우파와 적군파 같은 공산주의 무장조직이 기승을 부리면서 공안 경찰이 창설된다. 경찰기관 외에도 특수 목적의 경찰력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사법경찰'도 존재한다.
소방조직・방재
월본의 소방청은 소방조직법에 근거한다. 구조, 구급, 방재, 경방으로 구성된다. 경방은 화재진압, 화재조사, 소화관리 등 업무를 수행하며 초동 구조활동이나 비긴급구조 활동도 담당한다. 구조대는 일반구조, 조난구조, 교통사고 구조 등 전문장비를 동원해 구조활동을 벌이며 환경에 따라 산악, 수난, 화학구조대가 설치되어있는 지자체도 있다. 구급은 응급환자 이송과 긴급처치를 담당하며 사고로 인한 환자 이송과 질병으로 인한 이송, 경찰 지원요청 시 출동 등이 모두 포함된다. 방재는 재난대피시설 점검, 건축물 소방점검, 위험물 운송 관리 등 업무를 수행한다. 전국의 소방 정책을 총할하는 정부기관으로 월본 소방청이 있으며 지방별 소방청, 소방청 소속으로 소방서가 편제되어있다. 월본의 황거인 황궁의 소방업무는 도번 소방청이 아닌 황궁경찰에서 담당한다.
보건
언어
종교
교통
도로 교통
월본의 도로는 우측통행이다. 본토는 남북으로 길어 차량으로 일주하기에는 어려운점이 많으며 주로 도시간 이동이나 중거리 정도의 교통 수요가 있는 편이다. 고속버스의 경우 항공, 철도 보다는 간편하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노선망이 구축되어 있으며 장거리 노선은 화장실 설비가 구비된 침대버스가 운영된다. 월본의 고속도로는 간선노선과 종단선, 접속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7년 중앙고속도로 도유↔타마 구간을 시작으로 타마↔와가사 구간이 차례로 개통되어 본격적인 차량 물류시대가 개막되었다. 그전까지는 일반 도로가 그 역할을 했는데 일반 간선도로 역시 고속도로 못지 않는 시설과 선형을 갖췄다.
철도 교통
항공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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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S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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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항공 |
월본항공 | 현성항공 | |
---|---|---|
LCC | ||
월백에어 | 전월본공수 | 팬아시아 항공 |
스카이큐브 항공 |
월본은 섬 나라인 관계로 여러 섬이나 해외로 가기 위해서는 해상이나 항공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배를 이용한 수단은 그 특성 때문에 발달하지 못했고 항공 수요가 폭발하듯이 늘어났다. 국책 항공사는 월본항공이고, 현성그룹 산하의 현성항공, 전월본공수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대표적인 공항으로는 수도 도유에 위치한 산쿄국제공항(山京国際空港)과 인산국제공항(仁山国際空港)이, 와가사에는 신와국제공항(信渦国際空港)이 있다. 대표적 휴양지로 유명한 산칸도의 산칸국제공항(山巖国際空港)과 산쿄국제공항간 국내선 노선이 가장 수요가 많으며 산칸공항과 후안의 고산국제공항간 국내선 노선이 최장거리이다.
해상 교통
정치
자세한 내용은 월본/정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내각 행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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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류 시대 | ||||
초대 나호진 17年10-11月 |
제2-3대 구창모 18年2-6月/6-8月 |
제4대 모창민 18年8-11月 |
제5대 육성준 18年11月-19年1月 |
제6대 이성하 19年1-2月 |
메이우 시대 | ||||
제6대 이성하 19年1-2月 |
제7대 민주우 19年2-3月 |
제8-9대 하재성 19年3-7月/7-9月 |
제10대 민주우 19年10月-11月 |
권한대행 정문석 19年12月-20年2月 |
세이카 시대 | ||||
제11대 하은우 20年2月-4月 |
제12대 한성훈 20年4月-5月 |
제13대 민주우 20年6月-12月 |
제14대 라버 마르코 21年1月 |
제15대 모창민 21年1月 |
제16대 나의재 21年1月 |
권한대행 구창모 21年1月-2月 |
제17대 이해수 21年2月-4月 |
권한대행 이승배 21年4月-5月 |
제18대 구창모 21年5月-8月 |
제19대 전영록 21年9月-11月 |
제20대 하성일 21年12月-22年1月 |
제21대 Mirai 22年1月-2月 |
제22대 윤교익 22年2月-3月 |
권한대행 윤교익 22年3月-3月 |
제23대 윤교익 22年3月-4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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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와 시대 | ||||
제24대 타츠바나 요쿠온 22年5月-8月 |
제25대 전영록 22年9月-11月 |
제26대 육성준 22年11月-23年1月 |
제27대 다카기 그네 23年1月-23年2月 |
제28대 마츠다하루토라 23年2月 |
혁명정부 최재명 23年2月 |
경비 시키노사토 유이무 23年2月-年6月 |
제29-31대 마츠다하루토라 23年6月~24年4月 |
경비 마츠다하루토라 24年4月-7月 |
제32대 후미히라 겐페이 24年7月~12月 |
레이카 시대 | ||||
제32·33대 후미히라 겐페이 24年7月~12月 |
제34대 아사모토 강치 24年12月~현재 |
![]() 아사모토 강치 《第 34 代》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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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월본 내각총리대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월본의 정부 수반이자 천황으로부터 외교와 국정운영권을 임명받아 그 업무를 수행한다. 월본은 입헌군주국이므로 명목상 '신하'의 개념으로 공식명칭은 '내각총리대신'이다. 내각 각부의 상(相, 장관)의 총괄 수장으로서 수상(首相)으로도 칭한다. 2025년 02월 07일 기준으로 현재 내각은 월본사회당의 아사모토 강치이다.
월본국 수상은 국회의원들 중 국회에서 내각총리대신 선임에 관한 의결에 의해 지명된다. 통상 다수당의 총재(당수)가 지명된다. 수상은 행정권의 수장이자 월본군 방위대의 최고지휘권한을 갖으며 외교와 각의 구성도 권한에 있다. 국회에서 지명으로 선임하지만 국회는 정부수반을 탄핵하는 '수상불신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총리는 국회를 해산할 수 있는 '국회 해산권'이 견제 수단으로서 작동될 수 있다.
다수당의 총재가 수상직을 수행하는 구조상 여론에 크게 뒤집히지 않는 이상 집권여당이 거의 바뀌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자유민주당은 총 7명의 수상 집권기를 가지기도 했다. 월본 정치 구조상 정당 계파마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으며 그에 따라 당락이 결정된다. 또한 중대한 정치 사건이 발생하면 여론이 급격히 기울기도 하고 지지층을 넘는 유입이 정권교체를 하기도 한다.
역대 최장기 임기 수상은 구창모이며, 294일(권한대행 시기 포함시 324일)간 수상직을 지냈다. 그 다음으로는 민주우이며, 269일간 수상직을 지냈다. 3번째는 하재성이며, 189일간 수상직을 지냈다. 연임에 성공한 수상은 구창모, 하재성, 민주우, 모창민, 전영록 총 5인이다.
한때 여론조사 등 항간에 '월본의 전성기'를 묻는 질문이 나오는데 월본에 대해 오래 지켜본 사람들로서는 '구창모' 정권 초기가 압도적이다. 월본 전자정부 개설 초기이므로 제반 시설과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성장 원동력이 되었고 월본의 창작으로 이어지는 신 산업등 볼거리가 넘쳐났던 시기이다. 이른바 호황기를 누렸던 시기이다.
내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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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부 | 국무성 | 법무성 | 경제성 |
---|---|---|---|
궁내청 공안위원회 금융청 공정거래위원회 |
소방청 경찰청 분쟁조정위 보훈청 체신청 |
검찰청 공안심사위원회 출입국관리청 공안조사청 |
국세청 통계청 특허청 중소기업청 |
사회성 | 국토성 | 방위성 | |
문화청 스포츠청 근로노동청 질병관리청 의약품청 |
관광청 기상청 해상보안청 |
방위장비청 병무청 |
일반적으로 중앙성청(中央省庁 / Ministries of Wup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줄여서 성청이라고 부른다. 국가조직법상 규정된 '성'과 부속 외청들이 포함된다. 내각총리가 선출해 임명하며 주로 집권 당에서 구성한다. 예외적으로 거국내각이라던가 특수 상황에서는 야당에서도 기용한다. 이 중 내각부는 중요 정책의 기획 및 입안·조정 등 총리가 담당하는 행정 사무를 보조하거나 총리가 직접 내각부에서 담당한다.
외교
국회
월본 국회의사당은 다이치 유신 이후 의회정치를 위해 중기감영을 헐고 3층 벽돌건물로 축조하여 사용했고 현재는 문화재 보존을 위해 비워진 상태로 정비하고 있다. 본관 옆으로 의회당 건물과 의원 회관을 신축하여 대체하고 있다. 1940년대 세계대전 개전 중에는 대본영 전략회의소로 사용되었고 황궁과 지하통로로 연결되어있어 유사시 대피할 수 있다. 여러 차례 폭격에 맞았지만 구조적으로 크게 손실되지 않아 근대 건축물로 보존되고 있다.
패전 이후 연합국 사령부가 점거하여 국회를 해산시켰으며 연합국 회의소로 사용되었으며 구로다의 정변 당시 탱크와 장갑차에 포위되기도 했다. 군부독재기에는 지하 문서고에 원인은 알수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문서들이 소실되기도 하였다. 신군부 모시 정권에서는 수도 항쟁이 이곳 국회의사당 앞 광장과 대로를 중심으로 가두 시위가 전개되기도 했으며 월본사에서 굵직한 역사의 잔상을 남겼다. 지하철 치우단선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본관 서편 아래를 지나는 관계로 진동이 발생하여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질 수 있어서 본관 지하에 내진 구조물로 보강한 전력이 있으며 국회 앞마당에는 치우단선, 주교선 국회의사당역과 광장 서쪽에 계류선 국회광장역이 건설되었다. 국회 주변에서 시위가 진행되면 이 역들은 빈번하게 무정차 통과한다. 국회의사당 뒤편 블럭에는 내각총리대신 수상 관저가, 그 옆으로는 내각부 청사들이 모여 있어 이 주변은 다른 곳에 비해 경비경찰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다.
정당
![]() | |
연립 여당 | |
![]() 161석 |
![]() 117석 |
야당 | |
![]() 173석 |
![]() 29석 |
재적의원 480석 |
월본의 정당은 크게 3가지의 분류가 있다. 첫번째로 자유민주당계 정당은 중도~보수 성향의 정당으로, 월본 초창기부터 구창모 전 총리에 의해 설립되어 이르고 있다. 2019년 구창모 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구창모 총재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노현옥 총재가 유네민주연합으로 바꾼것 이외에 아직까지도 월본 정치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현재의 자민당은 2021년 구창모 복권과 함께 2기 자민당이 들어섰다. 자민당은 다년간 월본 정치사를 다져온 세력으로, 그만큼 월본에 대한 이해도와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에 임한다. 두번째 세력은 창작계인데 인맥이 많은 자민당계에 비해 각각의 분파가 소규모로 자리해 있었다. 민주우와 장현을 필두로한 월본민주당 세력은 한때 자민당 텃밭이던 월본에 대응할만한 야당을 만들며 균형있는 정계를 구현했지만 갖가지 스캔들로 은퇴 수순에 들어갔고 현재는 여혜진 등 잔여 인물들이 자민당에서 보수 방류 파벌을 형성해 있다. 또 하나의 원로격 월본사회민주당 계열은 마츠다하루토라를 총재로 하여 진보 성향의 정당으로 꽤 오래 정치에 임했고 2023년에 들어서 정권창출에 성공하였고 1년여간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해왔지만 6.18 내란 사건으로 인해 한 순간에 몰락하여 잔류 세력은 월본사회당으로 남아있다.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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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최근 선거 | 다음 선거 | |
---|---|---|---|
국회의원 선거 | 22대 2024년 11월 |
23대 미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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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선거 | 4대 2019년 2월 |
미실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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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동시지방선거 | 2대 2019년 2월 |
4대 2025년 1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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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자세한 내용은 월본/사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최고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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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Mirai |
제2대 야마우치 사쿠라 |
제3대 Mirai |
고등재판소
지방재판소
황실
![]() | |||||
월본제국 | |||||
제43대 다이치 천황 |
제44대 헤이모리 천황 |
제45대 소류 천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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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본국 | |||||
제45대 소류 천황 |
제46대 메이우 천황 |
제47대 세이카 천황 |
제48대 마루히토 |
제49대 하로히토 |
![]() 하로히토 |
![]() |
하로히토 천황 |
자세한 내용은 월본 황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현재 월본의 천황은 제49대 하로히토이며 2024년 6월 14일 즉위했다. 연호는 레이카(玲香)이다. 부황(父皇)인 마루히토는 생전 퇴위하여 상황(上皇)으로 물러났다. 월본 천황은 상징천황제를 따르는 헌법상 천황은 월본국의 국가원수라는 상징일뿐 어떠한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 정치적 중립성이 헌법상 규정되어 있으므로 국가의 내각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 중대사나 헌법이 정한 국사가 업무인 경우 수행한다. 월본 제국 시절에는 천황이 대원수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패전 이후 새로 만들어진 헌법에서 '월본국의 상징'이자 '월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헌법상 국가 원수를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내각총리대신과 최고재판소장을 임명하고 헌법과 법령, 외국 조약의 공포 등 권한이 사실상 천황에게 있어 실질적으로 국가 원수로 보고 있다. 또한 국가 의전 서열이 내각총리대신을 앞선다.
경제
1849년 다이치 유신 체제 이후 월본은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개항을 통해 경제적 영역을 확장하는데 주력했다. 다이치 천황 산업 분야별 자유 경쟁 체제를 도입하고 해외 자본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으며 이 시기에 서양으로부터 많은 학자들이 국가로부터 고용되었다. 해상 무역과 2차산업 위주의 상황에 맞추어 설계된 경제 구조를 설계했으며 그런 이유로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기계공업과 제조 가공업에서 우수한 실적을 거뒀다.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공업 역량은 전쟁 물자를 보급하는데 전념하게 되면서 항공엔진, 선박건조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그러나 전쟁 도중 폭격과 해체 등으로 대부분이 황폐화되었다. 전후 도시의 재건과 원천 기술의 확충, 첨단 기술의 투자 강화 등으로 60년대까지 급격한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60년대에는 10%, 70년대에는 5%, 80년대에는 4%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했다. 가파른 경제성장률은 90년대 이르러 둔화되었고 부동산과 무역업에 과도한 거품이 89년에 정점을 찍고 가치 평가가 절하되면서 10년 이상의 오랜 경제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락세는 2000년대에 잠시 반등하다가 다시 정체기에 접어든다.
주요 산업
월본의 산업 체계는 주로 첨단 제조 산업,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하여 전기전자, 교통, 자동차 등이 주를 이룬다. 현성전자는 스마트폰과 가전 IT분야에서, 현성자동차는 완성차 세계 1위의 첨단 기술을 보유한 기업 집단으로 자리 잡았고, 철도 차량, 토목 분야에서 여러 기업들이 철도 산업을 이끌고 있다. 또한 게임과 메신저 등으로 신(新)산업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HERA 또한 월본의 기업이다.
IT・소프트웨어
![]() | ||||
![]() 현성전자 |
![]() SHINANO |
파일:HERA 로고.PNG HERA | ||
문서가 없는 IT・전자 기업 | 사라진 기업 | |||
ACRO | ![]() |
월본 IT・소프트웨어 시장 1위 기업은 HERA로 꼽힌다. 메신저 서비스인 헤라톡과 게임 서비스인 헤라게임즈를 중심으로 여러 IT・소프트웨어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2023년에는 미소노에 과학기술단지를 착공하였다.
철도교통
자동차・제조업
![]() | ||||
![]() 현성자동차 |
![]() Coil |
![]() 제황자동차 | ||
NPC 기업 | ||||
ROTA│하츠다│ISSAN |
'자동차'는 월본의 주요 산업 중 하나이다. 현성자동차가 시장 1위 사업자이며 Coil이 신흥강자로 주목 받고 있다. 과거에는 시타자동차, E-Motors 등이 있었다.
기업
재벌
대기업
사회 문화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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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중인 방송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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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없는 방송사 | ||
채널 V │News 24 │TBS 뉴스 | ||
운영 중단된 방송사 | ||
TBN│SPNB│도유의소리 |
월본의 언론사는 크게 '국가기간통신사', '국영방송', '민영방송'으로 나뉘며, ABN은 국영방송, WBS는 국기기간통신사, TBC 등은 민영방송사로 등록되어 있다. 언론의 자율화가 이루어져 민간 주도로 언론 보도가 발전되어 왔지만 황색언론인 WBC 사건 이후로 2021 언론개혁이 이루어져 엄격한 자격 위주로 할당되어 있다. 월본 전자정부 초창기에는 국영방송에서 '오픈형 언론'을 추구하며 개인이나 기업에서 별도로 언론사를 설립할 필요 없이 국영방송에 보도를 할 수 있었고 현재도 그런 특성이 남아있다.
교육
월본은 고등학교까지 무상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7세가 되면 소학교에 입학하며 소학교는 5년제로 운영된다. 이후 3년제 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중학교 2학년 1학기까지는 모두 같은 교육을 받게 되지만 2학년 2학기부터는 진학반과 실업반, 예체능반으로 나누어 수업이 진행된다. 이후 각자의 진학 계획대로 일반계 고등학교, 실업계 고등학교, 특수영재 고등학교, 특수학교, 도제학교, 예술학교, 체육학교 등으로 입학하게 된다. 고등학교는 4년제이다. 일반계 고등학교는 일반적인 대다수의 학생이 진학하고, 실업계와 도제학교는 취업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직업 교육을 받는 곳이며 3~4학년 시기에는 실습 직원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수영재 고등학교는 과학, 외국어, 기타 항목면에서 우수한 능력을 가진 학생들을 육성하기 위한 학교이다. 특수학교는 장애 학생을 위한 학교이며 기업의 후원으로 대부분이 운영되고 있는 상태이다. 예술학교와 체육학교는 예체능계 학생들을 위한 학교이다.
대학교는 월본 전국에 350개가 있으며 그 중 80개는 국공립, 270개는 사립으로 운영되고 있다. 월본은 1950년대 미군정청의 교육 개혁으로 인하여 대학 평준화가 부분적으로 이뤄진 형태인데, 고등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 시험에 응시한 후 통과하면 대학교 입학 자격을 부여받는다. 졸업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내신 성적을 입학하고자 하는 학교에 제출한 뒤 합격하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즉 옛 1960년대 한국처럼 상위 2~30% 내외의 인재들만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그로 인해 대학 이름보다는 학과와 연구 네트워크의 위상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며, 대학 간 격차는 크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구월본제국대학교'라 불리는 전월본제국 시기의 명문대와 수도권, 일부 지방의 몇몇 사립대가 최상위권 대학으로 우대받는 등 대학 서열화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하위권으로 여겨지는 대학교를 나와도 큰 차별을 받지는 않으며 중하위권 대학교에서도 학과의 위상이 높다면 구월본제국대 못지 않은 우대를 받기도 한다. 단, 의과대학이나 치과대학, 약학대학은 어느 대학이던 간에 최상위급 입결을 보인다.
지역별 대학
스포츠
월본은 인구도 적지 않고 스포츠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 수영 등의 생활체육과 연계된 스포츠가 발전한 국가 중 하나이다. 프로야구는 지역별 구단과 지역팬들을 주축으로 야구 인기몰이를 하고있으며 전통적인 인기 스포츠인 월본 축구 리그 역시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더운 국가로 인식되지만 도후지방에서는 동계 스포츠도 발달하였으며 현재 동계 스포츠 투자도 아끼지 않고 있다. 아카타시는 고산지대와 설산지형이어서 스키분야도 집중 양성할 계획이다. 쇼트트랙과 스피드 스케이팅 분야에서도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가 급등하고 있고, 컬링과 아이스하키 역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야구
야구는 축구와 함께 양강 체제를 이루는 인기 스포츠이다. 아시아권에서 최정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 첨관보다 한 수 위의 전력으로 평가받는다. WPB 리그에는 많은 기업들이 팀의 스폰서로 참여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상위 두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축구
월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축구가 들어왔으며, 아시아 최초의 축구 구단인 FC 도유(1858년 창단)가 존재하는 국가이다. 월본은 1990년대 이후 세계 축구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월드컵에서 5번의 토너먼트 진출을 이뤄냈고, 1990년에는 아르헨티나를 이기고 4강에 오르는 밀라노의 기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자세한 것은 상위 두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관광
여행 관련
군사
방위대
단위
연호
玲香 레이카 8월 7일 |
월본의 연호는 월본국 내에서만 통용되는 공문서에 주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점차 사용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월본의 연호 계산은 월(月)로 세면 된다. 예를들어 2024년 7월이 레이카 원년(元年)이므로 2024년 9월 5일은 '레이카 3월 5일', 2025년 7월 20일은 '레이카 14월 20일'이 되는것이다. 서력년도가 넘어가도 계속 '월'을 세주면 된다. 오늘은 레이카 8월 7일이다. 이 위키에서는 '틀'을 이용해 간단하게 타임 스탬프를 만들 수 있다. {{레이카|연|월|일}}
틀에 연, 월, 일을 입력해 넣으면 월본력을 계산하여 표출한다.
통화 화폐
여담
- 2018년, 월본이 가상국제연합에 가입하고 곧바로 추천 가상국가 리스트에 등재되었다.
- 카페 가국중에서 '가상 기업 문화'를 주 컨텐츠로 내세우며 차별화를 했다는 점에서 월본의 2018 호황기가 회자되고 있다.
- 2017년 건국된 가상국가 중에서 활발했던 당시 신흥 3개국으로 하늘미르, 대부여국, 월본 중 하나 였다.[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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