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

Chen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4월 15일 (화) 17:57 판 (→‎주요 산업)
월본 테마 이미지2024.png
월본국
月本国│Wupan
국가정보
여행정보
문화
역사
주요 정보
수도도유수도시
면적384,239km²
인구1.382억명 (2022년)
내각 총리
아사모토 강치
인물 아사모토 강치.png
아사모토 강치
2024년 12월(玲香 6月) ~
×
월본사회당

GDP4.811조 USD (2021년)
정치 정보
정부
국회
황실
인물 아사모토 강치.png
아사모토 강치 내각
2024년 12월(玲香 6月) ~
정부
국회
황실

월본 22대 국회 다이어그램.png
166
자유민주당
121
월본사회당
67
월본개혁당
55
애국하여···
40
대한청아···
29
재월방유···
2
무소속

선거 정보제22대 월본 국회의원 선거

정부
국회
황실

인물 하로히토.png
하로히토
2024. 7. 17.~
관련 문서
월본 여행 테마 이미지.png
월본 여행정보
Travel infomation
국가정보
여행정보
문화
역사
전류·전압 │ 220V/ 60㎐
통   화 │ 환 (圓, 丸, WPN)
환율정보 ∨
1WPN│₩??원 (고정환율)
월본 화폐 표기법
• 100환
• 丸 100 (=₩ ???원)
• 100 圓

도메인 │ .wp
시간대 │ UTC +9
국가 번호 │ +83
비자 │ 무비자 협정국을 통해 입국하는 경우 별도
심사없이 체류가 가능하다.
주요 명소
월본 문화 테마 이미지.png
월본의 문화
Culture
국가정보
여행정보
문화
역사
월본 사회문화.png
월본의 사회 문화
월본은 창작주의를 기반으로 실물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 만큼 다소 경제성장률이 둔화되었지만 세계 최대 IT, 철도 강국이다.
월본 정치문화.png
월본의 정치 문화
전후 내각은 우경화와 군부집권으로 불안정한 정국이었고 곳곳에서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다. 군사정권 하 경제계획과 건설 노력에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월본 기념일.png
월본의 기념일
건국기념일(6월5일), 세계교류의날(1월21일) 등이 있다.
월본 역사 테마 이미지.png
월본의 역사
History
국가정보
여행정보
문화
역사
페이지 준비중 입니다.

월본국 (月本, Wupan), 약칭 월본은 동아시아에 있는 국가이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네 개의 본섬과 주변의 작은 부속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중국 대륙첨관이, 북쪽으로는 대한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라시아, 사할린공화국이, 남쪽으로는 오리엔트 공화국이 접한다. 인구는 약 1억 3천만명이며 면적은 384,239㎢이다.

국가 상징

국호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월본/국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월본의 국호는 월본어 명칭으로 '우판' 또는 드물게 '우본'이 사용되고 있다. 월본인들은 자신들을 '월본인'(月本人)이라고 호칭하며, 사용하는 언어는 '월본어'(月本語)라고 부른다. 우판은 '달이 떠오르는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국제적인 공식 명칭은 월본(Wupan)으로 사용된다.

국기

청월기
靑月旗
월본 국기.png
'밝고 순수한 달의 푸른 기(氣)'
공식명칭인 청월기는 달의 상징으로 흰색 배경에 파란색 원이 그려진 국기를 사용한다.

~유래~ 깃발자체는 그 이전부터 써왔으나 국제상선항행규칙을 정하면서 규격을 하였다.
청월(靑月)이라는 뜻처럼 파란색의 원은 '푸른 달'을 의미하고 하얀 배경은 창작의 순수성을 뜻한다.

지위 공식 국기
위키스 파일명 파일:월본 국기.png

국장

수호화문
守護花紋
월본 국장.png
지위 공식 국장
위키스 파일명 파일:월본 국장.png

월본의 상징화(花)인 수호화를 본따 만들어진 국장은 국가공식통용으로 사용되고 황실에서는 각 천황마다 부여되는 고유문장이 사용된다. 국장에 사용된 수호화는 중세 아카사 전설의 문양에 있는 전설 속의 꽃무늬로 비롯되었다. 이 수호화의 뾰족한 잎은 자생(自生)을 상징하며 둥근 잎은 진명(進明)을 의미한다. 수호화문은 보통의 황실 관련 문서나 물품에 그려져있고 황실차량의 경우 천황이 탑승하는 문과 전면부에 장착되어있다. 이외에 국가 문장을 사용하는 곳에는 월본 정부문장이 사용되고 있다.

국가

슬로건

모든 것을 창의롭게
'모든 것을 창의롭게'는 월본국의 공식 슬로건이다. '세상을 그려나가는 즐거움이 모여 창의적인 월본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기업의 창작정신과 세밀한 설정요소들이 혼합되어 다채롭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월본, 모두가 함께 그려 조화를 이루는 월본을 상징한다.

역사

역사설정

이 문단은 이전 판의 데이터를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버전으로 준비중입니다.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월본/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월본의 역사
月本史
월본사 이미지.png
선사・고대
중세
근대
전후시대
현대
+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인 빙창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인간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시기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7만~8만년 전의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2007년 도유 하치오지에서 발견된 '빙창' 유적이 있다. 이 빙창 유적에서는 타제석기와 함께 오늘날 남중국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동물의 뼈가 발굴되었다. 이 동물 뼈의 발견은 옛날 월본 열도가 오늘날과 같이 섬으로 되어 있지 않고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연륙설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고 있다.

고대 월본 열도는 남중국해와 월본해(동해)를 끼고 아카토 문명이 발생하여 아카사인들이 존재했었다. 험한 산지 대신 완만하고 비옥한 규슈의 쓰쿠시평야에 집단으로 생활했으며, 농사기술이 발달해 곡식을 주식으로 하였다. 천공단 유적이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아카사인들은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월본 열도 각지, 특히 주곤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고 대륙 지역의 문화를 받아들여 월본으로 전래시켰다. 아카사인 집단은 정교하고 섬세한 마을을 건설했는데, 중심이 되는 성체 지붕에 붉은 천막을 둘러놓아 홍성이라고 불리었고 이 시대를 홍성시대라고 한다. 홍성시대는 금속기의 병용과 수도경작을 특징으로 하며,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를 왕으로 한 소국가가 성립되었다. 또한 주곤에서 시작된 벼농사 또한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주부 지방에 보급되었고, 1세기 전까지 도번과 신설 남부에 전파되었다. 최종적으로 3세기까지 신설 북부까지 벼농사가 전파됨으로써 북도를 제외한 고대 월본은 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이 행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월본은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던 섬이였던 관계로 중국, 한국 등의 타 국가들에 비해 발전이나 국가 수립이 늦었으며, 3세기까지도 홍성 시대가 이어지며 대형 국가로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각지에서 소규모 국가들이 서로 다툼을 계속하던 시기가 이어졌다. 여러 소규모 국가들은 한반도에서 산업기술과 한자를 수입하며 경쟁하였으며, 특히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제는 당시 월본의 여러 소규모 국가들에게 수많은 기술과 이념, 사상을 전파하며 월본에서의 지배적 영향력을 형성했으며 그 결과 아카사인들은 백제를 상국으로 모시게 되었다.

남백제국

백강전투

5세기 후반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백제와 신라, 가야가 멸망 직전까지 가게 되자, 월본에는 백제와 신라, 가야 출신 유민들의 이주가 대거 시작되었고 이들은 도래인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백제는 475년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한성을 이어 사비성까지 함락되어 멸망하였으나 백제의 잔존 세력들은 개로왕의 차남이자 백제의 왕자인 부여관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구려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은 약 10일에 200개의 성을 탈환하고, 고구려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고구려군의 화력과 동맹 신라의 멸망으로 인한 고립으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가 결정적인 멸망 요인이 되어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백제 부흥 운동 잔존 세력의 수장이던 부여관온과 흑치상지는 월본열도로 도피하기로 결정했고, 백제계 유민들과 군사를 이끌고 월본 제도로의 항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월본 지역에서 백제촌을 이루고 살던 백제계 유민들도 합류하였으며 또한 당시 동맹이자 우호 관계에 있던 신라·가야계 유민들과 왕족 일부도 흡수하여 당시 백제 왕실이 중심이 되어 고려반도 남부 출신 유민 세력을 통합하였다. 476년 부여관온과 흑치상지는 백제의 뿌리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아 남부여국이라는 이름을 지어 건국을 선언하였고, 이것이 현 월본의 시초가 된다.

이후 남부여국은 개척 과정에서 적대적이던 아카사인들과 충돌하게 된다. 483년에는 남부여국이 신와 지방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남부여국과 아카사인 세력간의 다툼인 외해군란이 일어나게 되고, 도래인들이 승리하며 약 100여개에 달하는 홍성을 점령했다. 홍성이 해체되며 일부 아카사인(이후 이들은 백제에 복종한 대부분의 아카사인들과 차별화되어 오랑캐라는 의미의 '에조'로 불리게 된다.)들은 도번 지방으로 천도한 뒤 세력을 유지하여 도유성을 세웠으나 대부분의 아카사인들은 백제에 복종하며 동화되었고 피지배층으로 흡수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래인들이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 실권을 장악하며 지배계층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부여관온은 아카사인들에게 '하늘의 신'이자 아카토 신화 속 신의 자손인 '천황'으로 추대되며 현 월본 황실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501년 남부여국은 와가사에 청양성을 축조하여 천도하였고, 510년 무렵 도유성을 중심으로 한 도번과 신설 지방의 에조인들이 아카사 연합 왕국을 건국하였다. 이후 6세기부터 8세기까지 남부여국과 아카사 연합 왕국간의 대립이 지속되어 이를 남북국시대라 칭한다. 이 시기 남부여국과 아카사 연합 왕국은 현재의 유전부 인근을 사실상의 경계선으로 두고 대치하였다. 이 시기 남부여국은 도래인 출신의 지배층과 아카사인 출신의 피지배층이라는 신분제가 확고해짐과 동시에 남월본 개척 과정에서 중앙집권을 확고히 하였으며, 710년에는 세이안 개신으로 천황을 정치적·종교적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율령국가가 형성되었다. 아카사 연합 왕국은 여러 에조 부족들의 연합체라는 특성상 중앙 집권을 이루지 못하고 반남부여 성향의 유력 호족들에 의해 국정이 결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국왕 역시 유력 호족들의 회의로 추대되고 호족 휘하 군대가 독립적으로 지휘를 받는 등 지방분권적 모습이 드러났다.

780년 즉위한 남부여국의 센코 천황은 군비 증강에 나선 뒤 787년 아카사 연합 왕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며 남북통일전쟁을 일으킨다. 남부여국은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였고 우수한 군사력을 완성하였으나 아카사 연합 왕국은 여러 호족들에게 권력이 분산되었고, 군사력 역시 호족들의 군벌에 의해 분산되었기에 남부여국에게 각개격파되어 연전연패하였다. 결국 794년 도유성이 점령당하며 남북통일전쟁은 남부여국의 승리로 끝났고, 아카사 연합 왕국의 잔존세력은 신설 산악 지대로 밀려나며 영향력을 크게 상실한다.

통일 이후 센코 천황은 음의 기운을 잘 다스려야 양의 기운과 평형을 이룬다는 음양론에 근거해 "달이 떠오르는 곳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의 "월본"으로 국명을 변경한다. 이렇게 남북이 통일되고 국명이 월본으로 확립된 8세기부터 도요하시 막부가 개창되는 12세기까지의 시기를 남해 시대라고 칭한다. 센코 천황은 에조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부 유화적인 호족들의 토착 권력을 인정하며 지방 관리로 임명하였고 도번 및 신설 지방의 개척을 전담케 하는 등 화합 정책에 나섰다. 또한 불교 및 여류 문학의 발전으로 문화적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새롭게 획득한 영토인 중부 및 도번 지방의 개간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호족과 부농들이 자신들이 개간한 농지를 사유화하고 이를 지키려고 스스로 무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무사 계층이 되었다. 처음에는 지방 호족들을 위해 움직이던 무사들은 점차 실력을 인정받아 정계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내려온 화족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도요하시·후사 막부

정강성.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청해촌

1167년 젠카이 천황의 붕어 이후 월본은 후계자 선정을 두고 혼란에 빠졌다. 젠카이 천황은 6명의 부인 사이에서 13명이나 되는 아들을 낳았지만 후계자 자리를 확고하게 정해두지 않은 채 급사하였기에 후계자 선정을 두고 황자간 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은 권력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각지에서 강력한 세력을 갖춰 무력 집단으로 급부상한 무사 계층의 힘을 빌렸고, 결국 서로 각기 다른 황자를 지지하는 무사 계층간 내란을 치르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초래하게 된다. 이를 황자의 난이라 일컫는다.

황자의 난은 약 20여년간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호겐 황자를 지지하는 야마노 무사가문과 헤이지 황자를 지지하는 미모토 무사가문이 최종 양대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1184년 두 세력이 격돌한 겐페이 전쟁에서 미모토 무사가문이 대승을 거두며 우위를 점했고, 이듬해인 1185년에는 야마노 무사가문의 수장인 야마노 겐준이 처형당하고 호겐 황자가 포로로 사로잡히며 황자의 난은 헤이지 황자와 미모토 무사가문의 승리로 종식된다. 이후 헤이지 황자는 정식으로 헤이지 천황으로 즉위하였으나 자신을 지지한 미모토 무사가문의 공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미 무사 계층이 월본의 무력집단으로 부상하였기에 미모토 무사가문에게 영향력을 내주게 된다. 1192년 미모토 무사가문의 수장인 미모토 나가토는 정식으로 대장군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현재의 도요하시 지역에 막부를 세워 도요하시 막부를 개창하였다. 이후 무사 계층이 정치를 하는 체제인 막부는 6세기 반동안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야마노 무사가문을 섬멸하고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진 미모토 무사가문은 1192년 도요하시에 도요하시 막부를 만들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나, 미모토 나가토 사후 자손들의 대가 끊기면서 미모노 나가토가 창시한 도요하시 막부는 외척인 마에 가문의 대권 정치를 통해 명맥을 이어나갔으며 이 시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월본 불교의 여러 종파가 발생하였다. 마에 가문의 대권 정치 체제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월본 정벌을 막아냄으로써 크게 고양되었으나, 얼마 못 가 포상 문제로 체제가 요동치다가 지방 무사 세력의 통제에 실패하여 결국 지지 기반을 상실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1333년 신페이 천황은 미모토 무사가문의 후손이라고 주장해 오며 대권 정부를 배신한 겐이치 후지모토와 함께 도요하시를 공격하여 도요하시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어 천황 중심의 전제 정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신페이 천황에 불만을 품은 겐이치 후지모토는 1336년 7월 신페이 천황을 몰아내고 유폐한 뒤 반대파인 모쇼 천황을 앞세워 권력을 장악한다. 이후 모쇼 천황으로부터 대장군 직위를 하사받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4세기 중엽 식목 17조를 제정하고, 가와시 교외의 후사에 대장군의 저택을 두어 후사 막부가 시작되었다. 후사 막부는 3대 대장군 겐이치 구로마치 대에 이르러 명이 수립되자 명에 조공과 사신을 보내 교류를 맺고 군신관계를 성립해 인정을 받으며 여엇한 동아시아의 주류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무역이 성행하면서 후사 문화를 이룩하였다.

1413년 네덜란드와 스페인 상인들의 배가 주곤 마군시 지역에 상륙하면서 겐이치 구로마치는 서양상인과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이후 해안에 위치한 요새화된 택지를 조성해주는데 이것이 바로 청해촌(淸海村)이다. 후사 막부는 서양 열강들과 교류하며 각 부성의 특산품을 금품이나 신무기를 받고 팔았으며, 선장에게 1년에 1번 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결과 후사 막부는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여 개혁을 이뤄내고 상업의 발전도 이뤄냈다. 겐이치 구로마치 이후 4대 대장군이 된 겐이치 다카마치는 중국-고려와 서양 세력을 잇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월본을 아시아 지역의 해양 허브국가로 발전시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의 교류도 번성했다. 당시 중계무역으로 뻗어나가는 월본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텐카이성 만국진량의 종(1528년)에 적힌 명문이 있다.

후사 막부는 14세기 말부터 각 주에 파견되어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직책인 사군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초기에는 관할 주의 조세만을 관여하였으나 점차 교역에 대해서도 범위를 확장했다. 본래 교역은 대장군만의 권한이였으나 각 부성의 사군들이 교역에 관할하기 시작하였고, 무기까지 각자 암암리에 거래하기까지 이르렀다. 일부 부성은 서양세력을 등에 업고 신무기를 수입한 뒤 대장군마저도 함부로 간섭하지 못하는 세력을 확보하게 된다.그러나 해안선 특히 무역항이 발달한 지역은 부강했던 반면 내륙산간 지역은 쇠약해져 격차가 생기기도 했다. 각 부성은 부성내에서 최고권력인 사군이 지배적인 권력을 확보하였고 사군의 혈족은 귀족처럼 여겨졌다. 결국 4대 대장군 겐이치 다카마치 사망 이후, 성장한 사군들이 차기 대장군 계승 후보들을 앞세워 암투를 벌이면서 막부의 체제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1567년에 발발한 청양의 난과 더불어 월본은 각 지방의 사군들이 난립하여 사군시대로 돌입하였다.

16세기 말 이후 각지에 할거하는 사군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사군시대가 들어서며 고대 귀족은 몰락하여 막부의 권력이 쇠퇴한다. 이후 명맥만 잇던 후사 막부는 1573년 키노시타 유이치가 최종적으로 막부를 정식 폐지하며 막을 내린다. 16세기 중엽에는 기독교와 총이 전해졌는데, 기독교는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포교로 침투되었고, 총은 사군들의 전술·축성법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16세기 후반부터 두각을 드러난 여러 주요 사군들이 크게 세력을 불려 경쟁하였으나, 결국 와가사 사카이 지역을 근거지로 하던 키노시타 유이치가 전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지배체제가 탄생함으로써 사군시대는 막을 내린다. 1585년 최종적으로 도유를 근거지로 하는 에도가와 가문을 복속시켜 월본을 통일한 키노시타 유이치는 반대파 사군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명나라와 인도를 지배하겠다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고려 침공을 계획하나, 조세권과 무역권을 박탈한 것에 대해 반발한 일부 사군들의 저항과 고려 침공에 반대하는 친고려 도래인 출신 유력 가문들의 압박으로 인해 국내 정치 불안이 심화됨과 동시에 고려 침공 계획도 미뤄진다. 결국 1598년 키노시타 유이치가 사망함으로써 고려 침공 계획은 취소된다.

도유 막부

1598년 이후 월본에서는 키노시타 유이치 정권의 핵심 세력이었던 문관 계층과 지방의 유력한 사군들이 모인 사군 세력이 각각 서군과 동군이 되어 후계 권력 장악을 두고 크게 다투기 시작했다. 이들은 1600년 도고로에서 격돌하였고, 결국 에도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한 동군이 승리하였다. 최후의 패자로서 권력을 잡은 에도가와 가문은 서군에 가담한 사군들을 처벌하고 통일국가를 재건하여, 1603년에는 대장군직에 올라 도유 막부를 개창한다. 또 1614년에서 1615년 사이에 걸친 와가사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키노시타 일족을 비롯한 잠재적 적대 세력을 섬멸하고 에도가와 가문의 통치 체제를 확립시킨다.

도유 막부는 막부체제 아래 사농공상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을 행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평화의 지속은 교통·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의 대두,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을 촉진시켰고, 도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화정기의 문화를 번성케 했다. 에도카와 하츠키와 에도가와 사와키가 20년에 걸쳐 안정시킨 막부를 이어받은 3대 대장군 에도가와 이에키는 중신들에게 유교 사상을 철저히 연구할 것을 지시했고, 한편으로 에도카와 호에키 등은 대월본사와 같은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문치를 지향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5대 대장군 에도가와 이로치대에 도유 막부는 하로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경제의 실권을 쥔 도시민의 힘은 한편으론 무사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농민의 궁핍화와 거듭되는 재해는 농민폭동을 빈발하게 하여 막부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심각한 낭비와 더불어 1657년 발생한 메이텐 대화재 이후 하로 호황으로 쌓인 탄탄한 재정은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은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새로 화폐를 주조하여 그 차익으로 재정을 충당하였지만 이로 인한 화폐 가치의 저하와 함께 급등한 물가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뒤를 이은 에도가와 메이키는 하로 화폐 대신 양질의 새로운 화폐인 마로 화폐를 주조하고 금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마로 신령을 발표, 나가사키 등의 무역항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 선박 수와 무역액을 크게 제한·삭감하는 등 하로 호황 직후에 일어난 경제적 동요를 막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하로 호황을 지나면서 견고했던 막부 체제는 점차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로 화폐를 대신할 화폐가 주조된 이후 도유 막부는 몇대에 걸쳐 계속 화폐의 질과 주조량을 변화시켜가면서 재정을 보충하고자 했고 직할령의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재정난 속에서 제8대 대장군이 된 에도가와 요시키는 하츠키 시대의 정치 제도를 바탕으로 교모 개혁을 단행하였고, 제9대 대장군 에도가와 시게치 대에는 동로 가문을 중심으로 하여 재정 회복을 꾀하였지만 결국 당대에 일어난 기근과 같은 자연 재해로 인하여 실패, 결국 실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지배계층 등은 이에 대한 책임을 동로 가문에게 물어 실각시켰다.

19세기 중기 이후는 구미 열강이 동양으로 진출하여 월본에게 개국을 요구했고, 특히 1836년 미국은 에드먼드 로버츠를 특사로 파견하여 강압적인 개항을 요구한다. 도유 막부는 미국의 개항 요구를 거절했지만 1840년 흑선내항이라 불리는 미국의 함포외교에 굴복해 개항을 승인하였고 '월미 화친 조약'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막부는 쇄국 체제를 풀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후 반막부파 사군들의 막부에 대한 공격으로 인하여 막부의 권위가 붕괴하기 시작하자 도유 막부는 개혁을 통한 회유를 시도하지만, 개방적이지 못한 정책에 동력을 잃어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이어 하급 무사들의 막부 타도 운동은 민중에게 지지를 얻어 세력을 확장하였고, 막부에 우호적인 고토쿠 천황의 뒤를 이어 반막부 세력에 의해 다이치 천황이 즉위하면서 천황으로부터 관군기를 하사받아 정통성을 확보했으며 스스로 천황에 의한 통치국가를 선언하며 근대적 국가를 발전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 주곤과 난하이 지역을 거점으로 한 반막부파 사군들은 비밀 군사 동맹을 맺은 뒤 와가사를 점령한 뒤 도유로 군사를 보내 포위하였으며, 나락에 빠진 도유 막부는 결국 1849년 다이치 천황에게 권력을 다시 바치는 대정반환을 단행했다.

전월본제국

1865년에 촬영된 도유의 모습

다이치 천황은 다이치 유신을 통해 지방의 영주들의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반환하게 하였고 지방부성들을 폐지함과 동시에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이어 제국헌법을 제정하고 국호를 전월본제국으로 개칭하여 제국 국가를 표방했다. 이후 메리치 개신으로 보통선거권을 부여하였고 정당정치가 실현되었으며 동시에 행정 및 경제 개혁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월본은 급격한 서구화가 이루어졌다. 사회적으로는 부역 제도와 노예 계급을 폐지하고 사법 및 교육 제도를 근대화하는 한편 철도/통신 사업도 추진하였으며 사회의 모든 방면을 개혁하였다. 또한 공장과 조선소도 건립하여 기술적 발전을 도모하였고 서양의 사상이나 철학, 서적 등이 번역되었다.

1870~90년대는 "식민지를 늘리고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자"는 제국주의자들과 "아직 때가 아니며 서양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친서방주의자들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자들은 후에 군부 출신 및 제2제국, 친서방주의자들은 후에 민주주의자 출신 및 월본으로 내려져오며 교전하게 된다. 이후 1890년 제1대 제국의회 총선거에서 친서방주의자들이 승리하여 정국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이들은 적극적인 외교로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야한다고 주장했다. 친서방주의자의 대표주자였던 하주 총리는 적극적인 개방과 서방 세력과의 교류에 나섰고, 이러한 활동은 월본의 국제적 입지를 넓히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월본은 19세기 말 개방을 내세워 서구열강의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면서 근대화를 이룩했고 해적과 서구열강의 간섭에 맞서 군사력도 증대해왔으며, 그 일환으로 무기나 장비를 신식으로 교체하고 서양식으로 편제를 바꾸었다. 1895년에는 월청전쟁에서 승리하며 산암도를 얻어내고 도와왕국을 병합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식민지들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 지원을 하며 외교적 입지가 상승하였다. 또한 이는 동시에 국제적 입지와 국력을 키우는데 일조했다. 한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월본은 풍부한 재정을 축적했고 경제도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후 1929년, 미국의 대공황 영향으로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은 부흥은 종식되었고 경제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1930년대는 암흑의 시대라 불린다. 이후 경기 악화의 영향으로 극단주의가 만연하여 극좌나 극우 세력의 폭동이나 선동도 증가하여 국내 상황도 불안정했다. 새로 총리에 취임한 구해민은 새로운 경제 정책을 제시하는데, 월본판 뉴딜 정책이라 불리는 "아성행계획"이다. 구해민이 말한 선언문 중 "월본을 위해서 내가 먼저(我) 살피면서(省) 가겠다(行)"라는 발언에서 따온 이름이였다. 계획에 따라 월본 곳곳에는 공공시설이 지어졌으며 경제 구제 정책이 실시된다. 이러한 아성행 계획은 효과를 어느정도 보게 되었고 1933년을 기점으로 다시 경기가 살아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아성행 계획은 비판이 많던 정책이였고 장기적으로 시행할수 없던 정책이였으므로 1937년 다시 경기가 악화되고 월본의 경제는 살아날 길이 없어보였다. 더군다나 경기 악화의 영향으로 극단주의가 만연하여 극좌나 극우 세력의 폭동이나 선동도 증가하여 국내 상황도 불안정했다. 또한 제국주의와 극단주의의 팽창이 세계적으로 유행하였기에 외부적으로도 뒤숭숭했던 시기가 바로 1930년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1944년 관서에서 일어난 대월본제국과 월본왕국-미국과의 전투

대공황 이후 "군국주의로 들어서자"는 제국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었고, 군부 역시 자연스럽게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결국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군부가 1937년 3월 13일 쿠데타를 일으킨 3.13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쿠데타로 인하여 구해민 총리가 실각하고 군부에게 거역한 내각 대신 2명이 살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 정계는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매우 막강해져 군부대신의 현역제가 부활하고 총리마저 군부 출신이 임명되는 등 사실상 군부가 내각을 좌우하게 되었다. 이로서 정당내각은 단절되고,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월본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추축국에 가입한다. 이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월본은 이에 가담하고 영프등에게 선전포고하며 동남아를 점령, 식민지화했다. 그러나 전선의 확대로 인해 일반 국민의 부담 및 피로는 점점 늘어갔고 이는 월본 내부에서 반전세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전월령 중화지 내부에서는 독립운동과 독립전쟁이 잇달아 발생했고, 동남아에서도 반군이 등장하였다. 미영프는 월본에게 선전포고 하였으며 이로서 중국, 동남아, 태평양 군도를 배경으로 한 중해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 초기에는 월본제국이 우세하여 태평양의 군도들과 동남아 모든 지역을 통치하기도 하였으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월본에게 패색이 짙어지게 된다.

1942년 말부터 월본은 전쟁에서 점차 밀리기 시작하여 1943년에는 대부분의 태평양 군도 및 동남아 점령지를 상실하였으며, 이후 미군은 산암도에 상륙하여 월본 본토를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결국 황실(소류 천황)은 군부내각을 전원 해임하고 연합국에 항복, 구해민 총리를 임명한다. 구해민 내각은 연합국에 항복했고, 월본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군정부가 설립된다. 일부 군부세력은 이에 불복하고 소류 천황을 북부의 별궁에 감금한채로 북부와 중부에 제2전월본제국(통칭 제2제국)을 세우며 월본 내전이 1943년 발발했지만, 반전세력이 많던 북부와 중부에서는 반발이 심했다. 연합군은 월본에서 군부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마지막 공세를 펼쳤고, 소류 천황도 '만월을 찾아서' 작전을 통하여 무사히 구출된다. 이후 결국 제2제국이 패하면서 월본에서 군부세력은 모두 소멸하였고 동시에 모든 월본의 식민지들은 독립했다.

1941년 미영소간 전후 논의를 위하여 개최된 팔라스 회담에서 미국은 원래 월본에 대하여 연합사령부에 의한 통치를 진행하고 평화적 헌법을 제정하여 민정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천년 이상 정신적 지주로 국가의 중심을 유지하던 천황을 몰아내면 국민들의 반발이 심할 것을 우려해 천황은 월본의 '상징'으로 존속시키고, 대신 국민들의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총리'가 민주적인 통치를 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상징천황제'이다. 이후 월본은 1943년 미국과의 사이드만 회담에서 승인된 상징천황제에 의해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다. 이후 구 제2제국, 월본 정부, 미국이 1945년 9월 10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서 조약을 맺으며(시드니 조약) 월본의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현대

현대 도유 도의 아름다운 야경

제2차 대전 후 혼란 속에서 출범한 월본 정부는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른바 ‘원천의 기적’이라 불리는 1950~6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와 복구 결과 빠르게 일어선 월본은 중공업 중심의 성장전략을 통해 1960년대에 접어들며 세계수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재부상한다.

그러나 성장의 이면에는 냉전 체제의 억압 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1963년 총선에서 좌파 진영이 압승하자, 보수 군부 내 사조직 ‘황국신민회’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문민정권을 무너뜨린다. 이 쿠데타의 주역인 구로다 육군소장은 이후 11년에 걸쳐 권력을 장악하며 절대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구로다 정권 하의 월본은 경제적 성취와 함께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탄압, 군부의 비대한 영향력으로 점차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1969년에는 해공군과 비육사 출신 장교들이 주도한 ‘근황파’가 반기를 들지만 역쿠데타는 실패로 끝나며 군 내부도 더욱 경직된다.

정권 말기였던 1973년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반정부 운동이 확산되었고, 특히 신와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시위는 전국적 항쟁의 불씨가 된다. 이른바 ‘신와 민주항쟁’은 지식인과 학생, 도시노동자까지 결집시키며 권위주의 정권의 위기를 상징했다. 결국 1974년 9월 30일, 첩보부장이자 최측근이던 규이치 미츠오가 구로다를 저격, 암살하면서 정권은 붕괴의 길로 접어든다. 규이치는 동시에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은 현대사에서 ‘9·30 사건’으로 기록되며, 권위주의 통치의 결정적 종언을 상징한다.

구로다의 죽음 이후 짧은 기간 동안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일어난다. ‘도유의 봄’이라 불린 이 시기에는 언론 자유와 시민사회의 활력이 되살아났으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12월 주조기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가 과격해지자 계엄령 발령을 앞둔 군부 내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모시 방첩대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모시 방첩대장 "유혈진압을 막기 위해 나섰다"고 주장하며 민정이양을 할 것 처럼 약속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기만책이었고 오히려 군정이 다시 강화되며 모시 정권이 시작되었다.

모시 정권은 질서 회복과 경제 발전 지속을 표방했으나, 실상은 또 다른 군사 정권의 시작이었다. 신설지방과 도유의 여러 대학에서 벌어진 시위는 1975년부터 다시 강경 진압되었고, 1976년의 세이와학원 사건에서는 의문사로 촉발된 학생운동이 유혈 진압되며 사회 전반의 분노를 자극했다.

1978년에는 WAL 836편이 적군파에 의해 납치·폭파되는 참사가 발생한다. 테러와 군정의 무능한 대응은 월본 사회를 다시 흔들었고, 결국 1979년 초 수도권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항쟁이 발생한다. 이 항쟁은 도유과기대 점거, 유명 교수들의 민주화 선언, 지식인과 언론인의 연대 등으로 번지며 전국화된다.

1979년 3월 1일, 정권을 지탱하던 군 내부에서 대대적인 이탈이 발생한다.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하던 신와 지역의 일부 사단이 도리어 시위대에 동조하며 와가사 회군이 일어나자, 모시 정권은 군의 통제를 잃고 만다. 3월 8일에는 세이카 천황이 직접 나서 전군에 복귀 명령을 내리며 사실상 민주 항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한다. 결국 3월 9일, 모시 총리는 하야를 선언하고 군정은 공식적으로 붕괴된다. 이 사건은 ‘3·09 선언’으로 불리며, 현대 월본 민주주의의 기점으로 평가된다.

이후 1980년대 월본은 민주 헌정의 복원과 함께 경제 호황을 맞이한다. 정치적 개방, 시민사회의 성장, 그리고 기술 기반 산업화가 겹치며 월본은 현대사상 가장 안정되고 번영한 시기를 구가한다. 이른바 ‘세이카 호황’이다. 민주화와 경제성장이 동시에 이뤄진 이 시기는 월본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1991년 헤이와 천황의 즉위와 함께 시작 된 경제 불황은 월본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장기화되며 현재까지도 이어져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게 된다. 한편 사회적으로도 1990년대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994년 말부터 1995년 초까지 구창모 게이트라 불린 대규모 정치 비리 사건이 정국을 강타했고, 뒤이은 혁명공산당의 내란 시도는 또 한 번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2013년에는 급진좌파 세력인 ‘월본사회주의연방’의 내란 음모가 발각되면서 국민적 충격을 안겼고, 안보와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치열한 사회적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헤이와 시기 월본은 민주주의의 완전한 정착과 더불어 세대 간 갈등, 정치 양극화, 저성장 시대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문화 산업의 약진, 국제적 위상 강화, 평화헌법을 둘러싼 시민논쟁 등 월본 특유의 정치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이기도 했다.

2024년, 레이카 천황이 즉위하면서 월본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레이카(令和)’는 명령과 조화를 상징하는 말로, 이 시대는 성장 이후의 사회를 어떻게 조화롭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고민을 담고 있다.

전자정부사

군정 이후 시기
구창모 총리

군정 종식 이후 처음으로 이뤄진 선거에서는 정당 주자의 표 분산으로 무소속으로 출마한 나호진이 당선된다. 혼란기를 막 벗어나 정부의 안정화에 노력을 쏟았으며 기업 경제를 부흥하기 위한 여러가지 개방책도 선보였다. 그러나 검찰의 무리한 기업조사와 폐쇄조치로 인해 군정이 다시 열리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나호진 총리는 국민 여론의 압박에 돌연 사퇴를 선언하며 조기 선거가 치뤄지게 된다. 당시로서는 군정의 책임론이 부각되었던 자민당이었으나 자민당 외 세력이 안정적이지 않아 되려 자민당의 지지층이 결집이 큰 변수가 되었다. 두번째 치뤄진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을 확보하며 구창모 정부가 등장하며 큰 변화를 일으킨다. 경제 개발 대책과 확장적 외교성과로 급성장을 이루었다. 월본 국민들은 이 시대[1]소류 로망으로 부르며 가장 풍요롭던 시기로 평가하곤 한다. 구창모 총리는 연임에 성공했지만 건강상 문제로 사임한다. 후임으로는 모창민 총리가 집권하는데 마찬가지로 확장 외교를 통해 다양한 플랫폼의 국가와 수교를 맺고 동맹 관계를 넓히는 등 외교 부문에서는 역대 정부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수교만 맺어지고 후속 교류가 없다시피 하고, 경제 부문에서도 '모창민 노믹스'와 기업인 간담회 등 진행은 좋았으나 역시 실행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갈렸다. 모창민 총리는 월본에서의 업적을 가지고 UVN의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월본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후임으로 육성준이 지명된다. 이를 야당에서 구창모-모창민-육성준으로 이어지는 세습 정치를 비판했다. 특히 황실과 독대자리에서 영구집권이나 특정 기업 국영화, 특정 야당을 해산하겠다는 등의 내용이 폭로되어 지지율이 큰폭으로 하락했다. 굳건하던 자민당에게 위기가 불어닥친 셈인데 육성준 총리는 타개책으로 돌연 가상국가를 접는다고 선언, 업무를 중단하는 바람에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기도 한다. 자민당에서는 국정공백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성하를 권한대행에 임명했다. 짧은 기간동안에 일본 공상국가계와 교류를 체결하고 가상국제연합과 일본 가공국가연합(JAINA)와의 정상회담을 하기도 하였다. 자민당의 지속적인 악재속에서 야권에서 떠오르는 정치스타로 민주우가 급부상한다. 자민당의 지지를 이끌어 거국일치내각을 구성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그러나 혁명공산당 내란사건이 발생하며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자민당 탈당파는 월본태보당을 창당하여 중도기반의 제3세력을 구축한다. 하재성하은우 총리를 필두로한 새로운 내각은 여러 실험적 시도를 통해서 국정운영의 효율화와 내수 경제 활성화 대책을 꾸렸지만 미흡한 행정력과 실패한 정책으로 인해 정부가 셧다운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황실은 직접 내각에 관여하는 제정복고를 제안했지만 국회에서 불화가 일어나 철회했다. 각개 정계스캔들로 정치인들이 구설수에 올라 은퇴하면서 국회가 개회되지 못하고 정체되는 현상이 발생된다. 특별 대책으로 정계를 완전 개방하여 여러 계층의 정치인들을 수용하고자 했고 긴 시간동안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한다. 정계가 암흑에 갖히면서 내수 경제도 침체되었고 후술할 가상국제연합 탈퇴도 진행하면서 결국 활동 인구가 줄어들어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 여파로 몇년간 대침체기를 맞게된다. 월본에서는 이를 잃어버린 5년이라고 부른다. 정계는 암흑 속을 헤매다 모창민과 라버마르코 등 신흥 세력이 재등장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모창민 총리는 단 하루만에 무언가 결심한 듯 모창민 독트린을 선언하며 사퇴하였고, 모창민 독트린으로 월본은 가상국제연합에서 탈퇴한다.

전영록 총리

국련 탈퇴 이후 월본은 연합이라는 구심점 없이 자립하게 된다. 국련 탈퇴 세력이 만든 한국가상커뮤니티에 가맹하기도 했으나 노선이 달라 나중에 가맹을 철회했다. 국련 탈퇴 이후에도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한다. 전영록 총리의 등장으로 안정적인 국정운영과 높은 지지율로 또 다른 '제2의 소류 로망'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편 새롭게 등장한 월본유신회는 체계적인 법치 문화를 보여주며 성문화된 정치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유신회의 돌풍에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무장한 자민당도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급진적 반유신회 세력이 난을 일으키며 스캔들로 이어지기도 한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황실이 과도하게 개입했는데 이를 두고 유신회 세력은 황실에 불편한 입장을 내보인다. 이브위키의 개설과 맞물려 유신회는 월본에서 철수 수순을 밟았고 다시 전영록 내각이 출범하며 안정기를 되찾았다. 정치 다변화를 위해 육성준 전총리가 복권된데 이어 다카기 그네 총리가 집권한 이래로 오랜만에 정치가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창작이 아닌 실존 정당의 현생 이슈를 그대로 담습하고 있어 직결 해산조치한 것에 반발하여 황실 폐지와 국가전복을 기도했다가 월본 정치가 전부 몰락했다. 이 과정에서 최재명 합참은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점거, 해산하고 총리와 정치인들을 가택 연금시켜 논란이 일었다. 헌정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 듯 전자정부 경비사령부에서 진압해 수습했다. 다시 민주적 선거가 개최됨에 따라 마츠다 하루토라 내각이 들어서 안정세를 굳히며 장기 집권하는데 성공했으나 황실과 자민당 세력, 마츠다하루토라 간의 불안정한 기류로 인해 결국 마츠다 총리는 입헌민정회(구 유신회)와 지하에서 결탁하면서 월본 테러를 감행한다. 테러 이후 후미히라 겐페이 총리가 재건과 수습을 하면서 황폐화된 월본의 내수 상황을 타개하고자 가국련과의 정상회담 끝에 가상국제연합에 재가입하였다.

자연환경

기후와 지형

인공위성에서 본 월본

월본은 지각판의 섭입으로 만들어진 열도 지형을 갖고 있다. 대부분 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은 산들이 여럿 있다. 전체적으로 한반도 보다는 따뜻하며, 후안도를 비롯해 동북부 산지는 설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온이 낮다. 후안도는 늦가을부터 봄까지 많은 눈이 내린다. 반면 산칸도는 더운 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다. 중앙 산간지역은 비교적 고원지대라 여름엔 덥고 강수량이 낮지만 산맥을 경계로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 펼쳐져 있다. 남부 해안은 해풍으로 인해 여름에 매우 습하고 더운 날씨가, 겨울에는 온난・건조하다. 주변국보다 태풍의 영향이 많으며 화산과 지진의 위험성도 높은 편이다. 최근에 발생한 2027년 수사 지진은 대표적으로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한 월본의 상황을 보여주는 재해 사례라고 손꼽힌다. 월본 열도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맥으로 이루어진 섬나라이기 때문에 좁은 면적에 비해 다양한 기후 변화가 관측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남북의 차이, 해안과 내해의 차이가 존재한다. 또 다우(多雨)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남부지방에는 연간 4,000mm를 넘는 강수량도 기록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는 6~8월의 장마철이다. 산칸도와 남양군도는 기후적 특성 때문에 태풍의 피해가 자주 일어난다.

지리

행정 구역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월본/지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월본/지방
월본의 지방

수도

도유수도시 로고.png 도유수도시
Toryu Metropolitan Government
도유수도시 이미지.png

월본의 수도는 '도유수도시'이다. 현재의 도유수도시는 19세기에 들어서 월본제국의 천도 이래로 근대화를 거쳐 현대적 도시로 변모하였다. 그 이전의 시기에는 열도의 동쪽 변방으로서 원주민에 의해 군락이 형성되어 오다가 삼주성의 영토확장으로 편입되었고 삼주의 동남부가 삼도군으로 분리되며 무사단이 통치하게 된다. 타마의 동쪽에 있어 '도번'(東藩)라고 불렸다가 다이지유신 이후 '도유'로 개칭되었다.

주요 도시

월본의 주요도시
후안/아사모토 고산부진사시조양시
산주/도후 선전부마카이시만칸특별행정구온주시
수도권 도유수도시소보하나시인산시후에하라시모리본조시산전시미카사시수안시
중부 미소노부중안시성정시도고시
신와 와가사부타마부진후시관몬시
서안/다난 히바나부토요하시시쿠로시후페이시토모루시카사시
주곤/남도 사이가타부도쿠수마시가나타시다카수마시다이산시산칸특별행정구

후안도

눈이 온 고산시 모습

관본도에 이어 두번째로 큰 섬인 후안도는 월본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대체적으로 원형 모양이기 때문에 그 내륙의 면적이 매우 넓다 라고 할 수 있다. 냉대 기후이므로 겨울에 매우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며 여름에는 장마가 없다. 소수의 원주민의 정착으로 군락이 형성되었고 화산섬 답게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발달해 있다. 중세까지 에조성이 통치하다가 토요하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월본의 영향권에 들었다. 북방으로의 진출로가 되어 월본군의 병참기지가 곳곳에 들어섰고 대미, 대유라시아에 대응하기 좋은 지리적 위치이다.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곳이 격전지가 되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민주화시기에는 군부에 의해 봉쇄되기도 하면서 많은 차별을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정치 성향은 진보세가 강하다. 민주화 이후에는 공업 대신 관광업과 중개무역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산업을 여는 곳이 되었다.

도후 지방

설산 온천 마을

관본도의 동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설양산맥이 줄기로 뻗어있는데 눈이 많이 오는 고지대여서 설상 스포츠가 발달해 있다. 중세시대 정치 중심지였던 신와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기 때문에 지역개발이 지체되었다가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여러 산업 기반이 잘 갖추어져 있다. 산간 지역에는 온천과 계곡 등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서안, 도유 수도권에 비해서 동북지역은 산지가 많고 개발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뒤늦게 발달했다. 따라서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 만칸선전부 같은 대도시는 이주민들과 다양한 인종의 정착민들이 생활권을 형성해 있어 대표적인 다문화적 지방이라고 할 수 있다. 동쪽 연안에 붙어 있는 마카이섬은 한동안 원주민에 의해 통치되다가 중세시대에 정복했고 그후로 도시화 되지 않고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시 정권 시기에 외국인 카지노 유치를 위해 국제관광도시를 조성하면서 다양한 문제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산주 지방

초호산 만년설과 전원 마을

관본도 북쪽 어깨에 동해와 접해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중부 지방의 북부 지역과 생활권을 같이하고 있다. 도후 지방과는 히다산맥으로 구분하며 그 줄기가 중남부를 가로지른다. 산악지역의 끝판왕 답게 월본 알프스 등 산악 경관과 스키장, 설산 관광지가 많고 탄광 유적도 주로 분포되어 있다. 이 지역의 최대도시인 온주시와 중부 지방 북부 지역으로는 비교적 사람이 살기 좋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관본도 북부 해안 중에서는 가장 넓은 평야라고 할 수 있다. 산주지방 역시 온주평야를 제외하면 산지가 많고 도시화되지 않아서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항공방위군 사관학교가 위치해 있고 월본항공의 전폭적인 투자로 항공 테마파크와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세계대전 때 이곳이 항공기를 제작하는 군수창으로 개발되어 관련 유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도반・수도권

도유수도시 도심의 모습

도유 수도권(東流都圏, Toryu Metropolitan Area)은 월본의 수도인 도유를 중심으로 형성된 광역 도시권으로, 월본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며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지로서, 국가 전체 경제의 약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3,7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권 중 하나로 꼽힌다. 도유는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이며, 국제적인 비즈니스, 패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허브로 알려져 있다. 또한 월본의 교통 네트워크의 중심지로, 도유 지하철, WR선, 고속도로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발달해 있으며, 주요 국제공항인 산쿄국제공항인산국제공항도 이 지역 내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또한 역사적, 문화적 명소가 풍부하며, 고대 월본의 문화와 현대적인 월본의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시부사, 신관야, 신수, 에비나, 하라쿠초 등이 있으며, 월본의 전통적인 문화와 현대적인 도시 생활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국제적으로 중요한 산업 및 기술 중심지로, 많은 글로벌 기업과 스타트업들이 이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첨단 기술 분야에서도 혁신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월본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중부지방

알프스 마을

중부 지방은 지리적으로 다양성이 풍부한 지역으로, 해안선, 산맥, 평야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북쪽 내륙에는 월본 알프스 산맥이 있고, 남쪽으로는 태평양에 접해 있다. 특히 소가군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키 리조트와 자연 경관을 자랑하며, 도유와가사 사이에 위치해 있어 교통적으로 중요한 연결 지점이다. 월본의 전통 문화와 자연 환경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역사적인 명소들이 많다.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미소노성, 월본 알프스 등이 있다. 또한, 전통적인 일본 마을과 온천 지역들이 많아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명소가 많다. 도유와 와가사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망인 주간선 노선이 통과하고 있다. 또한, 미소노는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도시중 하나이자 월본의 주요 항구 도시로, 물류와 해상 교통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중부 지방은 월본의 자연 환경과 현대 산업이 조화를 이루는 지역이다.

신와지방

와가사 시내의 모습

월본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 지역은 고대에서 중세까지 월본의 수도가 있었던 곳으로, 월본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와 지방은 태평양과 가까운 해안 지역과, 월본 알프스 산맥을 포함하는 내륙적 특성을 지닌다. 이 지역은 풍부한 자연 환경과 함께, 해안선에 위치한 항구 도시와 고원 지역, 평야 등 다양한 지형을 제공한다. 와가사 지역은 월본 제2의 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와가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업 도시로, 많은 대기업 본사와 산업이 집중되어 있다. 또한, 신와 지역은 중세시대부터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로서, 고속철도, 공항, 항구 등 주요 교통망이 잘 발달되어 있다. 진후와 타마도 산업 및 관광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통적인 산업뿐만 아니라 첨단 산업도 발달해 있으며, 타마는 월본의 전통 산업과 고유한 공예품을, 와가사는 현대적인 상업과 서비스 산업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또한, 농업, 특히 쌀과 채소, 과일의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타마는 고전적인 월본 문화의 상징으로, 전통적인 월본 정원, 신사, 절, 고대 건축물이 많다. 월본의 전통적인 음악, 춤, 연극 등 문화 예술의 중요한 발상지로, 월본의 대표적인 전통 공연 예술인 후지와라 극단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서안지방

히바나성 모습

서안지방은 월본의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지역이며, 자연경관과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이 지역은 월본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고, 풍부한 자연 환경과 고유한 전통을 보유하고 있다. 월본 본토의 서쪽 끝에 위치하며, 북쪽은 동해에, 남쪽은 세토 내해(瀬戸内海)에 접해 있다. 이 지역은 세토 내해의 아름다운 해안선과 산악 지대가 어우러져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토 내해는 월본의 주요 수로로서, 많은 섬들과 아름다운 해양 경관을 제공하며, 해양 교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거 월본의 산업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나, 현재는 주로 농업과 어업, 관광 산업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히바나와 쿠로는 산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중공업과 제조업이 주요 경제 활동으로 자리잡고 있다. 히바나는 자동차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쿠로는 석유화학 산업과 철강 산업 관련된 시설들이 위치해 있다. 농업 부문에서는 히바나의 미즈호 쌀과 고세의 복숭아가 유명하다. 어업 또한 중요한 산업으로, 세토 내해와 동해에서 다양한 해산물이 생산된다. 고대 월본의 문화와 풍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쿠로는 세계적인 평화의 상징으로, 쿠로 평화 기념 공원이 있는 이곳은 전 세계에서 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인다. 다난지방의 센간과 함께 월본의 전통적인 정원과 섬 경관 등 자연 문화유산을 보유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주곤과 다난 지방

센간시 국립해상공원

기후는 온난하며 활화산인 아소산(阿蘇山)과 벳푸(別府)의 온천으로 유명하다. 역사적으로는 월본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여겨지며, 남북국 시대부터 중국 및 한반도와 활발한 교류를 이어왔다. 도번막부 시대에는 다카수마가 서양과의 무역 창구 역할을 했다. 주곤은 화산 활동이 활발한 지역으로, 월본 최대의 칼데라 화산인 아소산(阿蘇山)이 있으며, 온천이 풍부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벳푸(別府)와 유후인(由布院) 같은 온천지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또한,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다난은 월본의 주요 4개 섬 중 가장 작은 섬이다. 지형적으로 험준한 산지가 많아 개발이 비교적 늦었지만,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광하 산맥이 섬 중앙을 가로지르며, 섬 남쪽은 월본에서 가장 많은 강우량을 기록하는 지역 중 하나다.


인문 환경

인구

민족

재난 안전

경찰조직・치안

110

월본의 경찰은 경찰법에 따라 조직된다. 크게 범죄 예방과 치안을 유지하는 '행정경찰'과 범죄 등을 수사하는 '사법경찰'로 구분하며 행정경찰내에는 보안 관련 문제를 담당하는 '공안경찰'과 특별상황에 대비하는 '경비경찰'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월본 경찰은 육상경비대가 전신이다. 전후 국내 치안수요를 대비하여 경비대가 창설되었고 육상과 해상부분, 그리고 소방대로 나뉘어 있다가 각각 독립외청으로 분리되었다. 구로다 암살사건을 계기로 '특별고등경찰'이 창설되었고 반정부인사들을 비롯해서 정당·사회단체·사상·정치범죄를 담당했다. 그러나 정권의 입맛대로 독재와 억압의 수단으로 악용되었기에 특별고등경찰을 해체하여 기동경찰대로 흡수 개편된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폭력단과 사이비 종교단체 및 극우파와 적군파 같은 공산주의 무장조직이 기승을 부리면서 공안 경찰이 창설된다. 경찰기관 외에도 특수 목적의 경찰력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사법경찰'도 존재한다.

소방조직・방재

119

월본의 소방청은 소방조직법에 근거한다. 구조, 구급, 방재, 경방으로 구성된다. 경방은 화재진압, 화재조사, 소화관리 등 업무를 수행하며 초동 구조활동이나 비긴급구조 활동도 담당한다. 구조대는 일반구조, 조난구조, 교통사고 구조 등 전문장비를 동원해 구조활동을 벌이며 환경에 따라 산악, 수난, 화학구조대가 설치되어있는 지자체도 있다. 구급은 응급환자 이송과 긴급처치를 담당하며 사고로 인한 환자 이송과 질병으로 인한 이송, 경찰 지원요청 시 출동 등이 모두 포함된다. 방재는 재난대피시설 점검, 건축물 소방점검, 위험물 운송 관리 등 업무를 수행한다. 전국의 소방 정책을 총할하는 정부기관으로 월본 소방청이 있으며 지방별 소방청, 소방청 소속으로 소방서가 편제되어있다. 월본의 황거인 황궁의 소방업무는 도번 소방청이 아닌 황궁경찰에서 담당한다.

보건

월본의 보건 시스템은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와 국민 건강 보험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월본 정부는 국민의 건강 증진과 질병 예방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며, 높은 평균 수명과 낮은 유아 사망률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의료 접근성이 뛰어나며, 의료 기술 및 연구 개발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의료 체계

월본의 의료 체계는 공공 및 민간 의료 기관이 함께 운영되며, 전국적으로 균등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국민건강보험(NHI, National Health Insurance): 모든 국민이 의료 보험에 가입하도록 의무화되어 있으며, 개인의 소득에 따라 보험료가 결정된다. 의료비의 상당 부분을 정부가 지원하며, 본인 부담금은 일반적으로 30% 수준이다.
  • 사회보험제도: 고용주와 근로자가 함께 부담하는 건강보험 제도가 존재하며, 기업에 소속된 사람들은 직장 건강보험(Employees' Health Insurance)에 가입한다. 기업 규모에 따라 보험 종류가 다르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각기 다른 보험 시스템을 적용받는다.
  • 의료비 보조: 정부는 고령자, 저소득층, 장애인을 대상으로 의료비 지원을 제공한다. 특히, 75세 이상 고령자는 의료비 부담이 줄어드는 고령자 의료제도(Later-stage Elderly Medical Care System)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 응급 의료 시스템: 월본은 응급 의료 서비스도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24시간 운영되는 응급 병원이 전국적으로 분포해 있다. 또한, 응급 헬리콥터(Doctor-Heli) 시스템이 도입되어, 외딴 지역에서도 신속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공중보건 정책

월본 정부는 예방의학과 공중보건을 중시하며, 다양한 건강 증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는 지방자치단체 및 의료 기관과 협력하여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 예방 접종: 영유아 및 성인을 대상으로 한 예방 접종 프로그램이 정기적으로 시행된다. 특히, 독감, B형 간염, 일본뇌염, HPV 예방 백신 등이 국가 주도로 보급된다.
  • 건강검진: 일정 연령 이상의 국민에게 정기 건강검진을 제공하여 질병 예방 및 조기 발견을 촉진한다. 직장인 및 자영업자는 정기 건강검진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며, 정부는 국민건강보험을 통해 검진 비용을 보조한다.
  • 감염병 관리: 감염병 발생 시 신속한 대응 체계를 구축하고, 백신 접종 및 방역 조치를 강화한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월본은 강력한 방역 조치를 시행하며, 국민들에게 철저한 위생 관리를 권장하였다.
  • 환경 보건 정책: 대기 오염, 수질 오염 등 환경 요인이 국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규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특히 대기 중 미세먼지와 관련된 정책이 강화되고 있다.

주요 보건 문제

월본은 선진국형 보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 고령화 문제: 평균 수명이 증가하면서 노인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의료비 부담이 커지고 있다. 노인 대상 의료 및 복지 정책을 강화하고 있으며, 요양 시설 및 가정 간호 서비스도 확대되고 있다.
  • 생활 습관병: 비만, 당뇨, 고혈압 등 생활 습관과 관련된 질병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식습관 개선, 운동 장려, 금연 캠페인 등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 정신 건강: 스트레스와 우울증 등의 정신 건강 문제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월본 정부는 정신 건강 서비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정신과 상담 및 치료를 보다 쉽게 받을 수 있도록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 출산율 감소: 출산율 저하로 인해 장기적으로 노동력 부족 및 인구 감소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육아 지원 정책을 확대하고, 출산 장려금을 지급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언어

종교

월본의 종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다양한 신앙이 공존하는 특징을 가진다. 월본의 종교 문화는 불교와 신토(神道)가 주류를 이루며, 기독교와 기타 종교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또한, 월본 국민들은 종교를 특정 신앙의 엄격한 교리보다는 생활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1. 신토(神道)
신토는 월본 고유의 전통 종교로, 자연 숭배와 조상 신앙을 기반으로 한다. 신토는 특정한 교리나 경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신사(神社)에서 다양한 제례와 축제가 열린다. 월본 전역에 수많은 신사가 있으며, 대표적인 신사로는 이세 신궁, 메이지 신궁 등이 있다. 마쓰리(祭り)라고 불리는 신토 축제는 지역별로 다양하게 개최되며, 신을 기리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한다. 신토는 가정 내 조상을 기리는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며, 불교와 혼합된 형태로 유지되기도 한다.

2. 불교
불교는 6세기경 월본에 전래되었으며, 다양한 종파로 발전하였다. 특히, 선불교(禅宗), 정토종(浄土宗), 천태종(天台宗) 등이 대표적이다. 월본에는 유명한 사찰이 많으며, 타마의 기요미즈데라, 나라의 도다이지 등이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불교는 장례 문화, 철학, 예술, 문학 등 월본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신토와 불교는 오랜 기간 공존하면서 혼합된 신앙 형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많은 사찰에는 신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 신사에는 불교적인 영향이 나타난다.

3. 기독교
기독교는 16세기 서구에서 월본으로 전래되었으나, 에도 시대(17~19세기)에는 금교 정책으로 인해 탄압을 받았다. 현재 월본에서 기독교 신자는 소수(약 1%)이지만, 결혼식 문화나 서구식 교육 기관을 통해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도유, 와가사 등 대도시에 기독교 교회가 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가 모두 존재한다. 교육, 의료, 복지 기관을 통해 월본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해왔다.

4. 기타 종교
월본에는 소규모이지만 이슬람교, 힌두교, 신흥 종교 등이 존재한다. 이슬람교는 주로 외국인 거주자들에 의해 신봉되며, 대도시에 모스크가 있다. 19~20세기에 등장한 창가학회(創価学会), 천리교(天理教), 옴진리교(オウム真理教, 현재 해산) 등의 신흥 종교도 존재하며, 일부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월본의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신앙보다는 문화적, 의례적인 측면에서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결혼식은 기독교식으로,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신년 참배는 신토식으로 진행하는 등 다양한 종교적 요소가 공존한다. 현대 월본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특정 종교에 대한 강한 신앙을 가지지 않으며, 종교를 일상생활 속 문화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일부 종교 단체는 정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며, 특정 정당과 연계되어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교통

도로 교통

난카이고속도 초호분기점

월본의 도로는 우측통행이다. 본토는 남북으로 길어 차량으로 일주하기에는 어려운점이 많으며 주로 도시간 이동이나 중거리 정도의 교통 수요가 있는 편이다. 고속버스의 경우 항공, 철도 보다는 간편하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노선망이 구축되어 있으며 장거리 노선은 화장실 설비가 구비된 침대버스가 운영된다. 월본의 고속도로는 간선노선과 종단선, 접속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7년 중앙고속도로 도유↔타마 구간을 시작으로 타마↔와가사 구간이 차례로 개통되어 본격적인 차량 물류시대가 개막되었다. 그전까지는 일반 도로가 그 역할을 했는데 일반 간선도로 역시 고속도로 못지 않는 시설과 선형을 갖췄다.

철도 교통

항공 교통

월본 월본의 항공사
FSC
월본항공 현성항공
월본항공 현성항공
일반 항공사
동아항공 파일:전월본공수.png
전월본공수
LCC
월백에어 로고.png
월백에어
팬아시아항공.png
팬아시아 항공
스카이큐브 항공
80년대 호황기의 월본항공

월본은 섬 나라인 관계로 여러 섬이나 해외로 가기 위해서는 해상이나 항공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배를 이용한 수단은 그 특성 때문에 발달하지 못했고 항공 수요가 폭발하듯이 늘어났다. 국책 항공사는 월본항공이고, 현성그룹 산하의 현성항공, 전월본공수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대표적인 공항으로는 수도 도유에 위치한 산쿄국제공항(山京国際空港)과 인산국제공항(仁山国際空港)이, 와가사에는 이타미국제공항(伊丹国際空港)이 있다. 대표적 휴양지로 유명한 산칸도산칸국제공항(山巖国際空港)과 산쿄국제공항간 국내선 노선이 가장 수요가 많으며 산칸공항과 후안의 고산국제공항간 국내선 노선이 최장거리이다.

해상 교통

정치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월본/정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내각 행정부

월본 국장.png 월본 역대 내각총리대신
소류 시대
초대
나호진
17年10-11月
제2-3대
구창모
18年2-6月/6-8月
제4대
모창민
18年8-11月
제5대
육성준
18年11月-19年1月
제6대
이성하
19年1-2月
메이우 시대
제6대
이성하
19年1-2月
제7대
민주우
19年2-3月
제8-9대
하재성
19年3-7月/7-9月
제10대
민주우
19年10月-11月
권한대행
정문석
19年12月-20年2月
세이카 시대
제11대
하은우
20年2月-4月
제12대
한성훈
20年4月-5月
제13대
민주우
20年6月-12月
제14대
라버 마르코
21年1月
제15대
모창민
21年1月
제16대
나의재
21年1月
권한대행
구창모
21年1月-2月
제17대
이해수
21年2月-4月
권한대행
이승배
21年4月-5月
제18대
구창모
21年5月-8月
제19대
전영록
21年9月-11月
제20대
하성일
21年12月-22年1月
제21대
Mirai
22年1月-2月
제22대
윤교익
22年2月-3月
권한대행
윤교익
22年3月-3月
제23대
윤교익
22年3月-4月
헤이와 시대
제24대
타츠바나 요쿠온
22年5月-8月
제25대
전영록
22年9月-11月
제26대
육성준
22年11月-23年1月
제27대
다카기 그네
23年1月-23年2月
제28대
마츠다하루토라
23年2月
혁명정부
최재명
23年2月
경비
시키노사토 유이무
23年2月-年6月
제29-31대
마츠다하루토라
23年6月~24年4月
경비
마츠다하루토라
24年4月-7月
제32대
후미히라 겐페이
24年7月~12月
레이카 시대
제32·33대
후미히라 겐페이
24年7月~12月
제34대
아사모토 강치
24年12月~현재
월본국 정부 문장 금색.png
아사모토 강치
《第 34 代》
아사모토 강치1.png
明月 25年10月25日生
出身地:朝陽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월본 내각총리대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월본의 정부 수반이자 천황으로부터 외교와 국정운영권을 임명받아 그 업무를 수행한다. 월본은 입헌군주국이므로 명목상 '신하'의 개념으로 공식명칭은 '내각총리대신'이다. 내각 각부의 상(相, 장관)의 총괄 수장으로서 수상(首相)으로도 칭한다. 2025년 07월 05일 기준으로 현재 내각은 월본사회당아사모토 강치이다.

월본국 수상은 국회의원들 중 국회에서 내각총리대신 선임에 관한 의결에 의해 지명된다. 통상 다수당의 총재(당수)가 지명된다. 수상은 행정권의 수장이자 월본군 방위대의 최고지휘권한을 갖으며 외교와 각의 구성도 권한에 있다. 국회에서 지명으로 선임하지만 국회는 정부수반을 탄핵하는 '수상불신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총리는 국회를 해산할 수 있는 '국회 해산권'이 견제 수단으로서 작동될 수 있다.

다수당의 총재가 수상직을 수행하는 구조상 여론에 크게 뒤집히지 않는 이상 집권여당이 거의 바뀌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자유민주당은 총 7명의 수상 집권기를 가지기도 했다. 월본 정치 구조상 정당 계파마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으며 그에 따라 당락이 결정된다. 또한 중대한 정치 사건이 발생하면 여론이 급격히 기울기도 하고 지지층을 넘는 유입이 정권교체를 하기도 한다.

역대 최장기 임기 수상은 구창모이며, 294일(권한대행 시기 포함시 324일)간 수상직을 지냈다. 그 다음으로는 민주우이며, 269일간 수상직을 지냈다. 3번째는 하재성이며, 189일간 수상직을 지냈다. 연임에 성공한 수상은 구창모, 하재성, 민주우, 모창민, 전영록 총 5인이다.

한때 여론조사 등 항간에 '월본의 전성기'를 묻는 질문이 나오는데 월본에 대해 오래 지켜본 사람들로서는 '구창모' 정권 초기가 압도적이다. 월본 전자정부 개설 초기이므로 제반 시설과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성장 원동력이 되었고 월본의 창작으로 이어지는 신 산업등 볼거리가 넘쳐났던 시기이다. 이른바 호황기를 누렸던 시기이다.

내각부

월본국 정부 문장 금색.png 월본의 국가행정조직
내각부 국무성 법무성 경제성
궁내청 공안위원회
금융청 공정거래위원회
소방청 경찰청
분쟁조정위 보훈청
체신청
검찰청 공안심사위원회
출입국관리청 공안조사청
국세청 통계청
특허청 중소기업청
사회성 국토성 방위성
문화청 스포츠청
근로노동청 질병관리청
의약품청
관광청 기상청
해상보안청
방위장비청 병무청

일반적으로 중앙성청(中央省庁 / Ministries of Wup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줄여서 성청이라고 부른다. 국가조직법상 규정된 '성'과 부속 외청들이 포함된다. 내각총리가 선출해 임명하며 주로 집권 당에서 구성한다. 예외적으로 거국내각이라던가 특수 상황에서는 야당에서도 기용한다. 이 중 내각부는 중요 정책의 기획 및 입안·조정 등 총리가 담당하는 행정 사무를 보조하거나 총리가 직접 내각부에서 담당한다.

외교

월본의 외교 정책은 경제 협력, 안보 동맹, 국제 기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헌법을 기반으로 한 외교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최근에는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점진적인 외교적 역할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월본은 주요 국제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아시아 및 전 세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월본의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축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이다. 1951년 체결된 미월 안보조약을 기반으로, 미군이 월본에 주둔하며 안보를 보장하고 있다. 미국은 월본의 최대 교역국 중 하나이며, 기술·투자·무역에서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두 국가는 G7, UN 등 국제기구에서 협력하며, 자유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월본은 아시아 국가들과 경제 및 외교적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역사적 문제로 인해 일부 국가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 중국 : 월본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나, 동중국해 영유권 문제 및 역사적 갈등으로 인해 외교적 긴장이 존재한다.
  • 한국 : 양국은 경제·문화적으로 협력하고 있지만, 역사 문제(과거사, 독도 영유권)로 인해 갈등이 반복된다.
  • 동남아시아 국가들 : 월본은 ASEAN 국가들과 긴밀한 경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개발 지원 및 인프라 투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국제기구 및 다자 외교

월본은 유엔(UN), G7, G20, WTO, APEC 등 다양한 국제기구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UN의 평화 유지 활동(PKO)에 참여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국제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월본은 파리협정 이행을 위해 탄소중립 정책을 추진하며, 친환경 기술 개발 및 신재생 에너지 확대에 힘쓰고 있다.

안보 및 국방 외교

월본은 평화헌법에 의해 군사력 보유가 제한되지만, 방위군의 역할을 점차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최근 중국, 만주국의 군사적 위협 증가에 대응하여 국방 예산을 증액하고 있으며,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 월본은 미국, 인도, 호주와 함께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쿼드(Quad)'에 참여하고 있다. 또 기술 보호, 반도체 공급망 안정, 사이버 안보 강화 등을 외교 정책의 주요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국회

세계대전 개전중의 국회의사당 모습

월본 국회의사당은 다이치 유신 이후 의회정치를 위해 중기감영을 헐고 3층 벽돌건물로 축조하여 사용했고 현재는 문화재 보존을 위해 비워진 상태로 정비하고 있다. 본관 옆으로 의회당 건물과 의원 회관을 신축하여 대체하고 있다. 1940년대 세계대전 개전 중에는 대본영 전략회의소로 사용되었고 황궁과 지하통로로 연결되어있어 유사시 대피할 수 있다. 여러 차례 폭격에 맞았지만 구조적으로 크게 손실되지 않아 근대 건축물로 보존되고 있다.

패전 이후 연합국 사령부가 점거하여 국회를 해산시켰으며 연합국 회의소로 사용되었으며 구로다의 정변 당시 탱크와 장갑차에 포위되기도 했다. 군부독재기에는 지하 문서고에 원인은 알수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문서들이 소실되기도 하였다. 신군부 모시 정권에서는 수도 항쟁이 이곳 국회의사당 앞 광장과 대로를 중심으로 가두 시위가 전개되기도 했으며 월본사에서 굵직한 역사의 잔상을 남겼다. 지하철 치우단선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본관 서편 아래를 지나는 관계로 진동이 발생하여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질 수 있어서 본관 지하에 내진 구조물로 보강한 전력이 있으며 국회 앞마당에는 치우단선, 주교선 국회의사당역과 광장 서쪽에 계류선 국회광장역이 건설되었다. 국회 주변에서 시위가 진행되면 이 역들은 빈번하게 무정차 통과한다. 국회의사당 뒤편 블럭에는 내각총리대신 수상 관저가, 그 옆으로는 내각부 청사들이 모여 있어 이 주변은 다른 곳에 비해 경비경찰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다.

정당

월본 국회의사당 화이트.png 월본 원내구성 정당
여당
월본사회당 화이트.png
124석
야당
자유민주당 3기.png
291석
월본진보당 화이트.png
65석
재적의원 480석

월본의 정당은 크게 3가지의 분류가 있다. 첫번째로 자유민주당계 정당은 중도~보수 성향의 정당으로, 월본 초창기부터 구창모 전 총리에 의해 설립되어 이르고 있다. 2019년 구창모 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구창모 총재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노현옥 총재가 유네민주연합으로 바꾼것 이외에 아직까지도 월본 정치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현재의 자민당은 2021년 구창모 복권과 함께 2기 자민당이 들어섰다. 자민당은 다년간 월본 정치사를 다져온 세력으로, 그만큼 월본에 대한 이해도와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에 임한다. 두번째 세력은 창작계인데 인맥이 많은 자민당계에 비해 각각의 분파가 소규모로 자리해 있었다. 민주우와 장현을 필두로한 월본민주당 세력은 한때 자민당 텃밭이던 월본에 대응할만한 야당을 만들며 균형있는 정계를 구현했지만 갖가지 스캔들로 은퇴 수순에 들어갔고 현재는 여혜진 등 잔여 인물들이 자민당에서 보수 방류 파벌을 형성해 있다. 또 하나의 원로격 월본사회민주당 계열은 마츠다하루토라를 총재로 하여 진보 성향의 정당으로 꽤 오래 정치에 임했고 2023년에 들어서 정권창출에 성공하였고 1년여간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해왔지만 6.18 내란 사건으로 인해 한 순간에 몰락하여 잔류 세력은 월본사회당으로 남아있다.

선거

투표.png 월본의 주요 선거
종류 최근 선거 다음 선거
국회의원 선거 22대
2024년 11월
23대
2025년 5월
역대 국회의원 선거
단원제 (1대2대3대4대5대6대7대8대9대10대11대12대13대14대15대)
양원제 (16대17대18대19대)・20대21대22대
총리 선거 4대
2019년 2월
미실시
역대 총리 선거
1대2대3대4대
전국동시지방선거 2대
2019년 2월
4대
2025년 1월
역대 지방선거
1대2대4대

사법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월본/사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최고재판소

월본 국기.png 월본 최고재판소장
초대
Mirai
제2대
야마우치 사쿠라
제3대
Mirai

고등재판소

지방재판소

황실

월본 국장.png 월본국 천황
월본제국
제43대
다이치 천황
제44대
헤이모리 천황
제45대
소류 천황
월본국
제45대
소류 천황
제46대
메이우 천황
제47대
세이카 천황
제48대
마루히토
제49대
하로히토
월본 국장.png
하로히토
하로히토2.png
하로히토 천황

위키스 상세 내용 로고.svg 자세한 내용은 월본 황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현재 월본의 천황은 제49대 하로히토이며 2024년 6월 14일 즉위했다. 연호레이카(玲香)이다. 부황(父皇)인 마루히토는 생전 퇴위하여 상황(上皇)으로 물러났다. 월본 천황은 상징천황제를 따르는 헌법상 천황은 월본국의 국가원수라는 상징일뿐 어떠한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 정치적 중립성이 헌법상 규정되어 있으므로 국가의 내각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 중대사나 헌법이 정한 국사가 업무인 경우 수행한다. 월본 제국 시절에는 천황이 대원수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패전 이후 새로 만들어진 헌법에서 '월본국의 상징'이자 '월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헌법상 국가 원수를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내각총리대신과 최고재판소장을 임명하고 헌법과 법령, 외국 조약의 공포 등 권한이 사실상 천황에게 있어 실질적으로 국가 원수로 보고 있다. 또한 국가 의전 서열이 내각총리대신을 앞선다.

경제

전후 월본은 고도 경제 발전을 경험하며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사진은 도유의 번화가인 메이주의 모습.

1849년 다이치 유신 체제 이후 월본은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개항을 통해 경제적 영역을 확장하는데 주력했다. 다이치 천황 산업 분야별 자유 경쟁 체제를 도입하고 해외 자본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으며 이 시기에 서양으로부터 많은 학자들이 국가로부터 고용되었다. 해상 무역과 2차산업 위주의 상황에 맞추어 설계된 경제 구조를 설계했으며 그런 이유로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기계공업과 제조 가공업에서 우수한 실적을 거뒀다.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공업 역량은 전쟁 물자를 보급하는데 전념하게 되면서 항공엔진, 선박건조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그러나 전쟁 도중 폭격과 해체 등으로 대부분이 황폐화되었다. 전후 도시의 재건과 원천 기술의 확충, 첨단 기술의 투자 강화 등으로 60년대까지 급격한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60년대에는 10%, 70년대에는 5%, 80년대에는 4%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했다. 가파른 경제성장률은 90년대 이르러 둔화되었고 부동산과 무역업에 과도한 거품이 89년에 정점을 찍고 가치 평가가 절하되면서 10년 이상의 오랜 경제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락세는 2000년대에 잠시 반등하다가 다시 정체기에 접어든다.

주요 산업

월본은 첨단 제조 산업과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산업 구조가 형성되어 있으며, 전기전자, 교통, 자동차 산업이 주를 이룬다. 현성전자는 스마트폰과 가전 IT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성자동차는 완성차 분야에서 세계 1위 수준의 첨단 기술을 보유한 기업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철도 차량과 토목 분야에서는 여러 기업들이 활발히 활동하며 월본의 철도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게임, 메신저 등 디지털 분야에서도 新산업 열풍이 일고 있으며, HERA는 이러한 흐름을 이끄는 월본의 대표적인 신생 기업 중 하나이다. 이러한 다양한 산업의 발전을 통해 월본은 기술력과 혁신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IT・소프트웨어

월본 월본의 IT기업
현성 영문.png
 현성전자 
시나노 전자.png
 SHINANO 
파일:HERA 로고.PNG
 HERA 
문서가 없는 IT・전자 기업 사라진 기업
ACRO 웨이퍼 로고.png  Wafer │Hanabi│NP쇼크
NPC 기업
시마론

월본 IT・소프트웨어 시장 1위 기업은 HERA로 꼽힌다. 메신저 서비스인 헤라톡과 게임 서비스인 헤라게임즈를 중심으로 여러 IT・소프트웨어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2023년에는 미소노에 과학기술단지를 착공하였다.

철도교통

자동차・제조업

월본 월본의 자동차 제조사
2016-현성차로고.png
 현성자동차 
Coil 로고.png
 Coil 
제황자동차 로고.png
 제황자동차 
NPC 기업
ROTA하츠다ISSAN

'자동차'는 월본의 주요 산업 중 하나이다. 현성자동차가 시장 1위 사업자이며 Coil이 신흥강자로 주목 받고 있다. 과거에는 시타자동차, E-Motors 등이 있었다.

기업

재벌

대기업

사회 문화

언론

월본 월본의 방송/언론사
운영중인 방송사
ABN.png WBS 화이트.png TBC.png
문서가 없는 방송사
채널 V │News 24 │TBS 뉴스
운영 중단된 방송사
TBNSPNB도유의소리

월본의 언론사는 크게 '국가기간통신사', '국영방송', '민영방송'으로 나뉘며, ABN은 국영방송, WBS는 국기기간통신사, TBC 등은 민영방송사로 등록되어 있다. 언론의 자율화가 이루어져 민간 주도로 언론 보도가 발전되어 왔지만 황색언론인 WBC 사건 이후로 2021 언론개혁이 이루어져 엄격한 자격 위주로 할당되어 있다. 월본 전자정부 초창기에는 국영방송에서 '오픈형 언론'을 추구하며 개인이나 기업에서 별도로 언론사를 설립할 필요 없이 국영방송에 보도를 할 수 있었고 현재도 그런 특성이 남아있다.

교육

도유의 중문고등학교

월본은 고등학교까지 무상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5세가 되면 소학교에 입학하며 소학교는 7년제로 운영된다. 이후 4년제 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중학교 2학년 1학기까지는 모두 같은 교육을 받게 되지만 2학년 2학기부터는 진학반과 실업반, 예체능반으로 나누어 수업이 진행된다. 이후 각자의 진학 계획대로 일반계 고등학교, 실업계 고등학교, 특수영재 고등학교, 특수학교, 도제학교, 예술학교, 체육학교 등으로 입학하게 된다. 고등학교는 3년제이다. 일반계 고등학교는 일반적인 대다수의 학생이 진학하고, 실업계와 도제학교는 취업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직업 교육을 받는 곳이며 3학년 시기에는 실습 직원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수영재 고등학교는 과학, 외국어, 기타 항목면에서 우수한 능력을 가진 학생들을 육성하기 위한 학교이다. 특수학교는 장애 학생을 위한 학교이며 기업의 후원으로 대부분이 운영되고 있는 상태이다. 예술학교와 체육학교는 예체능계 학생들을 위한 학교이다.

기부사대 와기초캠퍼스 전경

대학교는 월본 전국에 350개가 있으며 그 중 80개는 국공립, 270개는 사립으로 운영되고 있다. 월본은 1950년대 미군정청의 교육 개혁으로 인하여 대학 평준화가 부분적으로 이뤄진 형태인데, 고등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 시험에 응시한 후 통과하면 대학교 입학 자격을 부여받는다. 졸업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내신 성적을 입학하고자 하는 학교에 제출한 뒤 합격하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즉 옛 1960년대 한국처럼 상위 2~30% 내외의 인재들만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그로 인해 대학 이름보다는 학과와 연구 네트워크의 위상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며, 대학 간 격차는 크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구월본제국대학교'라 불리는 전월본제국 시기의 명문대와 수도권, 일부 지방의 몇몇 사립대가 최상위권 대학으로 우대받는 등 대학 서열화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하위권으로 여겨지는 대학교를 나와도 큰 차별을 받지는 않으며 중하위권 대학교에서도 학과의 위상이 높다면 구월본제국대 못지 않은 우대를 받기도 한다. 단, 의과대학이나 치과대학, 약학대학은 어느 대학이던 간에 최상위급 입결을 보인다.

지역별 대학

스포츠

월본은 인구도 적지 않고 스포츠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 수영 등의 생활체육과 연계된 스포츠가 발전한 국가 중 하나이다. 프로야구는 지역별 구단과 지역팬들을 주축으로 야구 인기몰이를 하고있으며 전통적인 인기 스포츠인 월본 축구 리그 역시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더운 국가로 인식되지만 도후지방에서는 동계 스포츠도 발달하였으며 현재 동계 스포츠 투자도 아끼지 않고 있다. 아카타시는 고산지대와 설산지형이어서 스키분야도 집중 양성할 계획이다. 쇼트트랙과 스피드 스케이팅 분야에서도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가 급등하고 있고, 컬링과 아이스하키 역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야구

야구는 축구와 함께 양강 체제를 이루는 인기 스포츠이다. 아시아권에서 최정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 첨관보다 한 수 위의 전력으로 평가받는다. WPB 리그에는 많은 기업들이 팀의 스폰서로 참여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상위 두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축구

월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축구가 들어왔으며, 아시아 최초의 축구 구단인 FC 도유(1858년 창단)가 존재하는 국가이다. 월본은 1990년대 이후 세계 축구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월드컵에서 5번의 토너먼트 진출을 이뤄냈고, 1990년에는 아르헨티나를 이기고 4강에 오르는 밀라노의 기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자세한 것은 상위 두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관광

여행 관련

군사

방위대

단위

연호

玲香
레이카 13월 5일
'레이카' 연호를 발표중인 후미히라 겐페이 총리

월본의 연호는 월본국 내에서만 통용되는 공문서에 주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점차 사용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월본의 연호 계산은 월(月)로 세면 된다. 예를들어 2024년 7월이 레이카 원년(元年)이므로 2024년 9월 5일은 '레이카 3월 5일', 2025년 7월 20일은 '레이카 14월 20일'이 되는것이다. 서력년도가 넘어가도 계속 '월'을 세주면 된다. 오늘은 레이카 13월 5일이다. 이 위키에서는 '틀'을 이용해 간단하게 타임 스탬프를 만들 수 있다. {{레이카|연|월|일}}틀에 연, 월, 일을 입력해 넣으면 월본력을 계산하여 표출한다.

통화 화폐

여담

  • 2018년, 월본이 가상국제연합에 가입하고 곧바로 추천 가상국가 리스트에 등재되었다.
    2018 2 12부터 2019 1 12까지 UVN 카페에서 게시되었고,
    이후 위키스 추천 가국에 문서화 되었다.
  • 카페 가국중에서 '가상 기업 문화'를 주 컨텐츠로 내세우며 차별화를 했다는 점에서 월본의 2018 호황기가 회자되고 있다.
  • 2017년 건국된 가상국가 중에서 활발했던 당시 신흥 3개국으로 하늘미르, 대부여국, 월본 중 하나 였다.[2]

관련 문서

월본 월본 관련문서
역사 지리 정치 외교
경제 기업 방위대 스포츠
교통 인물 문화 관광

같이보기

각주

  1. 대부분 구창모+모창민 내각을 합쳐 구창모창민 시대로 부른다.
  2. 그러나 3개국 중 가장 찬밥 신세였다. 특유의 기업 문화가 월본을 카르텔로 보는 시선이 강했다. 기존 국련 기업들은 실존 이미지에 로고만 바꿔치우는데 비해 월본 기업들은 전부 창작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국련에서도 유서 깊은 창작 기업들이 대다수 있었다.